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리커버 에디션)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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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젊은 여성을 살해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끔찍한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이 날뛰는 가운데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은 어느 날 갑자기 행동과학부장 잭 크로포드에게 호출을 받습니다. 크로포드의 지시는 겉으론 강력범죄 예방을 위한 범죄자 데이터 수집이었지만 실은 스탈링으로 하여금 주립 정신병원에 수감돼있는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와의 면담을 통해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공포와 긴장 속에 렉터와의 면담이 거듭되지만 스탈링이 얻은 건 그저 모호하고 선문답 같은 진술일 뿐 좀처럼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상원의원의 딸이 버팔로 빌에게 납치되자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스탈링과 크로포드는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면서 수사에서 배제되고 맙니다.

 

(1988)으로나 영화(1991)로나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양들의 침묵은 연쇄살인마를 다룬 스릴러로서 분명 기념비적인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이지만, 어떤 매체로든 깊은 인상을 한번 받고 나면 다른 매체로는 같은 작품을 잘 들여다보지 않는 성격이라 최근까지 책으로는 양들의 침묵을 만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냥 아무 계기도 없이 문득한니발 렉터 이야기를 순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서 얼마 전 책장 속에 한참을 갇혀있던 레드 드래건의 먼지를 털어줬고, 이제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정점인 양들의 침묵을 읽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책을 읽는 내내 오래 전 분명히 봤다고 생각했던 영화의 내용이 거의 생각이 나지 않아 당황스러웠는데, 참혹하지만 묘하게 끌리던 포스터 사진과 두 주연배우(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의 클로즈업 장면 외에는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그만큼 각색을 많이 했기 때문이든지 제 기억력의 문제든지 둘 중 하나겠지만,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면 책으로 읽은 양들의 침묵은 기대했던 것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버팔로 빌에 의한 끔찍한 연쇄살인이고, 또 하나는 FBI 연수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크로포드에게 발탁된 스탈링이 전대미문의 식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와 면담하며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심리전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각종 차별과 위기를 견뎌내며 뛰어난 FBI 요원으로 성장하는 될성부른 떡잎스탈링의 성장기가 이야기의 밑바닥에 깔려있습니다.

 

젊은 여성을 살해하고 살가죽을 벗기는 버팔로 빌사건은 워낙 엽기적이라 호기심과 공포심을 함께 자아내지만, 전작인 레드 드래건에서도 그랬듯 범인의 욕망의 출발점 자체가 워낙 불가지한 심리적 문제이다 보니 오히려 사건이 거듭될수록 긴장감을 떨어뜨렸다는 생각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책이든 영화든 안 본 사람도 다 아는 내용이지만) 그가 희생자의 살가죽을 벗긴 이유가 좀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욕망에서 기인했다면 독자가 느끼는 공포심은 훨씬 더 배가됐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작가의 고유한 성향 탓으로 보였습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역시 두 주인공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입니다. 능력자이긴 해도 현장 경험이 전혀 없는 FBI 연수생 스탈링과 천재적인 정신과 전문의이자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연쇄살인마 렉터의 대결은 처음부터 너무나도 완벽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보였지만, 면담이 거듭될수록 스탈링의 내공이 깊어지고 그걸 솔직하게 인정해주는 렉터의 태도가 엿보이면서 짜릿한 묘미까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초 버팔로 빌사건의 단서를 얻기 위해 시작된 면담이지만, 정작 눈길을 끈 건 정보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탈링이 렉터에게 털어놓은 그녀의 내밀한 과거사들입니다. 특히 어릴 적 들었던 도살 직전의 양들의 울음소리는 스탈링에겐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트라우마이자 악몽인데,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그 이야기를 건네는 과정에서 스탈링은 고작연수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식인 살인마 렉터 앞에서 점점 더 당당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렉터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선문답 같긴 해도 나름의 단서를 슬쩍슬쩍 흘려주곤 합니다. 물론 이 대목들이 잔혹하고 스피디한 연쇄살인 스릴러를 다소 정적이고 느슨하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두 캐릭터의 힘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대목인 건 분명합니다.

