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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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란 참 독특한 건물이다. 덩치는 크지만 내부는 대부분 텅 비어있고 모든 공간은 흐름을 전제로 존재한다. 이는 밀집과 머묾을 기본으로 하는 일상의 아파트, 학교, 사무용 빌딩과는 확연히 다른 유형의 공간이다. 오죽하면 어떤 건축가는 미술관을 가리켜 '텅 빈 상자의 연속'이라고 불렀을까! 그러나 미술관의 텅 빈 공간에도 엄연한 점유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빛이다. 빛은 미술관 곳곳으로 스며들어 주인장의 이름으로 잠들어 있는 신화를 깨우고, 역사에게 이야기를 재잘거리게 하며, 인물들의 눈동자를 반짝이게 한다. 그리고 때론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통해 내부로 흘러 들어와 미적체험의 순간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 순간이 물리적 흐름을 떠나 감상자로서 예술적 흐름으로 편입하는 교차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림으로부터 충격을 받아 전율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오랫동안 떠날 수 없는 극적인 경험들을 예술과 만나는 순간, 즉 예술의 흐름속에 빠지는 순간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심미안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될 뿐, 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수의 범인들은 어떻게 미술을 감상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이 '지식'이다. 심미안은 선천적인 재능과도 같아서 노력한다고 반드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식을 갖추고 사유하기에 힘쓴다면 그림을 보는 눈이 조금씩 열리기를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지식이 없다면 직관으로 얻은 감동을 하나의 탁월한 가치로 승화시키거나 재구성할 수 없다. 이렇게 미술감상에서의 지식의 역할과 심미안(직관)의 역할을 구분해 보는 것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출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직관을 실에, 지식을 구슬에 비유하고 있는데, <지식의 미술관>은 우리들에게 구슬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심미안을 갖게 해준다는 허황된 약속은 하지 않는다. 다만 지식이 미적체험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지식을 통해 사유를 확장해 나가는 가이드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매우 솔직한 면이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지식은 낱낱의 정보 한 톨로부터 시작된다. 개별적으로는 별 것 아닌 것 같고, 이를 통해 대단한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쌓이다 보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눈송이처럼 부지불식간에 모여 커다란 힘의 근원이 된다. 이 책에도 정보형 지식이 상당히 담겨있는데, 키아스쿠로, 데칼코마니아, 디 소토 인수와 같은 용어를 비롯해 인상파와 튜브물감, 위작, 스탕달 신드롬 처럼 흥미를 유발하는 곁다리 이야기들이 가미되어 소소한 정보와 함께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보들은 그림에 얽힌 역사, 종교,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로, 결코 가볍게 읽어 넘길 수 없다. 뿐만아니라 <지식의 미술관>에는 18세기 이전의 명화들이 상당수 소개되기에 그림을 통해 시대를 읽는 힘 또한 기를 수 있다.예술가의 방, 혹은 경이의 방을 뜻하는 쿤스트카머는 유명화가의 걸작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역사적 지식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은 그림이다. 온갖 진귀한 것을 모아놓은 이 수집품들은 당시 서구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나타내는 척도였으며, 단순히 특산물이나 외국의 풍경, 진귀한 동물들을 백과사전식으로 모아놓은 것 같아도 이면에는 경험주의 철학의 등장과 기득권자들의 특권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흐르고 있다.

 

 

 

<지식의 미술관>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알레고리'에 관한 작품들이다. 알레고리란 '다른 이야기'라는 뜻으로 겉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가 내포되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알레고리를 해독하는 재미가 16~18세기의 명화들을 감상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알레고리'하면 빈번히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부터 신앙의 알레고리, 바니타스 알레고리, 문법의 알레고리 등 상징을 통해 그림을 읽어나가는 방법과 이들을 통해 총체적으로 가치를 통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알레고리를 보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말한 '인생이란 초콜렛 상자와 같다'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마치 예측할 수 없는 초콜렛을 꺼내는 것처럼 그림속에 숨어있는 상징들을 발견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콜렛을 다 꺼내 먹어야 한 상자가 어떤 맛의 컨셉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림도 모든 상징들을 다 발견해야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음미할 것은 한 병의 포도주와 같은 지식들이다. 포도주는 생포도를 원료로 하지만 알콜과 배합되고 숙성되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형(transform)된 음료인 것처럼 지식에서도 하위지식(정보)을 원료로 전혀 다른 경지의 맛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특별히 낱알같은 사소한 지식에서 한 묶음의 초콜렛 같은 지식, 그리고 차원을 달리하는 포도주같은 지식으로 확장되며 진행하는 책은 아니지만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새로운 시각을 접목시키고 숙성시켜 나간 흔적은 책 속에서 빈번히 접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창작법인 데페이즈망(낯설게 하기)에서 비즈니스 세계의 데페이즈망을 연관시키기도 하고, 오감도(五感圖)가 성행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여성 누드화와의 관계를 찾아내기도 한다.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키스>는 남성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화해한다는 깊이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남녀 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우게 된다.

