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성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3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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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코너스톤에서 출간한 아르센 뤼팽 전집중 세 번째 작품인 기암성입니다. 1~2편인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를 읽고 5년 반 만이니 좀 과한 공백이 있었던 셈인데, 달리 해석하면 그만큼 먼저 읽은 두 편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셜록 홈즈의 경우 청소년 판으로 읽을 때부터 바로 팬이 됐지만, ‘괴도 루팡’(예전엔 이렇게 불렀습니다.)도둑이 주인공?”이라는 호기심과 기대에 비해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던 탓에 이렇게 뒤늦게야 전집으로 만나게 된 건데, 아무래도 제 성향은 역시 셜록 홈즈 쪽이라는 걸 재확인한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스브르 백작의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놓고 예심판사, 검사대리, 현지 경찰은 물론 파리에서 파견된 가니마르 경감마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17살 천재소년 이지도르 보트를레가 범행의 목적과 방법을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더구나 보트를레는 범인의 우두머리가 뤼팽이란 사실까지 적시하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하지만 보트를레가 사건현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암호 쪽지는 이후 사건의 양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뤼팽을 꺾은 천재소년으로 칭송받게 된 보트를레는 뤼팽과의 끝장대결을 위해 암호 쪽지를 단서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끝내 노르망디 해안에 자리한 기암성, 즉 뤼팽의 요새에 다다르게 됩니다.

 

기암성은 아르센 뤼팽을 안 읽은 독자라도 그 이름은 여러 차례 들어봤을 만큼 시리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계기로 뤼팽의 매력에 한껏 빠져들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가진 게 사실인데,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여러 가지 면에서 기대에 못 미친 아쉬움만 잔뜩 남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 호흡만 빠르지 상황이나 감정을 전혀 이해시키지 못한 하이라이트 요약본같은 문장들이 내내 거슬렸습니다. 어떤 인물도 자신의 감정을 독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고, 중요한 상황 대부분은 앞뒤 맥락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과하게 압축, 요약돼있습니다.

당연히 사건에 연루된 주요 인물들의 행보도 정신없이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는데, 고교생인 보트를레가 애초 어떻게 사건현장에 나타날 수 있었던 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가 굳이 뤼팽과의 전면전에 목숨을 건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주인공인 뤼팽은 이 작품에서 신출귀몰한 도둑으로서의 면모는 물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라도 사랑을 쟁취하려는 순정남으로 그려지지만, 작품 내내 통 잘 보이지도 않고, 그나마 나타났다 하면 말도 안 되는 변장술만 부리고, 감정은 전부 제 입으로만 설명하고 있으니 도둑이든 순정남이든 어느 하나 매력적인 면모가 없었습니다.

 

기암성서평 대부분에서 지적되는 조연들의 문제도 굉장히 실망스러웠는데, 뤼팽의 숙적인 헐록 숌즈(코난도일의 동의를 못 얻은 탓에 셜록 홈즈가 이런 식으로 표기됩니다.)는 멍청한 헛발질만 하다가 말도 안 되는 악행까지 저질러서 이럴 거면 왜 나온 거야?”소리를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고, 역시 뤼팽을 쫓는 단골 추격자 가니마르 경감은 늘 뒷북만 치거나 그 뒷북마저 아무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위기감은커녕 헛웃음만 나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뤼팽의 요새이자 은신처인 노르망디 해안의 기암성은 터무니없는 역사와 그 용도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이라곤 조금도 없는 억지 그 자체로만 보였습니다. 그저 뤼팽을 신격화하기 위한 황당무계한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서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읽으면서도 조금도 긴장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애초 제스브르 백작의 저택에서 벌어진 사건이 어떤 과정을 겪어서 기암성에서의 마지막 대결까지 연결됐는지조차 애매모호할 따름이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 그 중요한 대목들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제 기억력과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거나 아니면 이해도 공감도 얻지 못한 채 억지에 억지를 거듭하며 그저 빨리 달리기만 한 이야기탓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리즈 다음 작품은 기암성못잖게 유명한 ‘813’인데, 솔직히 그 작품을 언제쯤 읽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 매력적인 괴도 뤼팽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작품이 있을 텐데, 한 편이라도 그런 작품을 만난다면 스스로를 달래서라도 이 시리즈를 마스터하고 싶은 욕심이 있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리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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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엔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1
윌리엄 요르츠버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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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59년 뉴욕. 사립탐정 해리 엔젤은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재력가 루이 사이퍼로부터 10여 년쯤 스타덤에 올랐다가 전쟁 중 부상으로 장기입원 중인 가수 자니 페이버릿의 근황을 알아봐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처음엔 그저 그런 안부 확인 차원의 의뢰라고 여겼지만 자니가 오래 전에 병원에서 사라진 상태였고 그를 담당했던 의사는 뭔가를 감추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엔젤은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때부터 자니의 흔적을 찾는 엔젤의 집요한 탐문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자니의 과거를 파고들수록 부두교, 악마숭배, 마법 등 기괴한 단서들이 연이어 발견된다는 점. 그리고 그보다 엔젤을 더욱 큰 충격에 빠뜨린 건 그가 탐문 과정에서 만났던 인물들이 마치 악마의 의식과도 같은 방법으로 잔혹하게 살해된다는 점입니다.

