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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고백
미키 아키코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8월
평점 :
호화 별장의 2층 베란다에서 모토무라 히로키의 아내 미즈카와 8살 아들 도모키가 추락사합니다. 당시 1층에 있던 히로키는 충돌음을 듣고 두 사람의 사체를 발견했다고 진술하지만 이내 살인 혐의로 체포됩니다. 아내 미즈카가 사망 직전 한 편집자에게 보낸 ‘수기’에 “남편이 나와 아들을 죽이려 한다.”는 고발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이어 아들 도모키가 할머니에게 보낸 메일이 공개되는데, 거기엔 “엄마와 아빠가 날 죽이려 한다.”는 고발이 담겨 있어서 수사진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더구나 체포된 히로키가 “아내가 나와 아들을 죽이려 했다.”고 주장하자 변호사 무쓰기 레이는 관련자 탐문은 물론 꼼꼼한 현장조사를 통해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진짜 살의를 품은 것은 누구였는지를 밝혀내려 합니다.

앞서 출간된 ‘기만의 살의’와 ‘귀축의 집’ 모두 평점 만점을 줬던 터라 미키 아키코의 신작 소식은 무척 반갑고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이 ‘변호사 무쓰기 레이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 과연 어떤 캐릭터의 주인공이 등장할지도 사뭇 궁금했습니다.
‘패자의 고백’은 형식면에서 보면 전작인 ‘귀축의 집’과 비슷합니다. ‘귀축의 집’은 사립탐정 사카키바라가 인터뷰한 관련자들의 진술로만 이뤄져있었는데, ‘패자의 고백’ 역시 지문과 대화문 없이 사건 당사자들의 수기와 메일과 진술서, 그리고 주변인물들이 무쓰기 레이에게 한 진술들로만 이뤄져있습니다. 또한 “가정이라는 극히 좁은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도 마찬가지인데, 두 작품 모두 영미권의 도메스틱 스릴러와는 전혀 다른 결의 가족 미스터리를 품고 있어서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 큰 공감을 얻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어느 쪽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모호한 사건은 결국 사건의 주변에 흩뿌려진 무수한 간접사실이 판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번 사건은 결국 이 간접사실이 승부를 갈랐습니다.” (p307)
사망한 두 사람의 수기와 메일, 그리고 범인으로 지목된 한 사람의 진술이 전부일 뿐 명확한 물적 증거나 목격자 하나 없는 탓에 수사는 난항을 거듭합니다. 특히 상대방이 자신을 향해 살의를 품고 있었다는 세 사람의 엇갈린 진술은 검사와 변호사 모두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결국 이 진술들의 진위 여부는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 외엔 달리 밝힐 길이 없었고, 변호사 무쓰기 레이는 그 과정에서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사소한 단서들을 포착함으로써 끝내 진실을 밝혀내고 맙니다. 이런 설정 덕분에 ‘누가, 어떻게’보다는 ‘왜?’에 방점을 찍은 와이더닛 미스터리의 진수를 맛볼 수 있습니다.
‘기만의 살의’와 ‘귀축의 집’이 아날로그적인 인물과 사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감과 반전을 품은 전형적인 미스터리였다면, ‘패자의 고백’은 완만하면서도 묵직한 심리스릴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건 당사자인 세 사람의 수기와 메일과 진술이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며 초반 분위기를 팽팽하고 긴장감 있게 만들긴 했어도, 이후 전개되는 관련자들의 진술은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는 지루함보다는 심리스릴러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으며,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작가가 숨겨놓은 사소한 단서를 찾아내기 위해 열독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쑥 제3의 범인이 나타날 리도 없고, 결론은 “히로키가 범인이냐, 아니냐?”로 한정돼있기 때문에 독자는 당사자들의 수기와 메일과 진술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인물들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에도 집중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읽어야만 막판에 이르러 무쓰기 레이가 자신이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하나씩 밝히는 대목에서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전작들에 비해 다소 단선적인 구도와 한정된 반전 때문에 별 4개에 그치고 말았지만, 미키 아키코 특유의 정교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주인공인 변호사 무쓰기 레이의 캐릭터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점도 좀 아쉬웠지만, 그래선지 그녀가 활약하는 두 번째 이야기 ‘미네르바의 보복’이 머잖아 한국에 출간되기를 더욱 기대하게 됐습니다. 그 외에도 만년에 데뷔한 미키 아키코의 작품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아직 세 편밖에 소개 안 된 그녀의 작품들이 좀더 자주, 많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