 

가부장 사회에서는 성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기 때무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중략)...따라서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은 시종일관 억압된다.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이기도 한 것은 그것이 남성 안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녀 화해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넘어 이렇듯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이 그 반대의 정체성과도 화해를 하는 것이다.(p.129~130)


<지식의 미술관>은 미술 입문서라고 부르기엔 조금 특별한 책이었던 것 같다. 일단 시대나 사조별로 그림을 나누거나 몇 가지 주제를 통해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었던 까닭도 있고,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식을 종횡무진 하며 사고를 확장해 가는 것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아니라면 '빅토리안 페인팅과 영화', '반달리즘과 미술'같은 주제의 글을 만나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술의 중심 키워드라 여기기엔 조금 부족한 사냥감 그림, 트롱푀이유, 미술품 약탈(엘기니즘) 등의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인데, 역시 다른 책에서는 진지하게 살펴볼 기회가 흔치 않으므로 이 책을 통해 읽어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통념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뛰어난 심미안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감식안을 가지고 큐레이터나 비평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미술에 대한 지식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익한 감상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도 좋지만 어떤 그림에서든 자기만의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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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개념어총서 WHAT 6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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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운전 좀 하나?"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운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면허는 예전에 따 놓았는데, 실제 운전한지는 꽤 오래 됐어요. 장농면허죠, 뭐."

 

운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 때 운전하고픈 욕구와 의지가 있었으며, 이미 시험에 통과해 '쯩'까지 다 받아 놓았는데 어째서 과감하게 도로에 나아가 차를 몰지 않는 것일까? 물론 비용과 환경을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혹은 큰 교통사고를 당해 운전이라면 치가 떨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분명한 사실은 운전대를 놓은 시간 동안 운전에 대한 감각은 뒤떨어지고 애써 마련해 놓은 면허증은 효용성을 잃게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위의 대화를 그대로 민주주의에 대입해보자. 그리고 묻는다. 민주주의가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 인지하고 혹자는 한때 민주화의 의지로 불탓음에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민주국가의 국민임을 증명하는 사진과 13자리 숫자가 또렷이 박힌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어째서 과감하게 세상에 나아가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는 것인가? 이것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고 내 스스로에게 던져 본 질문이었다. 장농속에 묵혀놓고 오랫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운전면허증과 대학교 교양강의를 마지막으로 단 한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내 마음 속의 민주주의가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둘 다, 청춘이 꽃필 무렵 내게로 왔다가, 둘 다, 현실에 부대끼는 가운데 멀어졌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책의 제목을 따라 이 질문에 답해보려 하였다. 먼저 생각난 것이 '국민에,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이라는 구절,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라는 우리나라 헌법 첫머리, 그밖에 다수결의 원칙, 투표, 주권, 민주화 항쟁과 같은 단편적인 단어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을 통해 정의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되는 나라' 정도의 상식적인 한 줄밖에 되지 않았다. 코스 연습을 하듯 학교라는 틀 안에서 주워삼킨 단편적인 지식들은 결국 세상에 나아가 민주주의를 외치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비록 안다고 해서 모든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지식이 부족하다고 행동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할만한 누군가를 지지하려면 적어도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 관념의 핵심을 비판하겠다는 저자는 '국민-주권-대표'라는 대표적인 형식을 근대 정치의 기본도식라 일컫고 있는 것이었다. 그동안 통념에만 기대어 민주주의를 안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는 '국민-주권-대표'라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깨어진 민주주의를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어원부터 살펴보면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민중을 뜻하는 '데모스(demos)'와 힘을 나타내는 크라토스(kratos)'를 합한 말이다. 이것은 근거와 근원을 뜻하는 '아르케(arche)'를 붙여 만든 '모나키(monarchy/군주정)'나 '올리가키(oligarchy/과두정)'와는 확연히 다른 정체(政體)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아르케는 '아르케 없음'이기 때문에 지식도, 재산도, 혈통도, 성별도, 그리고 심지어는 수적 우세도 다른 어떤 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민주화 투쟁이란 이런 근거들이 근거 없는 것들임을 폭로하는 과정, 근거에 의해 구분되고 소외된 민중들의 힘을 발휘하는 과정이다. 이에 대해 자끄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면 '말할 권리를 갖지 않는 자가 말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의미와 함께 탐색되는 것은 주권과 대의제이다. 우리는 흔히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 알고 있으며 현대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없으므로 간접민주주의를 채택하고 그 대표가 되는 사람을 선출해 국민의 주권을 대행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재고해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대의제의 기원을 보면 민주주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대의제는 군주제에서도 가능하며 그밖에 다른 정체에서도 실행할 수 있다. 오히려 근대 민주주의야 말로 대의제의 하나로 등장했다고(p.71) 역으로 설명해야 옳은 것이다. 뿐만아니라 대의제는 이를 통해 지배권을 얻은 이들이 데모스, 즉 군중들이 직접 지배할수 없도록 취한 정치적 장치에 불과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란 대의제를 잘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법에 귀속된 주권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국민으로 존재하는 다양한 양상들이 사이(inter)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경지를 의미한다.