 

읽는 건 몰라도 오컬트 호러를 영상으로 보는 건 기피하던 저였지만 이 작품을 원작 삼아 제작된 영화 엔젤 하트를 본 건 순전히 배우 미키 루크 때문이었습니다. 좀 무서운 영화라는 걸 알고 봤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끔찍한 영상들과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대부분 기억에서 날아갔고 일부 그로테스크한 앵글들만 아른거리는 가운데 절대 잊지 못할 장면 하나가 있는데, 그건 바로 육체에서 분리된 상태에서도 열심히 피를 내뿜으며 뛰고 있는 인간의 심장을 클로즈업 한 장면입니다.

엔젤 하트의 원작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우연히 인터넷 중고서점을 돌아다니다가 이 작품을 발견하곤 무슨 이유에선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장바구니에 넣었던 건데, 막상 사놓고 꽤 오래 뜸을 들였던 건 역시나 오컬트 호러의 후유증을 두려워한 소심함 때문이었습니다.

 

뉴욕의 사립탐정 해리 엔젤은 냉소와 자만과 겉멋으로 똘똘 뭉친 이른바 전형적인 영미권 하드보일드 탐정 캐릭터입니다. 그래서인지 프랑스 여권을 가졌지만 국적은 불분명한데다 이름부터 수상한 의뢰인 루이 사이퍼(Louis Cyphre)를 만난 이후 그의 탐정으로서의 행보는 초중반까지만 해도 좀 가벼워 보이는 필립 말로처럼 보였고, 제가 기억하는 영화 엔젤 하트의 분위기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느낌이라 당황하기까지 했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엑소시스트를 썼다고 생각해보세요. 이 소설이 딱 그렇습니다.”라는 스티븐 킹의 평은 이 작품 속에 기묘하게 섞여있는 하드보일드 탐정 서사와와 오컬트 호러 코드를 한마디로 잘 압축하고 있는데, 어쨌든 좀 가벼워 보이는 필립 말로로 출발한 이야기는 조금씩 끔찍한 악마가 날뛰는 지옥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뉴욕 탐정지극히 비현실적인 악마의 주술이 어떻게 접점을 가지게 될까, 무척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작가는 자니 페이버릿의 행방을 쫓는 해리 엔젤의 발자취 속에 그 접점의 단서들을 아주 조금씩 풀어놓음으로써 이질감이나 위화감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자니 페이버릿 주위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부두교나 악마숭배에 빠져있는 설정은 조금은 이상해 보이기도 했지만 뒤에 가면 그런 설정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적절한 타이밍에 터지는 엽기적인 살인사건들(눈에 총을 맞고, 성기가 입과 기도를 막고, 심장이 몸에서 분리되고...)은 한편으론 해리 엔젤이 현실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걸 상기시키면서도 한편으론 그 수법이 너무나도 악마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이런 장면들 역시 독자로 하여금 섞이기 힘든 두 장르의 교묘한 합체를 이질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꽤 놀라긴 했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였는데, 책으로 다시 접한 반전은 놀랍고 충격적이긴 해도 뒤통수를 세게 두들겨 맞았다는 느낌까진 받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마치 분량에 쫓겨 허겁지겁 마무리한 듯한, , 뭔가 설명하다 만 것 같은, 그래서 굉장히 애매모호해서 이런저런 상상과 추정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반전이랄까요?

