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 검은 그림자의 진실
나혁진 지음 / 몽실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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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불의의 사고로 가족이 붕괴된 뒤 경찰을 그만두곤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한 이호진.

그런 그에게 10년 동안 상사였던 백과장이 찾아와 실종된 딸 은애를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백과장이 공식 수사 대신 호진에게 은밀한 조사를 부탁한 건

실종된 은애가 인터넷에 떠도는 음란물에서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기억하던 범생이은애와 음란물 속 은애의 엄청난 간극 때문에 충격을 받은 호진은

단서 하나 없이 음란물이 담긴 USB 하나만을 손에 쥔 채 불가능해 보이는 수사에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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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교도섬’, 2017낙원남녀이후 세 번째로 만나는 나혁진의 작품입니다.

교도섬은 강력범죄자의 영원한 격리를 위해 정부가 임대한 필리핀의 작은 섬이 무대였고,

낙원남녀는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상큼하고 발랄한 로맨틱 추리극이었는데,

이번에 나혁진은 최근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n번방, 야동, 벗방 등

성을 매개로 한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소재 면에서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상처는 작가라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지만 워낙 민감한 소재라 주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위험하고 폭발력 강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가족을 잃은 뒤 형사라는 직업을 택한 자신을 혐오하며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호진이

백과장의 딸 은애의 실종사건에 뛰어들기로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무엇보다 10년 동안 모셨던 백과장에 대한 의리가 먼저 작동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실종된 은애가 인터넷에 떠도는 음란물에 등장했다는 점,

그것도 강요받았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보인 그녀의 행동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청소년 시절의 모범적인은애를 기억하는 호진에게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장면이었고

분명 이면에 뭔가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호진의 수사는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한 기승전결로 이어집니다.

마무리됐다 싶으면 예상치 못한 큰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이어진 수사를 통해서 알게 되는 은애에 관한 사실들은 호진을 무자비하게 뒤흔듭니다.

그리고 정말 마무리됐다 싶을 때, 그는 새로운 위화감을 느끼곤 찬찬히 기억을 더듬다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서사 덕분에 350여 페이지의 분량임에도 롤러코스터를 몇 번은 탄 느낌을 받게 되는데

소재 자체가 워낙 민감한데다 다소 잔혹한 장면들도 적잖이 포함돼있어서

독자가 느끼는 속도감과 아찔함은 훨씬 더 배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몇몇 지점에서 아쉬운 점도 느껴졌는데,

무엇보다 호진의 수사가 조금은 쉽고 편하게 전개됐다는 점,

그를 위해 꼭 필요한 정보를 지닌 조연들이 적재적소에 편리하게 배치됐다는 점,

납득 가능한 반전보다는 강력한 의외성에 방점을 찍은 듯한 막판 진실의 무리수,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자아낸 어딘가 가벼워 보이는 서사의 문제가 그것입니다.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사회적 이슈로까지 확장되지 못한 소재의 문제인데,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성 문제들을 통렬하게 파헤쳐 드러내고 있는이란 카피는

좀더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 제기와 함께 그에 걸맞은 마무리를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그렇지 못한 채 조금은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시켰다는 뜻입니다.

 

교도섬후기에서 작가는 신나게 놀아보고 싶었던 저자의 치기라는 표현을 쓴 적 있는데,

낙원남녀에서도 살짝 엿보였던 그 치기는 이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소재나 주제가 치기를 부리기엔 적절치 않았던 점도 있지만

분명 전작들에 비해 좀더 진화되고 성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좀더 정교한 설계와 묵직한 디테일이 장착된다면 다음 작품에선 그의 치기

오히려 독자의 눈길을 끄는 가장 큰 힘이 될 거란 기대와 바람이 함께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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