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배틀 케이스릴러
주영하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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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7청계산장의 재판’(박은우)을 시작으로 곤충’(장민혜), ‘붉은 열대어’(김나영),

그리고 현장검증’(이종관)까지 네 편의 케이스릴러를 읽었습니다.

인터넷서점을 찾아보니 11월에 출간될 언노운 피플’(김나영)19번째 케이스릴러인데,

5년도 안 된 시점에 낸 기대 이상의 파이팅에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개인적으론 행복배틀이 겨우 다섯 번째 만난 케이스릴러라 민망하지만,

한국 장르물에 이처럼 꾸준히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배틀은 기대 이상의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처음엔 “SNS에서 행복배틀을 겨루던 강남 영어유치원생 엄마 살인사건이라는 카피 때문에

읽을까 말까 고민하며 살짝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SNS를 하지 않는데다 스릴러 소재로서 SNS에 별 매력을 못 느꼈고,

살인사건 피해자가 부유한 강남 영어유치원생 엄마란 점도 호기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읽게 돼있는 책은 어떻게든 인연이 닿게 되는 건지 어찌어찌 행복배틀을 읽게 됐고,

생각지도 못하게 첫 장을 열자마자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하게 됐습니다.

 

행복배틀은 독자에 따라 무척 가벼운 이야기가 담겼다고 오해할 수 있는 제목이지만

사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오랜 상처와 악몽에 시달려 온 불행한 사람들이거나

그 불행을 잊거나 보상받기 위해 실재하지도 않는 행복에 매달리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누군가의 행복을 파괴함으로써 희열을 맛보는 칼만 안 든 사이코패스들입니다.

강남 부유층들의 얄팍한 SNS 놀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멋대로 예상했던 탓에

초반부터 묵직하게 전개되는 비극에 사뭇 놀라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17년 전 3총사처럼 어울려 지냈던 미호, 유진, 세경이 겪은 참혹한 비극이고,

또 하나는 현재 강남 부촌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상 사건 미스터리입니다.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유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미호는 스스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그와 함께 17년 전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3총사의 비극은 실은 처음부터 싹을 잘라낼 수도 있었던 작은 사건에서 잉태됐습니다.

반항기 섞인 불장난, 엉겁결의 거짓말 한마디, 그리고 사악한 악의 등

어디선가 분명 끊어낼 수 있었던 작은 사건들이 탄탄한 고리에 연결된 듯 연이어 벌어졌고

그로 인해 3총사의 짧았던 행복한 시간들은 17년 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행복배틀이라는, 유치하지만 악의로 가득 차있는 부유층들의 SNS 놀이는

더 이상 물질적인 자랑거리가 무의미해진 자들이 벌인 행복 자랑질이 그 실체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타인에게 무한한 시기와 질투심을 느낀 자들은

타인의 삶을 흠집 내거나 그들의 행복을 파괴하면서 더 큰 희열을 만끽했고,

그것은 더 이상 장난 같은 배틀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살상극을 초래하고 맙니다.

유진의 죽음을 조사하던 미호가 발견한 부유층의 시궁창 같은 SNS 놀이 속에는

행복 따위와는 무관한, 누군가를 향한 증오와 살의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살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경찰이나 형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17년에 걸친 불행에 마음 아파하면서, 또 사악한 자들의 악의에 분노하면서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설계했는지 여러 번 깨닫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점에서 별 0.5개를 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최종 반전 때문입니다.

 

이 반전은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없었더라면, 아니, 없었어야 이 작품의 여운을 길게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 사족과도 같은 최종 반전을 설정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앞서 읽은 이야기들을 다소 허망하게 만들 정도로 억지스러웠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작가의 과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의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처음 만난 주영하라는 한국 장르물 작가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읽는 내내 페이지는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술술 넘어갔고,

설계와 문장 모두 탄탄함 이상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후속작 소식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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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만두를 먹는 가족
이재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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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출간된 국내외 장르물 중 여러 사정으로 못 읽은 책들을 찾던 중에

영양만두를 먹는 가족이라는 다소 호기심을 자극하는 특이한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새로운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날 때마다 늘 반가운 마음이라 더 끌렸던 것 같은데,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 덕분에 잠깐의 여유가 난 틈을 타 속도전으로 읽어버렸습니다.

 

빨간 눈이라는 별명을 가진 는 흥신소 또는 사립탐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어느 날 는 미지의 의뢰인으로부터 컨테이너 화재사건의 조사를 의뢰받습니다.

화재로 사망한 신인범은 사건 발생 전 10억 원의 생명보험을 들었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가족들이 골고루 수익자로 설정돼있던 탓에 는 의구심이 발동합니다.

