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로의 여행 열린책들 세계문학 270
에릭 앰블러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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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드리운 유럽. 영국 무기제조사의 직원인 엔지니어 그레이엄은 터키 정부와 비밀스러운 무기 거래 계약을 체결하고 오는 길에 독일 정보부가 보낸 암살자의 추격을 받는다. 터키 비밀경찰은 그레이엄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그를 소수 인원만 탑승하는 화물선에 승선시킨다. 폐쇄된 배 안에는 비밀경찰이 사전에 신원을 확인한 몇 명의 승객들만 탑승해 있다. 헝가리 출신의 미녀 댄서, 독일 고고학자, 터키 담배상, 프랑스 사회주의자 등. 이렇다 할 위험 요소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레이엄이 그럭저럭 항해에 적응해 나갈 무렵, 배에서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아직 읽진 못했지만 제목만은 낯익은 디미트리오스의 가면의 작가 에릭 앰블러의 작품입니다. 사실 작가 이름도 무척 생소했던 게 사실인데, 이 작품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된 걸 알곤 작가나 작품 모두 평범치 않은 위상을 지녔음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현대 스파이 소설의 아버지라는 호칭과 함께 값싼 흥미 위주의 스파이 소설들과 결을 달리하는, (중략) 문학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갖춘 앰블러의 작품들은 스릴러 장르의 작품성을 높이 끌어 올려 존경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변화시켰다.”는 소개글은 지금부터 무려 80년 전에 출간된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줬습니다.

 

주인공 그레이엄은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무렵, 영국의 무기제조사의 엔지니어라는 민감한 직업을 가지긴 했지만 그건 단지 외양일 뿐 그는 지극히 평범한 중년 남자에 불과합니다. 특별히 애국심에 고취된 것도 아니고, 나치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 특정 사상에 경도된 인물도 아닙니다. 그저 스스로를 해외출장이 잦은 평범한 샐러리맨이라 여길 뿐이었지만 본인의 의지나 사상과 무관하게 독일 정보부의 목표물이 된 그레이엄은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탑승한 화물선에서 제목 그대로 공포로의 여행’(원제 Journey into Fear)을 경험하게 됩니다.

 

370여 페이지의 분량이지만 심플하고 단조로운 구도를 지닌 작품입니다. 갑자기 살해위협을 받게 된 무기 엔지니어, 안전한 귀국을 위해 선택한 화물선에서 맞닥뜨린 살해 위협, 그리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한 선택과 그 선택이 몰고 온 극적인 결말 등 지극히 교과서적인 기승전결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건 중심의 이야기였다면 100페이지도 채 안 되는 분량에 그쳤겠지만, 작가는 스파이 심리스릴러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만큼 내밀하고 디테일한 문장들을 통해 두툼한 볼륨감과 함께 긴장감으로 가득한 370여 페이지의 분량을 만들어냈습니다.

국제적 사건에 휘말려 목숨이 오락가락하게 된 평범한 개인의 극도의 공포, 육지가 빤히 보이는데도 탈출할 곳이라곤 망망대해밖에 없는 화물선이라는 공간의 압박감, 그 화물선에 탑승한 어딘가 비밀스럽고 위험해 보이는 승객들의 캐릭터, 그 승객들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2차 대전 목전의 불안한 유럽의 정치적 상황 등은 사건의 단조로움을 잊게 만들만큼 독자의 눈길을 끄는 설정들입니다.

 

그레이엄의 공포를 한층 더 현실감 있게 만드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본능과 욕망을 자극하는 미녀 댄서 조제트라는 캐릭터인데, 그레이엄은 자신이 처한 극한의 위기가 엄연한 현실임을 자각하면서도 조제트와의 판타지를 꿈꾸며 잠시나마 그 현실을 외면하려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는 공포를 생생하게 공감하게 만듭니다. 눈앞에 닥친 암살의 공포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그레이엄의 모습은 다른 어떤 설정보다도 매력적으로 읽힌 대목이었습니다.

 

공포로의 여행은 엄밀히 말하면 요즘의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고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치와 미덕은 단순히 재미나 복잡함을 기준 삼아 평가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오랜 냉전을 야기한 세계대전 발발 직전 시점에 제대로 된스파이 스릴러의 맹아가 꿈틀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스릴러 독자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보다 1년 먼저 출간된 디미트리오스의 가면’(1939) 역시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2020년에 출간됐다고 하는데, 조만간 에릭 앰블러의 고전과 다시 만날 기회를 기대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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