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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 밈
수전 블랙모어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10년 11월
평점 :
<밈>을 읽다보니 CM송 한 곡을 자꾸 반복해 부르는 바람에 그 습관을 떨쳐버리고자 애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저자에 따르면 내가 경험했던 이 현상은 바로 밈에 의해 모방이 이뤄지는 과정이었고, 내가 불렀던 한 곡은 밈의 한 단위가 된다(만일 한 소절만 반복했다면 그것이 밈의 한 단위이며 밈의 단위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나의 뇌는 그 곡에서 느껴지는 어떤 요소를 선호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쉽게 채택하여 되뇌이게 된다는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내'가 그 CM송이 맘에 들어 선택하게 되었고, '내'가 그 곡조를 듣는 것이 좋아 지긋지긋하게 반복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는 '밈'이 부추킨 노래를 모방한 것이며 '밈'의 숙주가 된 내 뇌는 같은 노래를 무한히 재생시킨 것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 책은 자아나 자유의지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인간을 '밈플렉스(Memeplex)' 또는 '밈머신(Meme Machine)'이라고 부르는 저자의 견해는 긴 역사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해왔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이기에 한편으로는 호기심에, 다른 한편으로는 반발심에 페이지를 펼쳐보게 되었다.
먼저 밈은 생물학적 유전자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문화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처음 등장시킨 개념이다. 저자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간행동과 문화전반을 해석하는 틀을 마련했는데, 여기에는 사회생물학, 고고학, 뇌과학, 유전자학 등 다양한 방면의 학문과 지금까지 밈을 언급해온 여러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총 동원되어 밈을 체계화하는 대대적인 노고를 담고 있다.
<밈>은 인간의 '모방'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뇌발달, 언어의 발달, 문화의 발달, 유전자와의 관계, 이타성, 자아 등에 관해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모방은 갓난아기때부터 부모의 표정이나 행동을 따라하는데서 시작하여 점차 언어를 통해 받아들이고 퍼뜨려간다. 저자는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신체 대비) 유난히 큰 뇌를 가지게된 까닭이 바로 언어 능력때문이라고 밝혔는데, 여러 호모미니들 중 호모 사피엔스만이 살아남은 이유도 바로 모방을 언어를 통해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음성형태로 전파되는 언어는 충실도, 다산성, 긴 수명이라는 품질 좋은 '밈'의 요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어 매우 강력한 밈 확산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다.
언어를 통해 전달된 밈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집단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행동과 도구들을 전파해왔고 오늘날의 문화를 이룩해 왔다. 더불어 짝짓기에 있어서도 말을 더욱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여 그들이 후손을 낳는데 더 유리하게 함으로써 밈을 잘 퍼뜨리는 뇌로 진화하도록 유전자에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유전자상으로 자손번식의 기능을 맡는 성(性)은 밈의 압박에 의해 쾌락을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 변화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밈이 유전자를 누르고 인간의 복제행위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을 설명한 '목줄이론'의 한 예시라 할 수 있다. 저자가 고안한 이 '목줄이론'은 그동안 독보적이었던 유전자의 수직적, 생물학적 복제를 뛰어넘어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달되는 수평적, 문화적 복제를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뿐만아니라 밈은 다른 학문들의 난제였던 인간의 이타성과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이타성 역시 타인으로부터 인기를 얻는 유리한 점이 있어 많은 추종자들을 갖게 되고, 밈의 입장에서는 인기있는 이들을 통해 이타적 밈 자체를 포함한 다른 여러가지 밈들을 확산시킬 수 있어 이득이 된다. 이렇게 밈의 입장으로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다른 것은 관심이 없고 오직 복제에만 전념하기에 '이기적'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쉽게 이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를 밈으로 설명한 부분은 그다지 성공적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두려움과 이타성, 그리고 사실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오래된(그리고 사실이라 믿는 사람들의 힘으로 전달되는) 경전을 통해 역사상 가장 성공한 밈이라 불리는 종교는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밈에 의혹을 불러일으킬만한 요소들을 보인다. 먼저 저자는 밈이 언어를 통해 확산되고 문화를 창조해 나간다고 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신이 말씀, 즉 언어로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저자는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밈의 복제를 위한 도구로 밖에 쓰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역시 성경을 보면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다스리는'이라 기록하고 있어 저자의 '밈'이 기독교의 '신'을 모방한 것같은 모순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밈>은 여러가지 예시를 통해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그 중 하나가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라는 개념인데, 몰입의 경지에 이르면 자신(의식)을 잊고 완전히 하고있는 일에만 빠져들며 여기서 창조성이 발된다고 한다. 또한 뇌파촬영을 통해 의식의 결정이 행동에 후행한다는 것을 증명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을 읽어보면 인간에게 자아나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될만하다. 그러나 역시 또 한가지의 의문이 떠오른다. 자신을 잊고 뭔가에 몰두한다는 것은 자아가 없다기 보다는 그 작업을 위해 최소한으로 축소되기(물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어릴 적 끊임없이 반복해 부르던 CM송을 그만두려고 안간힘을 썼던 그 순간, 그만두려고 애썼던 그 의지는 누구의 의지였을까?
<밈>은 밈학을 구체화하기 위한 첫 시도이기에 아직 의문의 여지가 많다. 물론 방대한 학문을 아우르는 저자의 설명은 경탄할만하며 매우 타당한 논리들이 돗보이지만, 집단심리, 뇌가소성, 성격, 기호, 욕망 등으로 설명할 수 있는 친숙한 이야기들을 '밈'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도발적이고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에 학문적으로 참고해볼 가치가 있다. 다만, 밈을 통해 인생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우리 미래에 반영되지 않기를 소망하며...
밈학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열어준다...영속적이고 의식적인 자아가 내 안에 존재하고,...그것이 나를 나로 만들어 준다는 망상을 유지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게 살 수도 있다...복제자들과 환경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으로서의 삶을 경험하며, 그것만이 전부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살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이기적 자아 복합체의 희생자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p.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