 

이처럼 통념상 알고 있던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나면 민주주의의 목표가 어디에 있을지 사뭇 궁금해 진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너무도 이상적인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이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토대로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저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희미하나마 '정치'에 가려졌던 민주주의로부터 한줄기 빛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점점 늘어가는 NGO, 정치적 힘을 갖지 않는 고등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평범한 주부, 네티즌 등의 권리 주장이 바로 새로운 '이후' 민주주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80년대 시위의 주도자였던 대학생, 노동자, 시민과 비교해 보면 사뭇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행히도.

 

이 책은 민주주의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해 민주주의를 증오하고(사실상 민주주의는 초기에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 폄하했던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그 약점을 통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가 통념상 올바르다 생각하는 국민주권과 대의제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그리고 대부분의 책들이 그렇듯 우리 민주주의의 현 주소를 짚어보는데, 이것이 끝이 아니였다. 마지막 장에 저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단상'이라고 하여 우화형식의 단편적인 글들을 수록한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글들은 이 책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우화를 통해 스스로 깨우쳐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상들은 주로 인민(혹은 시민)의 역할(여기서는 역할이 곧 권리이기도 하다)을 각성케 하는 효과가 다분한 글들로, 그동안 정치 잘 할 사람을 뽑는데 혈안되어 갑론을박하고, 좌파우파하고, 보수진보했던 모습을 반성할 수 있었다. 민주주의는 누구를 대표로 뽑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데모스인 우리들이 그럴만한 힘이 있음을 깨닫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특히 '나꼼수'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지금,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말해주고 얼마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해 가는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할 때이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라는 책이 커다란 관심을 모았었다. 책도 자그마하며 가격도 비슷한 두 권인데 하나는 무척 각광을 받았고, 다른 하나는 그 힘에 눌려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공교롭게도 비슷한 현상이 한 번 더 있었다. 우리의 호프 김어준 총수께서 <닥치고 정치>라는 책을 출간할 무렵, 자끄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역시 하나는 전례없는 판매고를 올렸고, 다른 하나는 정치철학계 구루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곰곰 생각해 보면, 먼저 현재 우리 현실이 '분노'가 먹히고 '씨바'가 먹히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누군가 꾹꾹 참고 있던 마음을 총대메고 폭발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진정성과 함께. 반면 민주주의는 현실에선 크게 매력이 없다. 지루한 철학자들의 언변 일색이며 각종 논리와 비판이 건조하게 이어진다. 또 한편으로는 민주주의를 논하는 학계와 실제적인 시민들의 삶이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론으로만 가득찬 민주주의를 시민의 언어로 표출해 줄만한 학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는 현재 대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선 민주주의 보다 선거에 더 관심이 모아진다. 그러나 여전히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민주주의의 참된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되며 정치가 주목받는 시기이기에 오히려 민주주의를 돌아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꼼수'를 듣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나꼼수'에 공감하고 박수를 보내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통치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MB도, 김어준도 아닌 '나꼼수'의 청취자가 데모스이며 크라토스임을 깨달을 수 있다(우리들이 힘을 가진 통치자다!). 하여, 청취자들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알 때 김어준의 방송이 더 빛을 발하고 의미가 깊어질 것이며 그것이 코스를 벗어나 제대로 된 도로를 달리는 민주주행에 기어를 넣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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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최진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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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도서출판계는 부고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흉흉한(?) 세상이었다. 혹자는 시가 죽었다 했고, 혹자는 철학이 죽었다 했으며, 좀 더 광범위하게 문학이 죽었다, 인문학이 죽었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세간에 떠도는 부고들의 종결자가 나타났으니, 아예 '책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셔먼 영이다. 셔먼 영은 서구 여러나라들의 참담한 독서실태를 고발했을 뿐만 아니라 시장의 요구에 맞춰 일종의 상품처럼 출간된 '안티 책'의 문제점도 지적하는데, <불온한 인문학> 역시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국내 인문도서 현황을 분석하면서 우리 인문학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구전민요처럼 들어왔던 '인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2011년 현시점에서 볼 때 더이상 유효한 것 처럼 들리지 않는다. 올해 베스트 셀러 순위 100위 안의 도서들을 보면 인문학 도서가 9권이 들어있고, 200위 안에서는 21권 정도가 된다. 이는 외국어 교재 및 아동도서를 포함한 총 순위로 전체 10개 남짓한 도서분야의 숫자와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문학분야의 강세를 고려해 볼 때 그런대로 괜찮은 실적이다. 뿐만아니라 작년도 <정의란 무엇인가>와 올해 <닥치고 정치>의 히트까지 포함하면 오히려 '인문학이 부활했다'는 말이 신빙성있게 들릴 정도다. 그러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성급히 축포를 터뜨릴 일은 아니다. 이른바 인문학 베스트셀러에 속해있는 도서들을 보면 진정한 인문학의 깊이를 추구한다기 보다는 마음을 달래주고 막막한 인생길에 조언을 보태주는 에세이 형식이 더 많다. 또한 쉽고 즐거운 입문서들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도서들이다. 물론 인문학이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이들이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른바 '행복'이나 '위로' 혹은 '지식충전'을 표방하는 현재의 인문학은 자기계발화, 상업화, 고급문화화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인문학의 참다운 발전은 커녕 소비주의와 권력의 통제 속에 귀속되어 본질마저 혼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더해 각 기업에서 앞을 다퉈 홍보하는 '인문경영'의 실체는 학문을 통해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풍부한 창의력을 갖춘 인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스펙 갖추기 열풍에 일조할 뿐이다.