 

약간 부차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스탈링이 버팔로 빌사건이나 렉터와의 면담을 통해 차근차근 성장해가는 모습도 무척 호감이 갔던 점입니다. 무엇보다 노골적인 성차별이 횡행하던 시대적 분위기에다 연수생이라는 신분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분노 조절법과 잭 크로포드에 대한 존경심을 의지 삼아 절대 좌절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스탈링의 진심은 무척 진정성 있게 느껴졌습니다.

 

서평 초반에 기대에 못 미쳤음이라고 했는데,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만 놓고 보면 별 5개도 모자란 작품이지만, 한껏 기대했던 버팔로 빌사건 자체가 약간은 용두사미처럼 마무리된 게 가장 큰 이유 같습니다. 이어서 한니발도 읽을 생각인데, ‘양들의 침묵으로부터 11년 후에 집필된 한니발에서 스탈링과 렉터가 어떤 모습으로 재회하게 될지 무척 궁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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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드래건
토머스 해리스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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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버밍햄과 애틀랜타에서 한 달 간격으로 두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3년 전 희대의 사이코패스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지만 지금은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전직 FBI 아카데미 법정 진술교관 윌 그레이엄은 FBI 요원 잭 크로포드로부터 수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받습니다. 렉터 체포 당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던 그레이엄은 고심 끝에 크로포드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범행현장과 증거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새로운 단서들을 찾아내지만 그레이엄은 범인이 두 가족을 특정해서 살해한 이유를 알아낼 수 없어 답답할 뿐입니다. 막다른 벽에 막힌 그레이엄의 선택은 주립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렉터에게서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예상치 못한 사태를 일으켰고 그레이엄은 큰 위험에 빠지고 맙니다.

 

토머스 해리스의 대표작인 양들의 침묵은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7년 먼저(1981) 출간된 레드 드래건은 상대적으로 유명세를 덜 탄 작품입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건 1991(고려원)인데, 그해 양들의 침묵이 영화로 대박이 난 덕분에 출간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후 출판사(창해)와 번역자(이창식)가 모두 바뀌어 1999년과 2006년에 재출간되긴 했지만 역시 양들의 침묵의 후광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이 양들의 침묵’ - ‘한니발’ - ‘한니발 라이징으로 이어지는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기점이라고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다 읽고 보니 이 작품에서 한니발 렉터는 카메오 정도의 역할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강렬한 인상과 함께 두 가족 몰살사건의 범인을 추격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데다 주인공인 윌 그레이엄과의 악연도 중요한 모티브로 설정돼있어서 단순한 카메오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합니다.

 

뛰어난 직관력과 함께 증거물을 정확히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그레이엄은 꼼꼼한 현장 조사를 통해 기존 수사팀이 발견하지 못한 미량의 증거와 단서를 포착하는 성과를 올릴 정도로 탁월한 능력자지만, 과거에 겪은 두 개의 치명적인 사건 때문에 은퇴를 결심하고 은둔생활에 돌입한 인물입니다. 하나는 경찰 시절 범인을 사살한 이후 얻은 트라우마이고, 또 하나는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그는 범인의 입장이 되어 침입경로, 살인의 방법과 순서, 시신을 훼손한 이유 등 범행의 디테일을 포착하지만 내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렉터로부터 자신과 닮은꼴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냉정한 캐릭터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그레이엄이 쫓는 범인의 정체는 초반부에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또 두 가족을 희생자로 선택한 이유도 상세히 소개됩니다. 특히 한 부인의 시신을 훼손하고 모욕한 것으로도 모자라 여러 곳에 심하게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놓은 범인은 이빨 요정이란 별명까지 얻으면서 언론을 통해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됩니다. 그리고 그가 붉은 용, 즉 레드 드래건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함께 사이코패스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비참한 성장사가 그레이엄의 수사과정에 맞먹는 비중으로 그려집니다.

