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구보 미스미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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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소설들의 공통점은 표지에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19금 딱지만으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할 텐데, 이왕이면 구매 의욕까지 북돋기 위해 자극적인 표지를 덤으로 내놓곤 합니다. 그에 비해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는 겉모습이 참 얌전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을 끌어냅니다. “이런 평범한 표지인데, 19금이라고?”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첫 번째 수록작 미쿠마리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실은 16살 타쿠미와 28살 주부 안즈를 주인공으로 한 한 편의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한 연작소설입니다. 각각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미성년자인 타쿠미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주부 안즈의 변태적인 관계의 시작과 끝, 안즈의 고통스런 성장 과정과 불임이라는 비극, 동급생 타쿠미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은 나나의 이야기, (약간 독립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타쿠미의 친구 료타의 고군분투기, 그리고 조산원을 배경으로 한 타쿠미 어머니의 생명또는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 등입니다.

 

나중에 읽은 같은 작가의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역시 비슷한 포맷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형식이 주는 매력은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이라고 생각됐던 이야기를 어느 순간 내 이야기처럼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타쿠미에게 초점이 맞춰진 미쿠마리에서 안즈는 철저히 변태적인 주부로만 나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수록작 세계를 뒤덮는 거미줄에서는 그런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안즈의 과거를 깡그리 드러냄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안즈와의 이별 후 히키코모리처럼 폐인이 된 타쿠미를 곁에서 지켜주는 나나의 이야기 역시 앞서 두 에피소드에서 조연에 불과했던 나나의 속마음을 애틋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언제나 의지처가 되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으로 존재했던 타쿠미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대단원을 장식하며 마지막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건 첫 수록작 미쿠마리지만 개인적으론 두 번째 수록작 세계를 뒤덮는 거미줄을 한 세트로 묶었을 때 수상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두 수록작은 이 연작 단편집이 왜 19금 판정을 받았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만큼 파격적인 묘사가 들어있는데, 재미있는 건 정작 포르노그래피나 다름없는 그 묘사들 때문에 결국 울컥,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이라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적잖겠지만, 제겐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성애 묘사가 오히려 주인공들의 감정에 최대한 이입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열쇠로 보였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수는 없지만, “포르노그래피를 보고 울컥했다고?”라고 반문하는 독자에겐 그저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다, 라는 대답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나머지 세 편은 ‘19과는 전혀 무관한 타쿠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하늘을 바라보는 한심한 나의 이야기이고, 캐릭터들이 겪는 통증은 앞의 두 편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공감 역시 앞의 두 편에 못지않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한심한가? 혹시 그렇지 않은 척 위장하면서 살아오진 않았는가? 내 주위 사람들은 한심한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실은 다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깊은 내상을 감추고 있진 않은가?

결국 하늘을 보는 한심한 나는 스스로만 볼 수 있고, 스스로만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구보 미스미가 짜놓은 이야기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엔 상처투성이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내가 타쿠미였다면, 안즈였다면, 나나였다면, 료타였다면, 타쿠미의 어머니였다면, 과연 나는 그들만큼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거나 세상과 맞설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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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매미 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7
하무로 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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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강직한 관리였던 슈코쿠는 자신이 모시던 번주의 측실과 밀통했다는 죄로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무카이야마에 유폐됩니다. 당장 할복해야 할 죄목이지만, 번주는 자신의 가문에 관한 기록(미우라 가보)을 완성하라며 10년의 유예를 줍니다. 7년 후, 슈코쿠를 못마땅해 하던 세력들은 그를 감시하기 위해 쇼자부로를 보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쇼자부로는 슈코쿠의 인품에 빠져들고, 마을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을 지켜보면서 본연의 임무에 회의를 품게 됩니다. 그러던 중 슈코쿠를 유폐시켰던 10년 전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 비밀을 지키려는 세력들은 갖은 방법을 통해 슈코쿠를 압박합니다. 하지만 슈코쿠는 번주 가문에 관한 기록을 마침과 동시에 중대 결단을 내립니다.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늘 책읽기의 만족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쯤 서점의 서가에서 꺼내보게 만드는 힘은 분명히 있습니다. ‘저녁매미 일기의 경우 나오키상 수상작이면서 동시에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더욱더 매력이 끌렸던 작품입니다. 작품 제목인 저녁매미 일기는 유폐된 10년 동안 슈코쿠가 쓴 일기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과 감상이 실린 일기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그날그날의 기록일 뿐입니다. 각주를 보면 일본에서는 저녁매미가 하루살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설명돼있습니다. 슈코쿠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겠다는 뜻으로 일기 제목을 그리 지었다고 진술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일기는 큰 비중 없이 다뤄집니다. 슈코쿠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조그마한 소품 같은 느낌입니다. 하지만 읽는 동안 그의 인격과 신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일기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슈코쿠가 그를 감시하기 위해 온 쇼자부로에게 해준 이야기 가운데 무사는 명예를 중히 여기라고 하지만, 명예를 버리고 임해야 하는 것이 바로 봉공(奉公)이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겠다.”와 함께 그의 일생을 함축한 적확한 표현으로 보였는데, 사실 그처럼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 슈코쿠에게 감화 받은 쇼자부로처럼 기득권을 포기해가면서 감춰진 진실에 다가가려 애쓰거나 옳다고 믿게 된 바를 목숨 걸고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은 것은 산다는 것에 대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대해, 내 주위 사람들에 대해 한없이 가볍고 하찮게 여길 뿐인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주기 때문입니다. 억지 교훈이나 계몽과 달리 피부에 와 닿는 온기가 남다르다고 할까요?