 

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p.83)

 

<불온한 인문학>이 추구하는 인문학은 강박적인 소비에 끌려가지 않으며 휴머니즘이나 문화주의와 같은 목적론을 거부하는 반(反)인문학이다. 더이상 '정신문화' 창달과 같은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지원에 충실한 인문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다. 인문학이란 흔히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고 불려지며 영어의 표기를 보아도 'Human Science'나 'Humanities'에서 '인간'이라는 의미가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인문학에 내재된 휴머니즘(Humanism)도 바로 여기서 파생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인문학이 자리잡게 된 데에는 야코프 브르크하르트라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저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것이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면서 인문학은 결국 권력에 종속된다. 실상 인문학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르네상스의 '스투티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란 문법, 수사학, 역사학, 시학, 도덕철학 등과 같이 법학이나 신학을 제외한 과목들을 일컫는 교과개념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이처럼 인문학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이 권력에 의해 채택되고 '이용'되어온 사실을 낱낱이 밝히며 인문학 본연의 역할에 대해 재고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인성을 도야하기 위해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이것 역시 국민들을 규율로 '훈육'시키려는 권력자의 음모의 일환이다. 반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인문학이란, 그리고 인문학의 지향할 자세란 '횡단'의 성격를 내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진경의 글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은 이 책의 중요한 핵심을 담은 장이며 매우 치밀한 논리로 우리가 알고 있던 학제적 교류, 통섭, 소통 등에 대해 일격을 가한다. 그는 한때 화두였으며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는 통섭적 연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데, 통섭적 연구란 환원적인 방법론일 뿐이며 오히려 모든 학문을 자연과학적 방법 안에 포섭하려는 '통합'의 절차,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전략의 일환일 뿐이라 주장한다. 더불어 '횡단'이란 계급과 여성조직, 인간과 도롱뇽처럼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이 만나고 이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시야내로 들어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생생하게 역설하며, 인문학이 갖는 보다 강력한 정치적 의미와 만나게 한다.

 

인문학의 기원과 이를 둘러싼 권력과의 관계, '횡단'을 통해 권력에 도전하는 불온한 인문학의 잠재성, 그리고 불온한 인문학의 일환인 현장 인문학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은 새로운 인문학의 면모를 엿보게 하며, 매우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장애인, 재소자, 탈성매매 여성 등이 인문학에 열정을 가지고 참여하는 모습과 그들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유너머N 연구진들의 정성에는 진정성이 가득한 아름다운 '횡단'의 실체가 담겨있다.