 

전체적으로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건 위주의 스릴러라기보다 그레이엄과 범인의 심리묘사가 더 비중 있게 그려져서 속도감이나 긴장감이 다소 떨어졌고, 그레이엄이 범인을 특정하는 과정은 자체 스포일러 때문에 큰 힘을 얻지 못했으며 특별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또 범인이 스스로를 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붉은 용과 동일시하면서 악마적 캐릭터를 강조하는 대목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현실감이 사라져서 막판에는 심령 호러물 같은 이질감만 남고 말았습니다. 망상과 집념에 빠져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이야기를 꽤 많이 읽었지만 이 작품의 범인은 인공미가 너무 강하게 설정됐다고 할까요? 물론 클라이맥스에서의 범인의 돌출행동은 확실히 눈길을 끌었지만 전체적으론 카메오로만 등장한 한니발 렉터에 비해 한참 격이 떨어지는 살인마라는 매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친 김에 양들의 침묵한니발까지 이어서 읽을 생각인데 레드 드래건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는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시리즈 마지막 편이자 프리퀄인 한니발 라이징은 그다지 좋은 평을 발견하지 못해서 구매 자체를 주저하고 있는데, ‘양들의 침묵한니발을 만족스럽게 읽는다면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라도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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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게임
제니퍼 린 반스 지음, 공민희 옮김 / 빚은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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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잃고 이복언니 리비와 어렵게 살던 고등학생 에이버리 그램스에게 어느 날 꿈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일면식도 없던 토비아스 호손이란 남자가 그녀에게 무려 462억 달러의 유산을 남긴 것입니다. 호손에겐 두 딸과 네 명의 손자가 있었지만 그들의 몫은 고작 수십만 달러에 불과했고 그로 인해 대저택 호손 하우스에는 엄청난 충격이 몰아칩니다. 에이버리에게 요구된 상속 조건은 단 하나, 1년 동안 호손 하우스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뿐입니다. 호손 집안사람들의 증오와 원망의 눈길 속에 기뻐하기는커녕 패닉에 빠진 채 저택에 머물게 된 에이버리는 왜 자신이 상속녀가 된 것인지 알아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호손의 네 명의 손자가 끼어듭니다. 수수께끼와 퍼즐을 좋아하던 호손은 저택 곳곳에 은밀한 단서를 숨겨놓았고 에이버리는 네 형제와 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단서들을 찾는데 주력합니다.

 

난데없는 수백억 달러의 유산, 꽃미남 4형제와의 1년간의 기묘한 동거, 그리고 가족들을 제치고 상속녀가 된 이유를 찾는 미스터리라는 설정만 보면 달달한 로맨스와 가벼운 미스터리의 조합 정도로 예상하기 쉽지만 상속 게임달콤한 게임이라는 뒤표지 카피가 무색할 정도로 꽤나 무겁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상속예정자에서 빈털터리로 전락한 호손의 두 딸과 네 손자들에겐 유산을 강탈해간 에이버리가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거니와 1년 동안 함께 살아야한다는 것 역시 고문에 가까운 일입니다. 에이버리 역시 누군가 상속을 무산시키기 위해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거대한 저택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짓눌린 채 상속녀로서의 첫발을 떼게 됩니다.

 