 

가장 아쉬웠던 점은 가독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슈코쿠가 작성하는 미우라 가보는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족보보다 상세한 인명사전으로 아주 복잡하고 세밀한 책자입니다. 미우라 가보의 내용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인명과 지명, 복잡한 중세 일본의 관직명 등이 무수히 등장합니다. 양자나 양녀로 들어가면서 이름이 바뀌고, 관례(성인식)를 치른 후 이름이 바뀌다 보니 한 인물에 딸린 이름이 두세 개가 되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낯설기만 한 관직이나 직책 역시 좀처럼 익숙해지기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 주변 조연들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메모 없이는 앞부분을 다시 읽어야 하는 불편함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각주마저 거의 없어서 수시로 짜증이 났는데, 맨 마지막 장에 (약간이긴 하지만) ‘관직에 관한 도움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곤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를 위해 조금은 친절한 배려가 아쉬웠던 부분인데, 내용만 보면 별 4개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별 3개에 머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움들 때문에 작품 자체의 미덕이 가려질 수도 있겠지만, ‘나오키상 수상작이자 역사소설에 관심도 있고 약간의 노력과 수고를 기꺼이 감당할 준비가 돼있는 독자라면 슈코쿠와 쇼자부로의 삶을 통해 나름 묵직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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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지다 - 상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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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향이자 원적지를 벗어나는 것이 중죄이던 시절,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가족들을 남겨놓고 고향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늑대의 무리라 불리던 도쿠가와 막부의 친위부대 신센구미에 몸을 의탁합니다. 살인과 할복이 난무하던 신센구미에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돈이라면 자존심도 팔아먹는 기인으로 손가락질 받습니다. 유신세력이 힘을 얻고, 대세는 막부의 몰락을 예고하고 있지만, 신센구미와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끝까지 저항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마지막 전투에서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도망을 치게 되고, 오사카에 있던 고향의 번 저택으로 숨어들지만, 그곳에서 그는 애초 고향을 떠났던 탈번의 죄 때문에 할복을 지시받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팬으로서 칼에 지다는 비교적 그의 책 가운데 뒤늦게 읽은 편에 속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의 마니아라 자처하면서도 막상 두 권으로 된 적잖은 분량의 소설을 통해 막부, 사무라이, 신센구미라는 소재들을 읽는다는 게 어딘가 내키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다 지로가 만들어낸 막부 말기의 이야기에는 전형적인 영웅적 사무라이 활극외에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고, 오랜 주저 끝에 결국 하드커버로 된 상권을 집어 들게 됐습니다. 그리고 단숨에 하권까지 읽어 내렸습니다.

 

할복을 명예처럼 여기는 무사도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극도 아닙니다. 평화로운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좋은 아버지,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었던 한 평범한 가장이 죽음이 지천에 널린 격변의 시대에 태어난 덕분에 겪어내야만 했던 지난한 일대기입니다.