어쩔 수 없이 저의 상상과 추정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스포일러 게시물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었는데, 저의 무지함 또는 지나치게 빠르게 페이지를 넘긴 탓에 뭔가를 놓친 게 아니라면 해리 엔젤이 맞이한 반전과 엔딩에 대해 적어도 20~30페이지 정도는 친절한 설명이 추가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이런저런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 작품을 읽은 덕분에 영화로 만들어진 엔젤 하트를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비록 영상으로 제작된 호러물에 여전히 두려움을 갖고 있는 소심한 1인이지만, 좀더 간결하고 선명하게 해리 엔젤의 이야기를 맛보고 싶은데다 가물가물하긴 해도 압도적으로 느껴졌던 그로테스크한 앵글의 묘미도 다시 한 번 만끽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때 푹 빠졌던 미키 루크의 리즈 시절을 즐기고 싶은 욕심 역시 한몫 거들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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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로의 여행 열린책들 세계문학 270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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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운 유럽. 영국 무기제조사의 직원인 엔지니어 그레이엄은 터키 정부와 비밀스러운 무기 거래 계약을 체결하고 오는 길에 독일 정보부가 보낸 암살자의 추격을 받는다. 터키 비밀경찰은 그레이엄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그를 소수 인원만 탑승하는 화물선에 승선시킨다. 폐쇄된 배 안에는 비밀경찰이 사전에 신원을 확인한 몇 명의 승객들만 탑승해 있다. 헝가리 출신의 미녀 댄서, 독일 고고학자, 터키 담배상, 프랑스 사회주의자 등. 이렇다 할 위험 요소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레이엄이 그럭저럭 항해에 적응해 나갈 무렵, 배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아직 읽진 못했지만 제목만은 낯익은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의 작가 에릭 앰블러의 작품입니다. 사실 작가 이름도 무척 생소했던 게 사실인데, 이 작품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된 걸 알곤 작가나 작품 모두 평범치 않은 위상을 지녔음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현대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는 호칭과 함께 값싼 흥미 위주의 스파이 소설들과 결을 달리하는, (중략) 문학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갖춘 앰블러의 작품들은 스릴러 장르의 작품성을 높이 끌어 올려 존경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화시켰다.”는 소개글은 지금부터 무려 80년 전에 출간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줬습니다.

 

주인공 그레이엄은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무렵, 영국의 무기제조사의 엔지니어라는 민감한 직업을 가지긴 했지만 그건 단지 외양일 뿐 그는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자에 불과합니다. 특별히 애국심에 고취된 것도 아니고, 나치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특정 사상에 경도된 인물도 아닙니다. 그저 스스로를 해외출장이 잦은 평범한 샐러리맨이라 여길 뿐이었지만 본인의 의지나 사상과 무관하게 독일 정보부의 목표물이 된 그레이엄은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화물선에서 제목 그대로 공포로의 여행’(원제 Journey into Fear)을 경험하게 됩니다.

 

37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심플하고 단조로운 구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갑자기 살해위협을 받게 된 무기 엔지니어, 안전한 귀국을 위해 선택한 화물선에서 맞닥뜨린 살해 위협, 그리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한 선택과 그 선택이 몰고 온 극적인 결말 등 지극히 교과서적인 기승전결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건 중심의 이야기였다면 1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분량에 그쳤겠지만, 작가는 스파이 심리스릴러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만큼 내밀하고 디테일한 문장들을 통해 두툼한 볼륨감과 함께 긴장감으로 가득한 370여 페이지의 분량을 만들어냈습니다.

