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G20 정상회의의 개최를 앞둔 시점에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펼쳐보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만일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전후(戰後) 빈곤 국가에서 최단시간에 '한강변의 기적'을 일궈냈던 우리 경제의 역사와 IMF위기를 극복하고 G20의 회원국으로의 위상을 확립한 성과에 대해 큰 감흥없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는 오늘날의 경제수준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 마냥 익숙해져있었고 국제적 시류에 휩쓸려 우리 경제를 일궈왔던 힘이 무엇이었는지 망각하고 있었다.

모잠비크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와 우리 경제의 과거사를 되짚어보는 프롤로그 덕에 다시 과거와의 공감대를 회복하며 그 시절의 경제사건들을 하나 하나를 떠올려봤다.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노래를 통해 익숙해진 새마을 운동, 보리밥을 먹으면 더 건강해지며 식량자급을 이룩한다고 홍보했던 혼식하기 운동, 그리고 'KS 마크를 꼭 확인하세요'와 함께 생각나는 국산품 애용 운동까지...그땐 무슨 운동이 이렇게 많냐며 국가의 통제에 대해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었는데, 그것이 바로 개발도상국이 되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정부주도 경제의 일부였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결과로 영국의 경우 2세기, 미국의 경우 1.5세기가 걸려 달성한 경제성장을 불과 30여년만에 달성했음에 사뭇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의 경이로운 성과의 원천이 되었던 정부주도 경제나 보호무역 등에 제동을 걸고 있을까? 그 이유는 일명 '사다리 걷어차기'로, 이미 경제 우위를 차지한 선진국들이 후발국들의 추격을 막기 위해 고안한 비열한 경제 논리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제일 먼저 최고의 경제 지위에 올랐던 영국도, 지금까지 세계 제1의 부국으로서 오랜 지위를 차지해 온 미국도, 그리고 그밖에 선진국이라 부를만한 나라들 모두 보호무역과 국가의 개입으로 부를 축적해 왔다고 한다. 특히 영국의 경우 19세기 중반까지 45~55%의 관세를 자랑하는 고도 보호무역국가였으며 미국도 자유주의를 버리고 결국 해밀턴 프로젝트(보호관세, 수입 금지령, 보조금, 특허부여 등을 내용으로 함)를 개시했는데, 이런 선진국들이 후발국가들에 대해서는 자유무역과 개방압력을 꾸준히 가하고 있으니 진정'나쁜 사마리아인들'이라 부를만하다.

그당시에는 몰랐지만 90년대에 즈음하여 매스컴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했던 '지구촌'과 '세계화' 역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경제 식민지를 확산시키기 위해 내세웠던 신자유주의 책략의 일부였다. 정사(正史)에 따르면 이들이 '세계화'의 기치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 개발도상국들의 수입대체산업화(ISI,수입에 의존하던 제품들을 자국에서 생산하여 국산품으로 대체하는 것) 전략이 실패하고 외국인투자와 자유무역을 시행했던 동아시아가 '경제 기적'을 이뤄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측면만을 부각하여 개발도상국에게 세뇌시켜온 내용이며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더 큰 관점에서의 진실과는 다르다.

실제 수입대체산업화에 실패했던 남미의 경우 자체적으로 경제를 좌우할 권한이 없는 식민국가였으며, 자유무역으로 좋은 성적표를 보여줬던 동아시아 국가는 사실 보호무역과 국가관리 하에서 더 좋은 성적표를 받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역사 속에서 경제학자들 조차 '자유주의는 가망성 없는 프로그램'이라 실토했던 사실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저자는 정사(正史)따져 신자유주의의 정통적 견해에 맞게 왜곡된 세계화의 역사를 바로잡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논리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택해 반론을 제기함으로 그 아성을 무너뜨리고 있다.

경제의 상세한 내용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그저 매스컴을 통해 이런 것이 경제 대세이구나...라는 것만 인식하며 지내왔던 나로서는 저자 장하준이 따져 밝히는 신자유주의의 숨겨진 모습들이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여섯 살 아들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지시하는 것에 견주며 갓 성장을 시작한 개발도상국에는 자유무역이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운 부분, 외국인 투자가 장기 경제발전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한 부분, 그리고 20년이나 되는 지적소유권 보호 기간으로 독점에 가깝게 이득을 창출하는(그리하여 사실상 자유무역의 원칙에 어긋나는) 선진국의 술수를 파헤친 부분의 경우 그와는 정 반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 나의 상식이었기에 매우 인상깊게 읽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맺으며 장하준은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는 몇가지 경제 대책들도 제시하고 있어 무척 관심있게 보았는데, 그 첫번째 대책은 '대항하라'는 것이었다. 즉, 지금까지 우리가 보호무역과 정부관리 등을 통해 대항해 온 것 처럼 단기적 희생이 따르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또한 장하준은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IT강국이라 하여 생산성 높은 서비스 부문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는 제조업의 든든한 뒷받침 없이 서비스 부문만으로 부유해진 나라는 없다는 점을 예시로 설명하며 기초를 다질 것을 당부한다. 반면 선진국을 향해 따끔한 충고가 되는 부분도 있다. 이 중 눈에 띄는 것이 '기울어진 경기장'에 대한 것이다. 어린이와 성인의 축구 경기가 공정하기 위해서는 같은 능력으로 뛸 수 있도록 경기장을 조절해야 한다는, 즉 시장의 룰을 개발도상국에도 공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아마도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신자유주의 저서를 살짝 인용해 반론을 제기한 듯 하다.

서구의 독자들을 고려한 탓일까? 장하준은 (적어도 나에겐) 마치 미국 대통령의 호소문 같은 느낌으로 이 책을 마무리한다. 먼저 그는 개발도상국들이 발전할수록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팔 수있는 시장이 넓어져 이득이 됨을 설명했으며, 신자유주 열렬한 신자유주의자였던 레이건이 아시아 금융 위기를 계기로 IMF에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던 사건을 상기시겼다. 그리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진정 탐욕스럽지도, 편협하지도 않다는 사실과 과거에 부자 나라들이 나쁜 사마리아인들처럼 행동하지 않았던 사실에 희망을 건다고 말한다.

물론 이 책에서 장하준이 제시하는 의견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전문적인 관점에서 봤을때 팽팽한 반박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세계 저명 인사들의 추천사와 함께 미국판과 영국판으로도 출간된 이 책이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신자유주의 실상과 이에 대한 우리나라의 입장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무척 큰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게 별점 대신 KS 마크를 찍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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