 

우리가 장애인, 재소자, 탈성매매 여성, 외국인 노동자, 노숙인, 철거민과 함께 인문학을 하려는 이유는 그들의 강팎한 영혼을 인문학으로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비인간적인 처지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말들기 때문이다. 법의 바깥, 국민의 바깥, 시민의 바깥, 정상인의 바깥, 합리적 개인의 바깥에 내쳐진 날것의 삶에서 어떤 탈-휴머니즘적 인간과 인간학이 생성하는지 사유하고 실험하고 발명하기 위해서다. 현장 인문학은 인문학을 가지고 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현장'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p.187)

 

그러나 불온한 인문학을 성립시키는 정교한 논리와 현실에서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있다. 먼저, 인문학이 항상 불온해야하고 권력의 밖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문학이 권력 내에서 순기능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견해이다. 또한 인문학을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으로만 연결시켜 인문학이 가지는 다양한 면모들을 축소시켜버렸고, 논리의 성립을 위해 인터내셔널이나 횡단과 같은 용어들을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해 버렸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마르크스의 '인터내셔널'에 독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인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 단어를 제국주의적 침략의 수단으로 치부해 버렸고, 횡단의 경우 통섭과의 차별성을 설명하기 위해 무수한 증명을 펼쳐보였으나 정작 통섭이 환원주의라는 것에 대한 사회생물학자들의 반론은 아예 반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자(들)의 주장은 권력자와 피지배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논리가 되고 말았으며 이는 인간과 도롱뇽처럼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을 조우시키기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모순이 아니였나 생각해 본다.

 

인문학은 부유한 자를 위해서도, 가난한 자를 위해서도 존재하는 학문이다. 아니, 어쩌면 인문학을 통해 빈부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불온한 인문학을 통해 권력과 가진 자들의 음모와 통제를 꿰뚫어 보고 그것에 저항한다는 의도에는 공감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 인문학 전반의 균형잡힌 모습과 우리 인문학의 미래에 대해 논하는 장이 되었다면 저자(들)의 철학적 사유의 정교함이 더 빛나고 유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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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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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인'의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0.8권이라고 한다. 통계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도 있고 조사범주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긴 하지만 이보다 좀 더 많은 수치를 보이는 '직장인' 평균 독서량의 경우도 한 달에 2.6권 정도이다. 또한 분야별로 보면 문학, 자기계발, 실용서가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독서의 폭이나 깊이에 있어서도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문학의 경우 작품의 성격과 깊이 면에서 천차만별이며 문학을 읽는 것이 단지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 가벼운 독서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 안목과 지식의 기반이 되는 인문분야의 독서인구가 지극히 미미한 것을 고려해 볼 때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p.11)라는 장정일의 독서론에 비춰본다면 한 달에 한 두 권, 그것도 세간에 화제가 되거나 자신의 성취지향적 삶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시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독서인구에서 어정쩡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들에게 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면 어떤 일을 해야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바로 이 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를 권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장정일이 말하는 '사회적 독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개인적 쾌락으로서의 독서를 너머 현실의 수많은 쟁점들과 맞서는 치열한 세계를 경험케 하는 것이다.

