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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만두를 먹는 가족
이재찬 지음 / 네오픽션 / 2020년 4월
평점 :
2020년 출간된 국내외 장르물 중 여러 사정으로 못 읽은 책들을 찾던 중에
‘영양만두를 먹는 가족’이라는 다소 호기심을 자극하는 특이한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새로운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날 때마다 늘 반가운 마음이라 더 끌렸던 것 같은데,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 덕분에 잠깐의 여유가 난 틈을 타 속도전으로 읽어버렸습니다.
‘빨간 눈’이라는 별명을 가진 ‘나’는 흥신소 또는 사립탐정이라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어느 날 ‘나’는 미지의 의뢰인으로부터 컨테이너 화재사건의 조사를 의뢰받습니다.
화재로 사망한 신인범은 사건 발생 전 10억 원의 생명보험을 들었는데
특이하게도 그의 가족들이 골고루 수익자로 설정돼있던 탓에 ‘나’는 의구심이 발동합니다.
단순 화재일 수도 있고, 방화 살인일 수도 있고, 자살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는 신인범의 가족은 물론 주변사람들까지 샅샅이 탐문하며 정보를 얻어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의 이면에 숨어있던 가슴 아프면서도 잔혹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작품의 가장 큰 화두는 ‘가족’입니다.
본인 스스로 ‘아버지의 가족’과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내쳐진 경험이 있는 ‘나’는
사망한 신인범의 가족들을 탐문하면서 내내 위화감 또는 불편함을 느낍니다.
어딘가 일그러진 듯 하면서도 한편으론 보통의 가족처럼 평범해 보이는 그들은
‘나’의 눈엔 모두가 용의자거나 혹은 그저 안쓰러운 유가족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구심에 불을 붙인 건 그들 모두 너무나도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가족들 외에 신인범에게 살의를 지닐 만한 또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나’의 촉은 신인범의 가족에게 쏠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가족이 가장 냉혹한 집단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썼다.”라고 밝힙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면서도 가장 쉽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점에서,
또 그 상처의 깊이와 후유증이 웬만한 타인보다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냉혹한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그린 작가의 의도는 꽤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자살의 정황이 분명하지만 만약 살인이라면 가족 외에는 달리 범인이 있을 것 같지 않고,
혹시라도 가족 외의 범인이 나타난다면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다 보니
‘나’의 조사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과 동기에 더 주목하며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물론 여러 가지 변수들이 ‘나’의 조사과정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긴장감을 갖게 하는데,
그 변수들이 ‘가족이라는 냉혹한 집단’과 뒤섞이면서 끝내 참혹한 진실을 드러내고 맙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문장과 시니컬하기 이를 데 없는 독설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곳곳에서 반짝이는 재치 있는 비유도 매력적이라 작가의 ‘글빨’에 반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개인적 취향 때문이긴 하지만 마지막 느낌은 그리 개운치는 않았습니다.
잠깐의 여유가 난 틈을 타 속도전으로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뭔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찜찜함을 간직한 채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
가해자의 동기와 목적도, 피해자의 심리와 의지도 다소 모호하게 마무리됐기 때문입니다.
속도전이 낳은 오독이거나 제 독해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주제를 위해 무리한 결말을 이끌어냈다는 아쉬움이 든 게 사실입니다.
즉 ‘냉혹한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그리기 위해 작가가 조금은 억지를 부린 느낌이랄까요?
(사실, 또 다른 ‘냉혹한 집단’인 ‘나’의 가족이 적잖은 비중으로 등장한 점도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주제를 위해 인공적으로 설정된 듯 보였습니다.)
사소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읽는 내내 거슬렸던 부분을 하나만 더 이야기하면,
들어본 적도 없는 ‘일개 동네신문사 기자’라는 명함을 내미는 ‘나’에게
신인범의 주변사람들은 너무나도 친절하게 꼭 필요한 정보들을 전부 설명해준다는 점입니다.
경찰이나 대형언론사 기자라 해도 의심하거나 불쾌히 여길 상황이지만
등장인물 대부분 아무런 의심이나 이의 제기 없이 순순히 다 털어놓습니다.
‘나’의 활동의 대부분이 탐문인 점을 감안할 때 너무 안이한 설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글빨’을 지닌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난 것은 역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작가의 출간목록을 살펴보다가 2013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펀치’가 눈에 들어왔는데,
기회가 된다면 ‘펀치’를 읽은 뒤 충분한 여유를 갖고 이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속도전이 낳은 오독인지, 독해력의 부족인지, 정말 아쉬울 수밖에 없는 작품인지
한번쯤은 꼭 재확인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