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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라토 : 거세당한 자
표창원 지음 / &(앤드) / 2024년 9월
평점 :
매주 금요일 밤마다 도심 한복판 곳곳에서 절단된 남성 신체의 일부가 발견됩니다. 자극적인 언론에 의해 ‘카스트라토 사건’이란 이름까지 붙은 가운데 피해자들이 성범죄자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합니다. 단서 하나 못 잡아 궁지에 몰린 경찰은 결국 강력사건 수사역량 강화를 위해 특별히 설치된 ACAT까지 동원하며 각 분야의 전문가와 베테랑을 투입합니다. 하지만 밝혀진 거라곤 범인이 여러 명이라는 점, 성범죄자를 노린 주도면밀한 사적 복수라는 점, 피해자들의 생사가 불확실하다는 점뿐입니다. 첫 사건을 맡았던 인왕경찰서 강력5팀장이자 프로파일러 이맥은 ACAT와의 협업을 통해 조금씩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내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 속 불편한 사실들과 자꾸만 마주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카스트라토(변성기 이전에 거세되어 고음역대를 소화할 수 있게 된 남성 가수)라는 소재 자체도 눈길을 끌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첫 소설이라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의사가 쓴 메디컬 소설이나 변호사가 쓴 법정물처럼 좀더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프로파일러의 활약이나 사적 복수 모두 좋아하는 소재들이라 주인공 이맥의 행보도, 범인들의 정체와 범행 전반에 관한 묘사도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특히 거세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성범죄자를 사적으로 응징하는 범인들에게 곧바로 이입이 되어 응원하는(?) 마음까지 들면서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적잖은 분량을 통해 소개되는 이맥의 불행했던 과거들이 ‘카스트라토 사건’과 어떤 식으로 접점을 갖게 될지도 호기심을 자극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나름 여러 면에서 기대를 가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야박한 평점을 주고 말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인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소설이 아니라 ‘프로파일러 개론’을 강의하는 교수의 강의노트를 읽는 듯한 느낌을 여러 곳에서 받았다는 뜻입니다. 전문성도 디테일도 좋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과도했던 탓에 스킵하듯 건너 뛴 페이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이맥의 과거와 현재의 사건 사이의 접점이 다소 억지스러울 정도의 우연들로 채워진 점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건에 연루된 적잖은 인물들이 이맥의 과거에 한번쯤은 등장했던 자들이며, 그야말로 오랜만에 그것도 난데없이 이맥 앞에 나타나곤 합니다.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이르면 이 억지스러운 우연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설정이란 걸 알게 되긴 하지만, 독자조차 매번 “또?”라며 의아하게 여길 그 우연들을 정작 당사자인 이맥이 눈치 채지 못한 점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세 번째는 이맥과 ACAT가 용의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고 단순하다는 점입니다.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작은 바늘 하나를 찾아낸 느낌이랄까요? 심지어 사건 자체와 아무 연관 없는 특정인물을 ‘오로지 감 때문에’ 용의선상에 올리는 대목에선 웃음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어지는 수사 과정 역시 곳곳에서 허술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비약으로 채워져 있어서 긴장감을 오히려 떨어뜨리곤 했습니다.
여러 이유를 대긴 했지만 야박한 평점의 변(辯)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설로서의 재미와 완성도가 떨어진다.”입니다. 확실하게 기억에 남은 건 ‘프로파일러 개론’뿐이고, 주인공 이맥의 캐릭터나 사적 복수극의 긴장감이나 범죄스릴러 서사의 매력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맥의 경우 불행했던 과거사 외에는 단편적인 정보들만 산발적으로 소개돼서(가령 이맥의 지독한 우울증은 초반에 딱 한 줄만 언급된 뒤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생생한 인물상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작가의 말’을 보면 이맥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구상 중인 것 같은데, 다음 작품에선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좀더 공을 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겉모습과 스펙은 완벽하지만 인간미보다는 인공미가 더 강해 보였던 이맥에 대해서도 좀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