문학이든 인문학이든 독서를 통해 현 사회의 문제점들을 들춰내고 함께 고민해 나가는 것이 바로 '사회적 독서'의 의의이다. 이는 <장정일의 독서일기> 6권과 7권 사이에 출간 되었던 <장정일의 공부>와 맥을 같이하는데, 여기서 그는 나이 마흔에 갑자기 공부를 하겠다며 각종 인문학 서적들을 읽고 자신의 색깔(정치적 색깔)을 찾아나갔었다. 결국 그가 갖게 된 색깔이 무엇이든 간에 독자로서 주목할 것은 "원래 공부란 '내가 조금하고' 그 다음에 '당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책을 읽어줄 젊은 독자들이...'여기서부터는 내가 더 해봐야지'하고 발심(發心)하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서문이다. 그의 공부를 이어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심(發心). 장정일은 9번째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에 발심(發心)의 소망을 담아 '사회적 독서'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행군을 부추킨다. 따라서 지난 1권에서 종종 눈에 띄었던 장정일의 독서관, 헌책방 이야기, 독서광 테스트 등 처럼 소소한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들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인권으로부터 시작해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역사 등을 아우르는 이 책은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비판, 근대화와 같은 우리 시대의 주요 논점들을 짚어가며 독자들이 다방면의 인문서적들을 접할 수 있도록 소개할 뿐만 아니라 문학을 통해서도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글들로 가득하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근대화와 관련해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는 것인데, 과연 요즘 세대의 젊은 독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깊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게 주목받고 있는 인권 문제를 상세히 다뤘고, 과학과 생명, 슬럼, 원전, 미디어 파악하기와 같이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까지 고르게 선별해 사회문제 전반을 다뤘다는 것은 '사회적 독서'를 표방하는 이 책으로서 매우 책임감있는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는 사회적 쟁점을 논하면서도 소설가 장정일 답게 문학에 관한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사회적 관점으로 풀어낸 문학도서의 서평과는 조금 다른 성격인데, 예를 들면 세계문학전집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들려주는 서평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에 더해 글쓰기에 관한 <작가가 작가에게>의 서평까지 포함한다면 장정일은 사회적 독서 가운데 짬을 내어 은밀히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삽입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내게 와닿았던 것은 단연 서평에 관한 이야기였다(지금 나는 서평을 쓰고 있지 않은가!). 양심적인 서평을 위해 조지 오웰이 제시했던 몇 가지 해결책 보다는 '서평가란 서평을 쓰는 동안 도덕성이 마비되는 사람'이라는 말이 그동안 써 왔던 나의 서평들을 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장정일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책 뒤에 들어가는 원고지 1~2매의 추천글은 날조고 사기이며 제대로 된 서평을 위해서는 원고지 15매 가량의 충분한 분량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지만 독서와 서평을 병행하는 대다수의 독자(아마도 이 책은 서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읽으리라 예상한다)라면 이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 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 가장 날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황석영의 <심청>이다. '그 냄새가 그리 좋더냐'라는 선정적인 제목도 그렇지만 갖은 문학적 기교를 동원해 욕지거리에 가깝게 비아냥거리는 글의 내용은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만든다. 이 책에 대한 장정일의 글은 실상 황석영의 <심청>이라는 작품에 대한 비난이라기 보다는 이 작품에 찬사를 보낸 서평가에 대한 비난이었다. 비난의 중심은 '모더니티'의 남발이었는데, 모더니티와는 전혀 상관 없는 민족주의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발상에 찬사를 퍼붓는 서평가를 완전히 두드려버린 것이다. 실제로 장정일이 그의 서평에서 뽑아낸 '모더니티'라는 단어의 횟수를 살펴보면 정말 이처럼 모더니티를 남발했는가 싶을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렇게 같은 단어들이 수없이 반복되었다면 일단 주책없는 주례사 비평의 수준을 너머 문장상으로도 서평가가 쓸만한 문장이었을까 의심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비판하는 장정일의 글조차 '막장 서평'이 되어야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도대체 장정일은 무슨 마음으로 이런 글을 썼을까? 날선 서평이라는 자신의 개성을 위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황석영 작가나 황씨 성을 가진 그 서평가와 좋지 않은 사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심청> 바로 다음에 있는 <박근형 희곡집1>에 대한 서평을 읽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본다(이것은 전적으로 '나름대로'이다). <박근형 희곡집1>은 일반적으로 서평집에서는 보기 드문 희곡인데, 이 작품의 대사와 등장인물의 작태를 보니 그동안 장정일이 접해왔던 소위 파격적이고 앞서간다는 작가들의 글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 그가 <심청>에 대해 썼던 농염하고 수위높은 욕지거리들이란 일종의 실험적 서평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역시 결론은 이런 서평이라면 좀 자제해 주시라는 것.