하지만 호손 가의 네 형제 중 세 명이 10대이며 에이버리 역시 고등학생이란 설정 때문에 이야기의 무게감은 다소 덜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양쪽 모두 10대 치곤 말투와 생각과 행동에서 노련미와 술수가 넘치기 때문에 읽다 보면 “10대 맞아?”라는 생각이 자주 들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거대한 유산을 놓고 전쟁이나 다름없는 게임을 벌이는 당사자들이다 보니 24시간 내내 초긴장상태에서 경계심을 늦출 수 없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또 네 남자와 한 여자라는 구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에이버리가 누구와 먼저 친해질까? 누가 질투심에 빠질까? 로맨스가 게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호기심이 일게 되는데, 각각 박애주의자, 냉혹한 현실주의자, 로맨티스트, 엉뚱발랄 고교생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들을 지니고 있어서 쉽게 로맨스의 향방을 점치기는 어렵습니다. (더 흥미로운 건 네 형제의 아버지가 다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가장 큰 줄기는 왜 에이버리가 상속녀가 된 것인가?”라는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에이버리와 네 형제가 저택 여기저기에 호손이 숨겨놓은 단서들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서 찾기에 임하는 각자의 속내는 모두 제각각입니다. 에이버리의 목적은 자신이 상속녀가 된 이유를 찾는 것뿐이지만 형제들 중엔 그 단서들이 에이버리의 상속을 무산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진 경우도 있고, 유산 따위엔 아예 관심 없거나 혹은 에이버리에게 감정적으로 쏠리거나 아예 에이버리를 게임의 당사자가 아니라 단서 찾기의 도구로 비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연히 여러 갈래의 갈등과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 단서를 찾는 중에 에이버리가 치명적인 사고를 당하면서 갈등과 충돌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여러 가지 흥미요소를 골고루 갖춘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운 대목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것은 내용보다도 편집과 번역에 관한 것입니다. 원작 자체가 그리 어렵고 난해한 문장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작품인데 가끔 두어 번 되읽어도 그 뜻을 알기 쉽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특히 과거 호손 집안과 관련 있던 한 소녀의 죽음의 진실이 풀리는 클라이맥스에서 이런 난감한 상황을 마주했던 건 조금은 불쾌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오역이나 비문은 아니지만 좀더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 아쉬웠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혹 눈에 띈 오타도 거슬렸던 부분들입니다. 더불어 (원작 탓이겠지만) 너무 잦았던 이탤릭체 표기와 헷갈릴 정도로 인색했던 줄바꿈 역시 꼭 지적하고 싶은 점들입니다.

 

