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
구보 미스미 지음, 서혜영 옮김 / 포레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19금 소설들의 공통점은 표지에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19금 딱지만으로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할 텐데, 이왕이면 구매 의욕까지 북돋기 위해 자극적인 표지를 덤으로 내놓곤 합니다. 그에 비해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는 겉모습이 참 얌전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을 끌어냅니다. “이런 평범한 표지인데, 19금이라고?”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첫 번째 수록작 미쿠마리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실은 16살 타쿠미와 28살 주부 안즈를 주인공으로 한 한 편의 이야기라고 해도 무방한 연작소설입니다. 각각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미성년자인 타쿠미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주부 안즈의 변태적인 관계의 시작과 끝, 안즈의 고통스런 성장 과정과 불임이라는 비극, 동급생 타쿠미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은 나나의 이야기, (약간 독립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타쿠미의 친구 료타의 고군분투기, 그리고 조산원을 배경으로 한 타쿠미 어머니의 생명또는 모성애에 관한 이야기 등입니다.

 

나중에 읽은 같은 작가의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역시 비슷한 포맷을 취하고 있는데, 이런 형식이 주는 매력은 나와는 무관한 남의 일이라고 생각됐던 이야기를 어느 순간 내 이야기처럼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타쿠미에게 초점이 맞춰진 미쿠마리에서 안즈는 철저히 변태적인 주부로만 나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수록작 세계를 뒤덮는 거미줄에서는 그런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안즈의 과거를 깡그리 드러냄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과 동정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습니다. 안즈와의 이별 후 히키코모리처럼 폐인이 된 타쿠미를 곁에서 지켜주는 나나의 이야기 역시 앞서 두 에피소드에서 조연에 불과했던 나나의 속마음을 애틋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언제나 의지처가 되어주고 든든한 버팀목으로 존재했던 타쿠미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대단원을 장식하며 마지막 눈물샘을 자극합니다.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한 건 첫 수록작 미쿠마리지만 개인적으론 두 번째 수록작 세계를 뒤덮는 거미줄을 한 세트로 묶었을 때 수상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두 수록작은 이 연작 단편집이 왜 19금 판정을 받았는지 확실하게 보여줄 만큼 파격적인 묘사가 들어있는데, 재미있는 건 정작 포르노그래피나 다름없는 그 묘사들 때문에 결국 울컥,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이라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적잖겠지만, 제겐 노골적이고 변태적인 성애 묘사가 오히려 주인공들의 감정에 최대한 이입할 수 있게 만든 중요한 열쇠로 보였습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수는 없지만, “포르노그래피를 보고 울컥했다고?”라고 반문하는 독자에겐 그저 직접 읽어봐야 알 수 있다, 라는 대답 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나머지 세 편은 ‘19과는 전혀 무관한 타쿠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하늘을 바라보는 한심한 나의 이야기이고, 캐릭터들이 겪는 통증은 앞의 두 편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공감 역시 앞의 두 편에 못지않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한심한가? 혹시 그렇지 않은 척 위장하면서 살아오진 않았는가? 내 주위 사람들은 한심한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실은 다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깊은 내상을 감추고 있진 않은가?

결국 하늘을 보는 한심한 나는 스스로만 볼 수 있고, 스스로만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구보 미스미가 짜놓은 이야기들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참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엔 상처투성이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내가 타쿠미였다면, 안즈였다면, 나나였다면, 료타였다면, 타쿠미의 어머니였다면, 과연 나는 그들만큼 진실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거나 세상과 맞설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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