언제부턴가 인문경영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기업 CEO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나 인문 고전 읽기가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기업 홍보의 수단으로 새로운 물망에 오른 것이 인문학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인문학이 마치 자기계발의 수단인 것처럼 간주된다는 것이며, 더불어 취업이나 승진을 위한 스펙의 일종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정일이 역설하는 '사회적 독서'의 취지를 바로 알고 독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의 변화로 눈을 돌릴 줄 아는 미덕이 그 어느때 보다 필요하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가 성공인이 아니라 단지 시민이 되기 위함이면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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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리찌바 에필로그 - 세계화에서 지역화로, 지구를 살리는 창조적 도시혁명
박용남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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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년 전 혈거도시 판탈리카(Pantalica)를 바라보며 문득 뉴욕의 맨해튼을 떠올린다. 가파른 절벽을 따라 도열하듯 모여있는 개구부의 배치도 그렇지만 절벽 내부로 바위를 파내 수직동선까지 갖췄다는 사실에서 오늘날의 마천루와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장면에서 자연을 극복하려던 인간의 의지가 이기적이고 가학적인 욕망으로 변질된 증거를 목격한다. 도구의 인간이 만들어 낸 걸작, 인간지상주의의 인공낙원에는 더이상 자연이 가진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이제 세계의 주요 도시들은 대도시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규모나 밀도 면에서 메가시티(Mega City, 거대도시)에 가까와지고 있으며 도시를 향한 담론은 첨단의 메가시티 안에 어떻게 자연을 삽입하는가에 몰두하고 있다. 즉, 거대 인공물인 메가시티를 고수하면서도 자연까지 회복시키려는 두 마리 토끼잡기에 고심하고 있다는 의미인데,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도시 내의 녹지 조성이나 쾌적하고 아름다운 조경계획만으로는 생태도시로의 여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물론 생태도시에는 자연적으로 녹지가 많이 조성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시스템의 변화 없이 나무만 심어대는 도시계획은 단지 '녹색분칠'에 불과할 뿐이다.

황폐한 도시가 생태도시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요소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생활습관과 경제 시스템의 변화가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꾸리찌바 에필로그>의 주제도 바로 이러한 자생경제이다. 저자가 소개한 다양한 생태도시의 성공사례와 현황, 관계자들과의 인터뷰 등은 현장 보고형 자료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경제성에 관한 진정한 의미를 뒷받침한다. 그동안 기울여 온 노력이 멋진 옷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면 이제는 내구성을 위해 한 올 한 올 직조해 가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꾸리찌바 역시 지루하고 힘든 직조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이제는 어엿이 주목받는 우수 생태도시로 떠올라 우리 삶에 다시 자연을 불러들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생태도시 꾸리찌바의 비밀

꾸리찌바는 브라질 남부 빠라나 주(州)의 주도(州都)로 서울과 유사한 자연환경과 도시개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꾸리찌바를 주목하고 이 도시를 종종 시찰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유사성 때문이며, 현재 서울의 버스노선 계획 역시 꾸리찌바를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꾸리찌바는 새로운 도시개념인 '창조도시'를 목표로 지속가능한 교통시스템, 하천의 친환경적 관리 및 녹지조성, 토건형 문화도시가 아닌 공동체형 문화도시라는 세가지 영역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루었는데, 이 세가지 영역을 추진해 간 동력을 유심히 살펴보면 놀랍게도 막대한 자본이나 첨단기술이 아니라 '유머'에 근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모두가 발전이라 부르는 작업을 역행하는 발상의 전환 또한 재미와 웃음을 신조로 하는 자이메 레르네르 시장의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민 전체에 전달되 공동체로서 환경에 기여하는 기본적 자세를 만들어 갔으며 자연을 위해 불편을 감수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솟아나게 했다. 환경계획의 명칭만 봐도 '쓰레기 아닌 쓰레기' 프로젝트처럼 독특한 유머가 담긴 이름을 가지고 있고, 재활용을 연상케하는 페트병 모양의 버스 정류장 역시 장난기 가득한 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생태도시란 결국 인간 본연의 가장 행복한 삶에 가깝게 다가가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유머'가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 사진설명(좌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 꾸리찌바시의 이과수강 풍경, 버스정류소, 거리의 악사, 곡물과 쓰레기를 교환하는 장면


큰 발자국 vs 작은 발자국

꾸리찌바가 생태도시를 이룰 수 있었던 원리는 단순하다. 그저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기술에 의존하는 태도를 버린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표현하면 '작은 생태발자국'을 가진 '지속 가능한' 도시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비해 '큰 생태발자국'을 가진 우리의 토건 계획을 함께 언급하고 있는 점이 무척 의미심장하다. 특히 정부의 다른 환경정책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견을 덧붙인데 반해 4대강 사업 만큼은 뚜렷하게 비판하고 있어 이 사업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뿐만아니라 개인적으로는 한강에 띄운 플로팅 아일랜드도 환경 차원에서 썩 내키지 않는 프로젝트 중 하나이다. 현재 서울은 도시의 관광수익과 관련된 이벤트성 프로젝트에 너무나 몰두하고 있는데, 청계천 복원도 사실상 야간 조명 아래서만 화려하지 자연스러웠던 옛 서울의 정취를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이렇게 모두 화려하고 거대한 사업에만 몰두하고 그것을 지탱해 나가고 있는 자원과 자연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서울을 곧 테마파크에 지나지 않는 우스꽝스런 도시로 변모할 것이다. 따라서 <꾸리찌바 에필로그>에서 경고하는 '작은 생태발자국'의 중요성은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미래의 희망이다. 만일 이 교훈을 저버린다면 대표적인 녹색분칠의 메가시티요, 한국판 두바이라 불리는 송도 신도시의 실패를 또다시 맛볼 수 밖에 없다.