단순 화재일 수도 있고, 방화 살인일 수도 있고, 자살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는 신인범의 가족은 물론 주변사람들까지 샅샅이 탐문하며 정보를 얻어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이면에 숨어있던 가슴 아프면서도 잔혹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작품의 가장 큰 화두는 가족입니다.

본인 스스로 아버지의 가족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내쳐진 경험이 있는

사망한 신인범의 가족들을 탐문하면서 내내 위화감 또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어딘가 일그러진 듯 하면서도 한편으론 보통의 가족처럼 평범해 보이는 그들은

의 눈엔 모두가 용의자거나 혹은 그저 안쓰러운 유가족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의 의구심에 불을 붙인 건 그들 모두 너무나도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가족들 외에 신인범에게 살의를 지닐 만한 또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의 촉은 신인범의 가족에게 쏠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가족이 가장 냉혹한 집단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썼다.”라고 밝힙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면서도 가장 쉽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점에서,

또 그 상처의 깊이와 후유증이 웬만한 타인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냉혹한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그린 작가의 의도는 꽤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자살의 정황이 분명하지만 만약 살인이라면 가족 외에는 달리 범인이 있을 것 같지 않고,

혹시라도 가족 외의 범인이 나타난다면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보니

의 조사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과 동기에 더 주목하며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물론 여러 가지 변수들이 의 조사과정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긴장감을 갖게 하는데,

그 변수들이 가족이라는 냉혹한 집단과 뒤섞이면서 끝내 참혹한 진실을 드러내고 맙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문장과 시니컬하기 이를 데 없는 독설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곳곳에서 반짝이는 재치 있는 비유도 매력적이라 작가의 글빨에 반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개인적 취향 때문이긴 하지만 마지막 느낌은 그리 개운치는 않았습니다.

잠깐의 여유가 난 틈을 타 속도전으로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뭔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찜찜함을 간직한 채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

가해자의 동기와 목적도, 피해자의 심리와 의지도 다소 모호하게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속도전이 낳은 오독이거나 제 독해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제를 위해 무리한 결말을 이끌어냈다는 아쉬움이 든 게 사실입니다.

냉혹한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그리기 위해 작가가 조금은 억지를 부린 느낌이랄까요?

(사실, 또 다른 냉혹한 집단의 가족이 적잖은 비중으로 등장한 점도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주제를 위해 인공적으로 설정된 듯 보였습니다.)

 

사소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읽는 내내 거슬렸던 부분을 하나만 더 이야기하면,

들어본 적도 없는 일개 동네신문사 기자라는 명함을 내미는 에게

신인범의 주변사람들은 너무나도 친절하게 꼭 필요한 정보들을 전부 설명해준다는 점입니다.

경찰이나 대형언론사 기자라 해도 의심하거나 불쾌히 여길 상황이지만

등장인물 대부분 아무런 의심이나 이의 제기 없이 순순히 다 털어놓습니다.

의 활동의 대부분이 탐문인 점을 감안할 때 너무 안이한 설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글빨을 지닌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난 것은 역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작가의 출간목록을 살펴보다가 2013오늘의 작가상수상작인 펀치가 눈에 들어왔는데,

기회가 된다면 펀치를 읽은 뒤 충분한 여유를 갖고 이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속도전이 낳은 오독인지, 독해력의 부족인지, 정말 아쉬울 수밖에 없는 작품인지

한번쯤은 꼭 재확인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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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활동
이시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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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돼있지만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이지만 성적도 인격도 외모도 극과 극인 이영과 김세연은

어느 날 등굣길에 아파트 담벼락에 버려진 여고생의 시체를 함께 발견합니다.

이영은 CCTV에 찍힌 시체 앞 자신의 모습이 인터넷에 돌면서 범인으로 오인받기 시작하자

어딘가 수상쩍은 CCTV 관리자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하지만,

그로 인해 이영은 물론 김세연까지 피비린내 진동하는 엄청난 살육전에 휘말리게 됩니다.

 

화재로 부모를 잃었지만 인터넷에서 부모를 죽인 패륜아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이영은

툭하면 싸움질이나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켜 왕따 아닌 왕따로 지내는 남학생인 반면,

김세연은 중학생 시절 세계 해커대회를 휩쓴 경력과 함께

뛰어난 미모, 압도적인 성적, 극강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런 캐릭터 때문에 역시 왕따 아닌 왕따가 된 여학생입니다.

 

이들이 상대하는 은 살인을 취미로 삼는 미스터리한 집단 동호회입니다.