상속 게임은 미국에서 3부작으로 발표됐다고 합니다. 이 작품의 엔딩에서 에이버리가 상속녀가 된 사연이 밝혀지긴 하지만, 작가는 에이버리와 네 형제에게 새 미션을 부여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위한 떡밥을 투척한 채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조만간 드라마로 제작돼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를 통해 공개된다는데, 아마도 캐릭터는 물론 공간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수수께끼와 퍼즐을 좋아하던 호손이 완성한 대저택은 오랜 세월동안 증축과 수리를 통해 미로 같은 구조와 무수한 비밀통로를 갖게 됐는데, 주인공들의 단서 찾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1등 공신이 바로 이 복잡미묘하고 위험천만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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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Killer's Wife 킬러스 와이프 라스베이거스 연쇄 살인의 비밀 1
빅터 메토스 지음, 최호정 옮김 / 키멜리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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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살의 연방검사 제시카 야들리는 15년 전 프랑케슈타인의 신부로 불리며 파파라치의 표적이 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라스베이거스를 공포로 빠뜨렸던 연쇄 강간살인마가 바로 그녀의 남편 에디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충격과 공포에 빠졌던 야들리는 이후 법 정신의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을 수료했으며 현재는 연방검사로 근무 중입니다. 15살 딸 타라, 동거남 웨스리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일궈오던 그녀에게 어느 날 전 남편 에디의 범행을 모방한 듯한 연쇄살인 소식이 들려옵니다. 과거 야들리와 잠시 사귀었던 FBI요원 볼드윈은 그녀의 고통과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일말의 단서라도 잡기 위해 그녀에게 사형수로 복역 중인 에디와 면회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범인은 어떤 식으로든 에디와 소통한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미스터리는 물론 사형수로 복역 중인 연쇄살인마와 그의 전 아내를 비롯한 사건 관계자들 사이의 고도의 심리전, 거기다가 중반 이후 팽팽하게 전개되는 법정 스릴러까지 다양한 장르가 믹스된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주인공 제시카 야들리는 킬러스 와이프’, 즉 잔혹무도한 연쇄살인마의 전 아내라는 화인(火印)을 간직한 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 고통의 끝에서 인생의 진로를 바꿔 가정폭력과 성범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유능한 연방검사가 됐지만 그녀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던 두 번째 위기에 빠지고 맙니다. 전 남편 사건 때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 곁엔 든든한 동거남 웨슬리와 사랑스러운 15살 딸 타라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작품은 모방범 체포를 기점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명확히 갈리는데, 그만큼 일찌감치 독자가 모방범을 추측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의외의 인물이긴 하지만 독자에겐 모방범의 정체보다는 범행동기가 더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또 야들리의 전 남편인 사형수 에디와 어떤 식으로 연결됐는지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게 만드는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이 궁금증과 긴장감은 후반부의 치열한 법정 공방전을 통해 더욱 가열되는데, 형사사건 검사와 변호사를 역임한 작가의 이력 덕분에 법정을 직접 지켜보는 듯한 사실감과 함께 색다른 반전의 묘미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중간중간 위기를 맞긴 해도 혜안과 지략을 겸비한 연방검사 야들리의 맹활약은 존 그리샴의 명작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작품의 백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반항적인 사춘기 딸을 둔 엄마이자 연쇄살인마의 전 아내로 낙인 찍힌 순탄치 않은 그녀의 개인사 역시 검사로서의 맹활약 못잖게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큰 비중은 아니지만 마초적인 가부장제 조직인 검찰에 대한 비판도 흥미로웠는데, “감정을 드러내면 신뢰할 수 없는 감성적인 여인이 되어 버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신뢰할 수 없는 차가운 쌍년이 되는 거고.”라는 야들리의 선배의 조언은 아무리 유능해도 쉽게 뚫을 수 없는 유리천장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야들리가 내부의 적과도 치열하게 싸우며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들은 특별한 간식과도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챕터에서의 반전은 무척 놀랍고 신선하긴 해도 독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가 공들여 복선도 깔아놓았고 합리적인 장치도 준비해놓은 건 분명하지만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고 반전을 위한 반전처럼 보일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다 읽고도 풀리지 않은 의문 한 가지가 남아 무척 아쉬웠는데, 의문 자체가 스포일러라 더 이상 언급할 순 없지만 비슷한 아쉬움을 느낀 독자가 꽤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초중반부의 지나치게 디테일한 묘사들이 살짝 지루함을 안기긴 했지만(1개를 뺀 유일한 이유입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점점 속도감도 잘 붙고 긴장감도 팽팽해지는 힘 있는 작품입니다. 약간의 설명 부족과 풀리지 않은 마지막 의문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전체적으론 무척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는데, 호기심에 다시 한 번 출판사의 소개글을 찾아보니 작가의 이력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화려해서 이 작품이 호응을 얻는다면 조만간 그의 또 다른 작품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법정 스릴러를 무척 좋아하는데 앞으로 뉴 페이스인 빅터 메토스의 이름을 자주 들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적어도 서평을 올리는 현재까지는) 인터넷 서점에서 킬러스 와이프를 입력하면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습니다. ‘Killer’, ‘Wife’ 또는 부제에 들어간 라스베이거스를 검색해야 되는데, 등록된 공식 제목이 ‘A Killer's Wife : 라스베이거스 연쇄살인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은 터라 이 사실을 전달했는데, 답변에 따르면 나름 눈에 띄는 특징적인 제목을 짓기 위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자칫 아직 출간 안 됐나?”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가 다소 부실하기도 하고 짧게 요약된 줄거리도 문장이 너무 애매모호해서 한눈에 이해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출판사의 첫 런칭 작품이라 더 응원하고 싶은 마음인데 나중에라도 이런 부분들이 꼭 수정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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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요 네스뵈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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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위와 칼 형제의 아버지 오프가르는 노르웨이 소도시 오스의 아라라트 산 정상부에 자리한 작고 한심한 농장을 킹덤, 우리 가족의 왕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20년 전 형제의 부모가 끔찍한 자동차 추락사고로 숨진 이후 왕국과 그 일대는 피비린내로 진동했고, 이제 30대 중반이 된 로위와 칼에게 왕국은 잊힌 지 오래된 망령 혹은 추억일 뿐입니다.