 * 사진설명(좌에서 우로) : 4대강 사업 현장, 서울 플로팅 아일랜드, 송도 신도시


생태도시와 사랑의 경제

아직 환경과 도시경제의 관계에 대해 대중적인 인식이 자리잡지 않은 상태이지만 저자의 역점은 지역공동체를 활성화 시키는 '사랑의 경제'에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미' 그것을 실행하고 있어 공동체 회원간의 교역활동이 적힌 가계부까지 책 속에 제시할 정도이다. 저자가 대전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밭 레츠(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와 지역화폐 '두루'가 바로 그것인데, 옛날 우리나라의 품앗이나 두레를 연상시키는 공동체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생태도시가 녹색분칠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바로 이러한 경제 시스템의 변혁이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역통화가 도대체 환경과 무슨 상관인가 궁금하다면 경제학자 헤이즐 헨더슨의 '사랑의 경제'에 대해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총생산이 '어머니 자연' 위에 자리잡고 있고, 그것이 GNP나 GDP로 계산할 수 있는 공적영역의 층과 가정과 공동체 내에서 이뤄지는 사적영역의 층으로 구분되는 시스템이다. 지역통화는 바로 사적인 영역 내에 속하는, 어머니 자연과 밀접한 층이며 소소한 농작물을 키워 교역하거나 차를 함께 나눠쓰는 상부상조의 생활공동체를 이룬다. 이미 사랑의 경제를 실천하고 있는 도시들을 보면서 결국 생태도시의 희망은 사람과 사랑의 회복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인공과 자연 사이에 쿠션처럼 존재해 완충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이전에 첨단기술을 사용해 자연을 보호하려던 관리자의 역할에 비해 훨씬 더 위대해 보인다.


감응의 건축에 대한 희망

꾸리찌바는 생태도시로 각광받고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정책주도면에서의 비판도 있고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점들도 산재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을 솔직히 보여주었기에 우리가 생태도시로 출발하는 첫 걸음에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너무 이상적인 모델이 저 앞에 있다면 따라가기에 부담이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에게도 생태도시에 대한 좋은 개념이 있다. 건축가 고(故) 정기용의 '감응의 건축'이 그것인데, 말 그대로 자연에 부합하고 응하는 건축을 뜻한다. 꾸리찌바의 폐광촌 오페라 극장을 보면서 이것이 정기용의 무주 공설운동장 프로젝트와 무척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다 단순한 철골구조와 철이 가진 속성을 활용해 우아한 곡선으로 구조물을 만들었고, 흰색 페인트는 주변의 녹음과 어우러져 조화로운 경관을 자아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질 수 있지 않은가! '감응의 건축'과 맥을 같이하는 여러 도시전문가들과 건축가들의 목소리도 이전부터 환경 문제에 대해 저자와 비슷한 지적을 해왔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생태도시를 위해 개발의 속도를 줄이고 '작은 발자국'을 추진하는 일을 실행해도 좋을 것 같다. 단, 정부의 의지가 이에 보탬이 되어준다면 말이다. 이 책에는 특이하게도 생태도시의 지도자와 행정체계에 대한 분석까지 제시하고 있는데, 사소한 환경프로젝트부터 거시적인 윤곽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결과물들을 보면 수십년간 생태도시에 목숨 걸었던 저자의 노고에 무척이나 감사해진다.

* * 사진설명(좌에서 우로) : 꾸리찌바의 폐광촌 오페라하우스, 무주 공설운동장, 도시계획에 관한 건축가들의 제안(신문스크랩)


10년전 그의 책 제목을 보면 꾸리찌바는 '꿈의 도시'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에필로그'가 '꿈의 도시'를 대신한다. 드디어 우리도 뭔가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리라는 의지이다. 언젠가 저자가 본문을 쓰는 날에는 찌를듯한 수직의 인공도시가 녹색 분칠을 벗고 생얼굴로 수평의 웃음을 씨익 펼치며 '한국 최초의 생태도시'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우리들의 행동하는 사랑 속에 있다.



** 삽입된 이미지 중 서울 플로팅 아일랜드, 무주 공설운동장, 도시계획에 관한 건축가들의 제안(신문스크랩)은 개인소장으로 본 도서에서 발췌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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