국제적 사건에 휘말려 목숨이 오락가락하게 된 평범한 개인의 극도의 공포, 육지가 빤히 보이는데도 탈출할 곳이라곤 망망대해밖에 없는 화물선이라는 공간의 압박감, 그 화물선에 탑승한 어딘가 비밀스럽고 위험해 보이는 승객들의 캐릭터, 그 승객들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2차 대전 목전의 불안한 유럽의 정치적 상황 등은 사건의 단조로움을 잊게 만들만큼 독자의 눈길을 끄는 설정들입니다.

 

그레이엄의 공포를 한층 더 현실감 있게 만드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본능과 욕망을 자극하는 미녀 댄서 조제트라는 캐릭터인데, 그레이엄은 자신이 처한 극한의 위기가 엄연한 현실임을 자각하면서도 조제트와의 판타지를 꿈꾸며 잠시나마 그 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는 공포를 생생하게 공감하게 만듭니다. 눈앞에 닥친 암살의 공포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그레이엄의 모습은 다른 어떤 설정보다도 매력적으로 읽힌 대목이었습니다.

 

공포로의 여행은 엄밀히 말하면 요즘의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고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치와 미덕은 단순히 재미나 복잡함을 기준 삼아 평가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랜 냉전을 야기한 세계대전 발발 직전 시점에 제대로 된스파이 스릴러의 맹아가 꿈틀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스릴러 독자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보다 1년 먼저 출간된 디미트리오스의 가면’(1939) 역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2020년에 출간됐다고 하는데, 조만간 에릭 앰블러의 고전과 다시 만날 기회를 기대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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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 - 탐정 아이제아 퀸타베의 사건노트
조 이데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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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라는 별명을 지닌 흑인 청년 아이제아 퀸타베는 주위에서 무면허 비밀 해결사로 통하는 인물입니다. 소소한 사건들을 말끔히 해결해주는 동네탐정으로 유명하기 때문인데, 그가 의뢰인들로부터 받는 대가는 음식이나 청소 같은 소박한 현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IQ에게 큰돈이 필요한 상황이 닥칩니다. 후원하는 장애소년의 거처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인데 때마침 10대 시절 악연을 맺었던 도슨으로부터 돈이 되는사건을 중개받습니다. 의뢰의 내용은 거물 래퍼 살해미수범을 찾아내는 것. CCTV에 찍힌 범인은 전혀 신원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인데, 더 큰 문제는 그 범인의 흉기가 위험천만한 견종인 대형 핏불이란 점입니다.

 