숙명처럼 칼을 지니고 살아가야 했던 사무라이지만, 그에게 있어 대의는 메이지 유신도, 도쿠가와 막부도, 무사도도, 할복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것, 그들이 굶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목숨을 지키고 돈을 버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떤 치욕도 감내할 수 있다는 신념. 이것이 주인공 요시무라 간이치로의 대의였습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위해 수많은 목숨들이 한없이 가볍게 사라져야했던 격변의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지만, 아사다 지로 특유의 따뜻함과 애틋함은 오히려 그 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요시무라 간이치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려나가면서 아사다 지로는 시대개인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습니다. 시대가 개인을 어떻게 규정지었으며, 개인은 운명처럼 주어진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헤쳐 나갔는지, 또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죽음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개인들이 그 시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소화해냈는지, 어느 하나 사소하게 넘기지 않고 찬찬히 짚어나갑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중에는 몇 번씩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져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하는 민망한 상황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아사다 지로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가끔씩 겪는 일이긴 하지만, 막부 말기의 한 무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고, 그날로 새 책을 주문했습니다. 삶이 힘들어질 때, 모든 것을 손에서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허망해질 때,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게 될 때, 그럴 때마다 찾아 읽게 될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의지처가 되는 책이 몇 권 있지만, ‘칼에 지다는 조금은 더 묵직한 존재감으로 그 리스트에 자리 잡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일본 근대사에 대한 지식이 미약했던 탓에 당시의 역사적 사건, 지방 제도, 유신지사 대 도쿠가와 막부의 갈등, 신센구미의 역할 등 무시하고 읽기엔 좀 어려운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냥 읽어도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인터넷을 통해 약간의 사전 정보라도 습득하고 읽는다면 훨씬 더 의미 있는 책읽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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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 미타라이 기요시 시리즈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 / 검은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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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소지가 창조한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가 활약하는 네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데, 시간적으로는 점성술 살인사건을 해결한 1979년부터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는 시기가 배경입니다. 나름 인정받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론 점성술 살인사건밖에 만나보지 못한 시마다 소지입니다.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 ‘용와정 살인사건등 중고서점을 통해 구입한 작품들은 많은데,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못한 상태에서 우연히 최신간인 미타라이 기요시의 인사부터 읽게 됐습니다. 아직까지 이만한 혹평을 쓴 적이 없어서 여러 가지로 유감스럽지만, 이건 좀 너무했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감이 컸기에 앞뒤 안 가리고 일단 느낀 그대로를 써볼까 합니다.

 

숫자 자물쇠

1979년 크리스마스 무렵, 무례하고 버릇없는 미타라이 기요시가 사건 해결 과정에서 친구를 감동시켰다는 이야기. 정작 사건은 평범했고, 결과는 감동을 줄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런데, 제목으로 쓰인 숫자 자물쇠는 사건 해결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장치였는데, 그에 대한 미타라이의 허접한추리를 보면서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던... 혹시 무슨 말장난이라도 숨어있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고, ‘바보 취급당했다는 느낌을 받은 독자는 비단 만은 아닐 듯... 첫 작품부터 맥이 풀리는 바람에 계속 읽어야 하나, 잠시 고민...

 

질주하는 사자

파티장에 함께 있던 사람이 갑작스런 정전 직후 방을 뛰쳐나갔고, 잠시 후 고가선로에서 열차와 충돌한 사체로 발견.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연출되지만 미타라이가 보란 듯이 해결하는 이야기. 하지만, 그가 범인을 지목하며 설명한 범행 수법은 숫자 자물쇠처럼 억지 혹은 끼워 맞추기였던... 말하자면 결과를 정해놓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미타라이는 증거나 개연성에 대한 설명 없이 단지 추측만으로 복잡다단한 범죄과정을 코앞에서 지켜본 것처럼 설명.

 

시덴카이 연구 보존회

어김없이 등장하는 미타라이의 설명 불가능한 초능력’. 미스터리라기보다는 한 편의 해학적인 콩트 같은... 그 덕분에 앞서 두 편에 비해 배신감은 덜 들었지만, 여전히 분노의 게이지는 내려가지 않는... 이제 한 편 남았음.

 

그리스 개

그나마 다른 작품들에 비해 사실감이 조금준수하긴 했지만, 여전히 결과를 정해놓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형식은 전작들과 동일. 훨씬 더 쉬운 방법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었던 범인들이 미타라이의 천재성을 입증해주기 위해일부러 몇 배는 더 힘든 범행 수법을 고안해낸 것 같아 오히려 동정심(?)이 들었던...

