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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드래건
토머스 해리스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1년 8월
평점 :
절판
버밍햄과 애틀랜타에서 한 달 간격으로 두 가족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3년 전 희대의 사이코패스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는데 공을 세웠지만 지금은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전직 FBI 아카데미 법정 진술교관 윌 그레이엄은 FBI 요원 잭 크로포드로부터 수사에 참여해줄 것을 요청받습니다. 렉터 체포 당시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던 그레이엄은 고심 끝에 크로포드의 요청을 수락합니다. 범행현장과 증거들을 꼼꼼히 살피면서 새로운 단서들을 찾아내지만 그레이엄은 범인이 두 가족을 특정해서 살해한 이유를 알아낼 수 없어 답답할 뿐입니다. 막다른 벽에 막힌 그레이엄의 선택은 주립 정신병원에 갇혀있는 렉터에게서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예상치 못한 사태를 일으켰고 그레이엄은 큰 위험에 빠지고 맙니다.
토머스 해리스의 대표작인 ‘양들의 침묵’은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7년 먼저(1981년) 출간된 ‘레드 드래건’은 상대적으로 유명세를 덜 탄 작품입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건 1991년(고려원)인데, 그해 ‘양들의 침묵’이 영화로 대박이 난 덕분에 출간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후 출판사(창해)와 번역자(이창식)가 모두 바뀌어 1999년과 2006년에 재출간되긴 했지만 역시 ‘양들의 침묵’의 후광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읽기 전에는 이 작품이 ‘양들의 침묵’ - ‘한니발’ - ‘한니발 라이징’으로 이어지는 ‘한니발 렉터 시리즈’의 기점이라고 막연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다 읽고 보니 이 작품에서 한니발 렉터는 카메오 정도의 역할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강렬한 인상과 함께 두 가족 몰살사건의 범인을 추격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준데다 주인공인 윌 그레이엄과의 악연도 중요한 모티브로 설정돼있어서 단순한 카메오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긴 합니다.
뛰어난 직관력과 함께 증거물을 정확히 볼 줄 아는 능력을 지닌 그레이엄은 꼼꼼한 현장 조사를 통해 기존 수사팀이 발견하지 못한 미량의 증거와 단서를 포착하는 성과를 올릴 정도로 탁월한 능력자지만, 과거에 겪은 두 개의 치명적인 사건 때문에 은퇴를 결심하고 은둔생활에 돌입한 인물입니다. 하나는 경찰 시절 범인을 사살한 이후 얻은 트라우마이고, 또 하나는 한니발 렉터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그는 범인의 입장이 되어 침입경로, 살인의 방법과 순서, 시신을 훼손한 이유 등 범행의 디테일을 포착하지만 내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렉터로부터 “자신과 닮은꼴”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냉정한 캐릭터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그레이엄이 쫓는 범인의 정체는 초반부에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또 두 가족을 희생자로 선택한 이유도 상세히 소개됩니다. 특히 한 부인의 시신을 훼손하고 모욕한 것으로도 모자라 여러 곳에 심하게 물어뜯은 자국을 남겨놓은 범인은 ‘이빨 요정’이란 별명까지 얻으면서 언론을 통해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됩니다. 그리고 그가 붉은 용, 즉 레드 드래건이라는 별명을 얻기까지의 과정과 함께 사이코패스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비참한 성장사가 그레이엄의 수사과정에 맞먹는 비중으로 그려집니다.
전체적으로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건 위주의 스릴러라기보다 그레이엄과 범인의 심리묘사가 더 비중 있게 그려져서 속도감이나 긴장감이 다소 떨어졌고, 그레이엄이 범인을 특정하는 과정은 자체 스포일러 때문에 큰 힘을 얻지 못했으며 특별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서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또 범인이 스스로를 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붉은 용과 동일시하면서 악마적 캐릭터를 강조하는 대목은 페이지를 넘길수록 현실감이 사라져서 막판에는 심령 호러물 같은 이질감만 남고 말았습니다. 망상과 집념에 빠져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이야기를 꽤 많이 읽었지만 이 작품의 범인은 인공미가 너무 강하게 설정됐다고 할까요? 물론 클라이맥스에서의 범인의 돌출행동은 확실히 눈길을 끌었지만 전체적으론 카메오로만 등장한 한니발 렉터에 비해 ‘한참 격이 떨어지는 살인마’라는 매정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친 김에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까지 이어서 읽을 생각인데 ‘레드 드래건’의 아쉬움을 어느 정도는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시리즈 마지막 편이자 프리퀄인 ‘한니발 라이징’은 그다지 좋은 평을 발견하지 못해서 구매 자체를 주저하고 있는데,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을 만족스럽게 읽는다면 ‘밑져야 본전’이란 심정으로라도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