무척 독특한 외양을 지닌 작품입니다. 탐정 주인공이 보기 드물게 흑인이라는 점, 일본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작가가 50대 후반에 데뷔작으로 발표한 작품인데 셰이머스 상, 매커비티 상, 앤서니 상을 석권한 점 등이 그것입니다. 덧붙여 “LA의 뒷골목을 누비는 21세기형 셜록 홈즈라는 홍보카피까지도 이 작품의 독특한 위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핏불을 이용하여 래퍼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범인과 그의 배후를 찾는 현재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IQ가 어떤 우여곡절을 통해 동네탐정 또는 무면허 비밀 해결사가 됐는지를 보여주는 그의 10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은 뒤 형 마커스의 보호 아래 성장하던 IQ는 그야말로 천재에 가까운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형을 잃은 뒤 IQ는 절망에 빠진 채 방황을 일삼다가 악동 도슨을 만나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맙니다. 잠시 그 세계에 중독됐지만 치명적인 사고가 일어난 뒤에야 정신을 차린 IQ는 우연히 발견한 자신의 재능을 발판삼아 탐정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현재, 나름 유명세를 얻은 IQ는 과거의 악연인 도슨이 중개한 사건이란 점이 마땅치 않았지만 거액의 수수료 때문에 래퍼 살인미수사건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유일한 단서인 특이할 정도로 거대한 핏불 찾기에 전력을 다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때 슈퍼스타였지만 지금은 번아웃 상태에 빠져 약물에만 의지하는 래퍼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일그러진 관계들에 주목합니다. 진흙탕 싸움 끝에 이혼한 아내, 새 음반이 절실한 소속사 대표, 어딘가 감추는 것이 많아 보이는 매니저, 지금은 래퍼의 경호 업무를 맡고 있지만 한때 그와 함께 음악을 했던 형제 등 오로지 래퍼 주위에 기생충처럼 머물며 탐욕스런 태도를 감추지 않는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유력한 용의자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외양만큼이나 이야기 자체도, 서사나 캐릭터도 무척 독특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IQ가 래퍼 살인미수범을 쫓는 과정만을 전적으로 따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꽤 많은 조연들과 그들이 연루된 현재와 과거 사건에 대해서도 적잖은 비중과 분량을 할애하고 있고, 10대 시절의 IQ를 그린 챕터들도 1/3 이상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어서 때론 래퍼 살인미수라는 메인 사건이 잘 안 보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뚜렷한 메인 사건 중심의 스릴러라기보다는 온갖 볼거리가 난무하는 버라이어티 쇼 같은 느낌인데, 비유하자면, 작품 속에 종종 등장하는 난해하고 폭력적이고 어질어질한 랩 가사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이야기라고 할까요?

 

IQ가 살인미수범을 특정하는 과정은 좀 의외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고 쉽게 묘사됩니다. 물론 IQ의 궁극의 목표는 살인미수범이 아니라 그를 사주한 진범이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특별히 복잡하지도,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담고 있지도 않습니다. 말하자면 “IQ는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는 식인데, 나름 근거를 갖춘 깨달음이라 억지스런 비약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살짝 아쉬운 대목이긴 했습니다.

, 홍보카피에 실린 그의 별명 ‘LA의 뒷골목을 누비는 21세기형 셜록 홈즈로서의 매력이 크게 다가오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일상 속 미스터리를 풀어내는 장면들에서 홈즈의 향기가 느껴진 건 맞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고 할까요?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다 읽은 뒤에도 사건 자체보다는 다소 장황해 보였던 IQ의 인생 스토리가 더 기억에 남았는데,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거친 랩, 인종차별, 마약, 불법총기, 갱단, 살인, 돈 등 폭력적이고 어두운 소재들이 총출동한 스릴러지만 악과 대결하는 IQ의 무기는 오직 말빨과 추리뿐이라 어딘가 샌님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중대범죄와 맞붙은 경력을 쌓은 IQ가 다음 작품에서는 동네탐정이나 샌님보다는 좀더 과격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작품이 2016년에 출간됐다고 하니 이미 후속작이 나왔을지도 모르는데, 과연 IQ가 얼마나 세고 독한 탐정으로 변신해있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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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죄자
레이미 지음, 박소정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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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인 1990, C시에서 끔찍하고 엽기적인 연쇄 강간 토막살인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네 명의 피해자의 신체를 훼손한 뒤 검은 비닐에 담아 시내 곳곳에 유기했습니다. 경찰 상부는 물론 언론과 여론의 압박에 시달리던 수사팀은 악전고투 끝에 범인을 체포했지만 범인은 법정에서 내내 무죄를 주장했고 수사팀 내에서도 진범이 아니라는 의견이 나온 탓에 사형집행이 이뤄진 뒤에도 사건은 여러 사람의 뇌리 속에 불쾌한 앙금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23년이 지난 현재, 당시 수사팀 중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했던 인물을 비롯하여 평생을 복수심으로 살아온 피해자의 유족, 우연히 진실 찾기에 가세한 법대생 등 여러 사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분투를 시작합니다.

 

7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 그에 걸맞은 묵직한 서사가 담긴 레이미의 작품입니다. 레이미는 천재적 프로파일러 팡무가 활약하는 심리죄 시리즈두 편으로 만난 적 있는데, 엽기적인 범죄, 복잡다단한 구성, 매력적인 프로파일링 등 다채로운 매력을 발산한 작가라서 (‘심리죄 시리즈는 아니지만) 새로운 작품 순죄자의 출간소식이 무척 반갑게 들렸습니다.