작은 주유소를 경영하며 홀로 집을 지켜온 로위는 미국에서 학위를 딴 뒤 부동산 거부가 됐다는 동생 칼의 15년 만의 갑작스런 방문에 놀랍니다. 바베이도스 출신의 아내 섀넌을 동반한 칼은 산 정상부에 호텔을 지어 몰락중인 고향 오스를 살리겠다는 꿈같은 계획을 늘어놓습니다. 오스 전체가 들썩이는 가운데 로위는 복잡한 감정에 빠집니다. 황당무계한 호텔 건설계획은 의심스럽고, 동생의 아내 섀넌이 내뿜는 묘한 매력에 혼란스러워졌으며, 특히 늘 적대적이던 경찰 올센이 칼의 귀국을 기다렸다는 듯 과거 미제사건을 들쑤시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킹덤해리 홀레 시리즈는 물론 요 네스뵈의 다른 어느 스탠드얼론과도 완전히 결이 다른 작품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이 등장하긴 하지만 낯익은 스릴러 서사에서 많이 벗어난 독특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킹덤10대 시절부터 살인에 관여했고, 부적절하거나 일그러진 사랑에만 전념했으며, 상식을 벗어난 지독한 형제애를 동생에게 투사해온 로위 오프가르라는 한 남자의 비극적인 성장 스토리이자 세상의 모든 악몽을 죄다 뒤집어쓴 한 가족의 파멸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10대 때 겪은 끔찍한 악몽에 얽매여 있긴 해도 가까스로 소박한 삶을 유지해온 로위는 동생 칼의 귀국 이후 또다시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과 함께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부도덕한 사랑에 휘말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동생이 15년 만에 귀국하며 갖고 온 두 개의 폭탄’ - 무모한 호텔 건설계획과 치명적인 매력의 섀넌 은 로위를 완전히 박살내고도 남을 만한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 두 개의 폭탄은 로위 주변뿐 아니라 오스 곳곳에서 심각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임계점을 넘어서버린 로위는 피비린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나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절대적으로 확신했다. 마땅히 자기 것이어야 하는 것을 손에 넣는 일. 설사 그것이 아주 망가진 모습이라 해도. 그리고 그 일을 방해하는 자들과 내가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 (p704)

 

로위--섀넌의 이야기에 못잖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소도시 오스의 다양한 군상들이 로위와 칼 부부 주변을 맴돌며 벌이는 위태롭고 도발적인 행각들입니다. 이 행각들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건 탐욕, 욕망, 시기, 질투, 복수 등 하나같이 비뚤어지고 뿌리 깊은 감정들인데,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욱 팽팽하게 하는 것은 물론 로위의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고 골치 아프게 만드는 적절한 양념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킹덤에 비하면 해리 홀레 시리즈는 차라리 희망과 위안을 주는 이야기였다.”라는 북 리뷰를 내놓았는데, 개인적으론 반은 맞고 반은 좀 애매한 평가라는 생각입니다. 훨씬 더 독하고 센 스릴러를 기대했지만 실은 가혹한 운명에 휩싸인 한 남자의 비극에 좀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 네스뵈 특유의 스릴러 서사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적잖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다소 느슨하고 장황한 (‘한 남자의 우여곡절 연대기로 보일 수도 있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로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밑받침이자 궁극적으로는 로위--섀넌의 비극을 더욱 강렬하게 만드는 주춧돌이라는 생각입니다. (가령 로위와 칼의 이름에 깃든 의미라든가 로위가 즐겨듣는 음악, 모든 사람들을 새에 빗댄 묘사, 늘 돌 무너지는 소리가 농장 인근의 협곡, 로위를 도발하는 주유소 10대 소녀 등 무수한 상징과 비유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740여 페이지의 분량은 주제나 소재에 비해 살짝 과해 보였고, 요 네스뵈가 문학적 성취(?)라는 과욕을 부린 대목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없어도 무방한 사소한 해프닝들이 종종 끼어든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0.5개가 빠진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을 통해 요 네스뵈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자칫 이런 스타일의 작가였나?”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기우가 들었는데, 만일 그렇다면 요 네스뵈의 대표작들을 한 편이라도 꼭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마도 요 네스뵈의 다음 한국 출간작은 해리 홀레의 12번째 이야기 ‘Knife’가 될 것 같은데, 요 네스뵈의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새 스탠드얼론의 소식 역시 궁금한 터라 그 반가운 소식을 듣기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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