그들은 치밀한 계획을 짠 후 돌아가며 무고한 여성들을 살해해온 쾌락 살인마 집단이며,

선생이라 불리는 자가 모든 악을 설계하고 조종하는 최고위 배후입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에 사건이 벌어진 기간 역시 만 이틀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영-김세연 콤비가 동호회와 벌이는 전쟁은 최소 몇 배 이상의 스케일로 펼쳐집니다.

희대의 연쇄살인집단과의 대결이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갖고 있지만,

CCTV를 통한 사냥, 최고보안등급의 메신저, 기상천외한 해킹, 흉기로 돌변한 무인자동차 등

양측이 보유한 전투력은 마치 첨단 기술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이고,

액션 장면 역시 천재 미소녀와 왕따 꼴찌 콤비가 펼치는 거침없는 청춘 액션 스릴러라는,

어딘가 가볍고 코믹한 분위기를 풍기는 홍보카피와는 거리가 먼,

피와 뼈가 난무하는 잔혹한 장면들을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순수하게 재미를 추구하는 킬링타임용 스릴러로서 매력도 있고,

길지 않은 분량 때문에 첫 장을 열면 단숨에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영과 김세연의 캐릭터도 살짝 판타지처럼 보이긴 해도

액션물 주인공으로서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흥미롭게 지켜보게 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살인집단 동호회의 모호함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의사, 교사, 사장, 공무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능력을 활용해 계획을 짠 후 돌아가며 살인을 저지르고

서로 알리바이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살해해 온 쾌락 살인마집단이라는데,

정작 이런 정체성은 누군가의 짧은 설명 또는 인용으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물론 이영과 김세연이 형사가 아닌데다 작가의 목표 역시 단순한 범인잡기가 아닌 탓에

동호회의 그간의 범행들을 현재 시점에서 상세히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만 설명되고 마는 동호회의 악행은 별로 현실감이 없어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론 기승전결 중 이 쏙 빠진 채 에서 바로 로 점프한 느낌이었는데

바로 이 자리에 동호회의 정체성과 악행이 그려졌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반 판타지로 불린다는 작가의 전작 이계리 판타지아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다음 작품이 역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라면 충분히 기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한 명의 새로운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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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 김희재 장편소설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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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 이 작품의 중요한 내용과 설정들이 꽤 많이 공개돼있는데,

살짝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단 그 범위 안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난 몇 년간 윤색작가 서원의 삶은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습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연인이던 건축디자이너 승우는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제야 뱃속에 자신과 승우의 2세가 자리 잡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정진의 도움으로 큰 위기를 넘긴 서원은

그의 진심어린 구애에도 승우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번번이 거절했지만,

정진의 집이 오래 전 승우가 자신을 위해 설계했던 바로 그 집임을 알게 되곤

오로지 승우의 흔적을 느끼기 위해 정진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완벽한 IOT(사물인터넷)가 구현된 정진의 집은 겉으로는 이상적인 집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재 그 집 2층에는 서원과 정진 외에 또 한 사람의 남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서원이 정진 몰래 끌어들인 옛 연인 승우입니다.

 

영화감독 김성호의 추천의 말을 좀 축약 편집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착에 관한 심오한 심리소설, 남녀 성인의 설레는 에로틱 소설,

그런데 거기에 SF에 나올 법한 판타지와 결합된 공포소설이나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하우스는 이러한 복합장르 소설로서는 독보적인 존재일 것이다.”

 

요약한 줄거리만 보면 집착, 심리, 에로틱까지는 누구나 쉽게 예상이 가지만

SF, 판타지, 공포 같은 코드가 어떻게 결합됐다는 건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대목까지 서평에서 소개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스티븐 킹의 중단편의 향기가 물씬 배어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외딴 언덕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외경에 완벽한 IOT가 구현된 꿈에 그린 집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집을 감도는 분위기는 무척 불편하거나 음울하거나 서늘하기까지 합니다.

사라진 연인의 흔적을 느끼기 위해 그의 아기를 임신한 채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서원과

도무지 정을 줄 수 없는 아기는 물론 늘 예민한 서원 때문에 마음이 아픈 정진의 관계는

완벽한 외경과 인테리어, IOT의 편안함과는 달리 집 전체에 싸한 분위기만 맴돌게 만듭니다.

 

하지만 집의 분위기는 정진이 출근함과 동시에 180도 바뀝니다.

아기를 안은 승우가 2층에서 내려오면 서원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갓 연애를 시작한 뜨거운 열정에 휩싸인 모습이랄까요?