 

요약하면, 23년 전 사건의 진실을 찾으려는 자들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자들, 그리고 진범이 벌이는 ‘3각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건도 사건이지만 진실 찾기를 둘러싼 각 인물들의 인간적인 고뇌와 함께 지독하기 짝이 없는 운명의 장난 같은 게 더 짙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원죄(冤罪), 증오, 후회, 복수 등 23년이 지났어도 조금도 변치 않은 각 인물들의 감정은 뒤늦게 발동이 걸린 진실 찾기과정에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의 비난을 무릅쓰고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다가 동료들과 등을 돌리고 만 두청, 뒤늦게 진범의 정체를 알고도 자신과 동료들의 파멸이 두려워 진실을 은폐한 뤄사오화, 압박에 시달리던 끝에 신빙성 없는 증거에 눈이 뒤집혀 억울한 자를 사형대로 보낸 마졘 등 톄둥 분국 소속인 세 명의 경찰이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두고)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됩니다.

이제 편안한 삶을 바랄 수 있는 60대에 이르러 옛 사건 때문에 다시 충돌한 이들의 애증은 조사가 진척될수록 23년 전보다 더 깊고 싸늘한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데, 어느 쪽이 정의인지는 명백해도 정의롭지 못한 자들의 딜레마도 충분히 이해되는 설정이어서 독자는 이들 사이의 무저갱 같은 운명에 긴장감과 애처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됩니다.

 

두청을 비롯한 경찰들의 진실 찾기가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아내가 무참하게 살해당한 뒤 사고까지 당해 평생 양로원에 갇혀온 지쳰쿤과 봉사활동을 통해 그와 인연을 맺은 법대생 커플 웨이중, 웨샤오후이가 이끌어갑니다. 두청과 마찬가지로 진범이 따로 있다고 확신했던 지쳰쿤은 양로원에서 무력한 삶을 살던 중 웨이중, 웨샤오후이 덕분에 삶의 의지를 되찾곤 아내를 살해한 진범을 찾기로 결심합니다.

사건 관계자들 대부분이 60대라서 독자들에게 더 주목을 받게 되는 젊은 두 주인공은 당초 관찰자 입장에서 23년 전 사건을 접하게 되지만, 점차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는데 평범한 법대생 웨이중이 지쳰쿤을 돕는 과정에서 진실과 정의를 깨달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도, 무슨 이유에선지 웨이중 못잖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웨샤오후이의 비극적인 사연도 경찰 쪽 이야기나 엽기적인 사건 못잖게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고백하자면, 읽기 전에는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때문에 주저했던 게 사실이고, 읽기 시작한 뒤론 다소 지루하고 동어반복적인 초반 상황들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각자의 목표를 확실히 정립하는 대목이 꽤 늦게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론 대략 100페이지 정도만 정리됐다면 긴장감과 속도감이 배가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물론 후반부에 가면 작가가 왜 초반에 지루할 만큼 기초공사를 거듭 다졌는지 알게 되지만, 초반의 느슨함은 자칫 이 작품의 진가를 맛보기도 전에 질리게 만들 여지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내용은 물론 분위기조차 공개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과한 우연들(인물들 간의 관계라든가 사건 모두)과 막판의 억지스럽고 공감하기 어려운 마무리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찬호께이의 ‘13.67’에 버금가는 묵직한 작품이지만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순죄자심리죄 시리즈보다 매력적으로 읽힌 작품입니다. ‘심리죄 시리즈가 사건의 엽기성과 천재 프로파일러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라면, ‘순죄자는 그에 덧붙여 무겁고 비극적인 감정들을 충실하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에 출간되지 않은 심리죄 시리즈도 기대하고 있지만 레이미의 또 다른 작품들 역시 한국에 좀더 많이, 자주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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