 

시마다 소지가 이 작품을 통해 대단한 미스터리나 뒤통수치는 반전을 의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품 제목처럼, 독자들이 무례하고 버릇없는 미타라이 기요시와 친해질 수 있게끔 그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위주로 구성한 것처럼 보입니다. 더불어 세계 정상급의 뮤지션을 압도할 정도의 기타 연주력 등 미타라이의 개인기를 보여줄 수 있는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도 눈에 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탐정의 사건 해결인 만큼 미스터리의 덕목은 갖춘 상태에서 작가의 의도를 담아냈어야 합니다. 물론, 단편이 갖는 스케일이나 깊이에 있어서의 한계도 충분히 고려했지만, 네 편의 수록작은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품질자체에 하자가 있다고밖에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점성술 살인사건을 읽은 지도 꽤 오래 전 일이라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미타라이 기요시가 특이하고 버릇없긴 해도 사소한 단서 하나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꼼꼼한 캐릭터였다는 점, 과장됐긴 해도 그 박학다식함이 작위적으로 여겨지진 않았다는 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었는데, 오히려 그의 인사를 읽고 나니, 그 추억들이 전부 안 좋은 쪽으로 변질돼버린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시마다 소지의 작품들을 쌓아놓고 한편씩 음미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물론 그의 명성이 결코 헛되이 쌓이진 않았을 테니 이런 독후감을 느낄 일은 없겠지만) 왠지 맥 빠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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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연애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8
마키 사쓰지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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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바람에 444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 그리 두껍게 여겨지진 않지만, 한 남자의 40여년의 인생을 담은 내용만큼은 거의 대하급 무게감을 갖고 있습니다. ‘완전연애라는, 어딘가 불편하고 부담스럽고 집착의 뉘앙스를 풍기는 제목과 함께 9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이라는 타이틀 역시 그 무게감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개의 시기로 나뉜 주인공 혼조 기와무의 삶이 그려지는데 매 시기마다 그가 직간접적으로 엮이는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2차 대전 패전 직후, 기와무와 그의 첫사랑 도모네가 얽히는 살인사건, 20여년이 흐른 뒤 기와무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목격하는 밀실 살인 사건, 다시 20여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당하는 살인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세 건의 살인사건은 모두 완전연애라는 미묘한 형태의 감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안타까움과 평생 잊히지 않는 하룻밤 사랑에 대한 회한이 무려 40여 년 동안 여러 사람의 삶을 지배하면서 운명과도 같은 살인사건들을 일으킵니다.

 

도중에 모든 걸 파악한 독자에겐 완전연애의 실체가 다소 싱겁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대로 딴 데 한 눈 팔고 있던 독자에겐 꽤 충격적인 반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완전연애인지 새삼 되새겨보게 될 것입니다.

 

혼조 기와무와 그의 첫사랑 도모네 외에는 인물들을 소개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캐릭터 설명 자체가 소소하게나마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어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던데, 대형 스포일러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챕터 이상은 허무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덕분에 내용 소개는 없는 너무 밋밋하고 알맹이 없는 서평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내용이나 캐릭터가 궁금하신 분들은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아쉬운 점이라면, 40여년의 세월을 담기엔 다소 부족해 보인 분량인데, 이야기가 채 숙성되기도 전에 개연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비약하거나 독자가 몰입하기도 전에 주요 인물들이 등퇴장을 반복한 건 분명 분량의 문제란 생각입니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막판 반전이 앞서 펼쳐진 대하급 이야기를 무색하게 만든 느낌을 받게 되는데, 굳이 이만큼의 큰 구도가 필요했는지, 그 많은 인물들이 필요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박한 점수를 주고 싶진 않습니다. 많은 독자들이 지루하다고 평했던 초반부 유년기의 기와무의 이야기가 저는 참 좋았습니다. (물론 패전국 국민으로서 기와무가 겪어야 했던 비참함은 도무지 몰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그 오랜 시간동안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한 복잡다단한 감정들에 대한 묘사 역시 녹록치 않은 필력 속에 잘 녹아있다는 생각입니다. 결과적으로, 작가가 궁극적으로 그리려 했던 연애와 미스터리의 조합은 완벽하진 않아도 충실하고 꼼꼼했던 설계 덕분에 나름 공감을 얻었다고 할까요? 제대로 된 설계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많은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이 엉망으로 꼬인 연애와 미스터리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만 덧붙이면, 띠지의 자극적인(?) 홍보 문구 도발적인 살인예고, 완벽한 밀실 살인,

기이한 알리바이 증명, 그리고 마지막에 명탐정이 등장한다에 솔깃하거나 연연한다면 오히려 이 작품의 진가를 음미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극적 요소에 대한 기대 때문에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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