그렇지만 위태위태한 세 사람의 동거는 예정된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영미권 심리스릴러가 생각나는 독자들이 많을 텐데,

저 역시 그런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작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기막힌 후반부를 내놓습니다.

물론 이 대목에 대해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낯설 수도, 억지 같아 보일 수도, , 앞서 읽은 이야기가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반면

영화감독 김성호의 추천의 말대로 복합장르의 신선함에 매력을 느낄 수도,

스티븐 킹의 공포물이 전해주는 막판의 짜릿함 때문에 환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작인 소실점을 무척 재미있게 읽은 덕분에 김희재의 다음 이야기가 무척 기대됐고,

역시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점을 작품 곳곳에서 여러 번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에 대한 호감을 상기시키며 호평을 써보자고 스스로를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호불호의 경계선에서 어느 쪽도 택하기 어렵게 만든 클라이맥스와 엔딩 때문에

고민 끝에 꽤 야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별 3.5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김희재의 신작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기대하고 주목할 것은 분명합니다.

이 작품으로 김희재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소실점을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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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검은 그림자의 진실
나혁진 지음 / 몽실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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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불의의 사고로 가족이 붕괴된 뒤 경찰을 그만두곤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한 이호진.

그런 그에게 10년 동안 상사였던 백과장이 찾아와 실종된 딸 은애를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백과장이 공식 수사 대신 호진에게 은밀한 조사를 부탁한 건

실종된 은애가 인터넷에 떠도는 음란물에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기억하던 범생이은애와 음란물 속 은애의 엄청난 간극 때문에 충격을 받은 호진은

단서 하나 없이 음란물이 담긴 USB 하나만을 손에 쥔 채 불가능해 보이는 수사에 나섭니다.

 

● ● ●

 

2014교도섬’, 2017낙원남녀이후 세 번째로 만나는 나혁진의 작품입니다.

교도섬은 강력범죄자의 영원한 격리를 위해 정부가 임대한 필리핀의 작은 섬이 무대였고,

낙원남녀는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상큼하고 발랄한 로맨틱 추리극이었는데,

이번에 나혁진은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n번방, 야동, 벗방 등

성을 매개로 한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소재 면에서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상처는 작가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지만 워낙 민감한 소재라 주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위험하고 폭발력 강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가족을 잃은 뒤 형사라는 직업을 택한 자신을 혐오하며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호진이

백과장의 딸 은애의 실종사건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무엇보다 10년 동안 모셨던 백과장에 대한 의리가 먼저 작동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실종된 은애가 인터넷에 떠도는 음란물에 등장했다는 점,

그것도 강요받았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보인 그녀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시절의 모범적인은애를 기억하는 호진에게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이었고

분명 이면에 뭔가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호진의 수사는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한 기승전결로 이어집니다.

마무리됐다 싶으면 예상치 못한 큰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이어진 수사를 통해서 알게 되는 은애에 관한 사실들은 호진을 무자비하게 뒤흔듭니다.

그리고 정말 마무리됐다 싶을 때, 그는 새로운 위화감을 느끼곤 찬찬히 기억을 더듬다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서사 덕분에 35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롤러코스터를 몇 번은 탄 느낌을 받게 되는데

소재 자체가 워낙 민감한데다 다소 잔혹한 장면들도 적잖이 포함돼있어서

독자가 느끼는 속도감과 아찔함은 훨씬 더 배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몇몇 지점에서 아쉬운 점도 느껴졌는데,

무엇보다 호진의 수사가 조금은 쉽고 편하게 전개됐다는 점,

그를 위해 꼭 필요한 정보를 지닌 조연들이 적재적소에 편리하게 배치됐다는 점,

납득 가능한 반전보다는 강력한 의외성에 방점을 찍은 듯한 막판 진실의 무리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자아낸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서사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사회적 이슈로까지 확장되지 못한 소재의 문제인데,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성 문제들을 통렬하게 파헤쳐 드러내고 있는이란 카피는

좀더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 제기와 함께 그에 걸맞은 마무리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채 조금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시켰다는 뜻입니다.

 

교도섬후기에서 작가는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라는 표현을 쓴 적 있는데,

낙원남녀에서도 살짝 엿보였던 그 치기는 이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소재나 주제가 치기를 부리기엔 적절치 않았던 점도 있지만

분명 전작들에 비해 좀더 진화되고 성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좀더 정교한 설계와 묵직한 디테일이 장착된다면 다음 작품에선 그의 치기

오히려 독자의 눈길을 끄는 가장 큰 힘이 될 거란 기대와 바람이 함께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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