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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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인'의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0.8권이라고 한다. 통계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도 있고 조사범주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긴 하지만 이보다 좀 더 많은 수치를 보이는 '직장인' 평균 독서량의 경우도 한 달에 2.6권 정도이다. 또한 분야별로 보면 문학, 자기계발, 실용서가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독서의 폭이나 깊이에 있어서도 그리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문학의 경우 작품의 성격과 깊이 면에서 천차만별이며 문학을 읽는 것이 단지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는 가벼운 독서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를 뒷받침해 줄 안목과 지식의 기반이 되는 인문분야의 독서인구가 지극히 미미한 것을 고려해 볼 때 여전히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시민은 책을 읽는 사람이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무지한 게 아니라, 아예 나쁜 시민이다'(p.11)라는 장정일의 독서론에 비춰본다면 한 달에 한 두 권, 그것도 세간에 화제가 되거나 자신의 성취지향적 삶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시민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독서인구에서 어정쩡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들에게 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면 어떤 일을 해야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바로 이 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를 권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장정일이 말하는 '사회적 독서'의 의미를 이해하고 개인적 쾌락으로서의 독서를 너머 현실의 수많은 쟁점들과 맞서는 치열한 세계를 경험케 하는 것이다.

문학이든 인문학이든 독서를 통해 현 사회의 문제점들을 들춰내고 함께 고민해 나가는 것이 바로 '사회적 독서'의 의의이다. 이는 <장정일의 독서일기> 6권과 7권 사이에 출간 되었던 <장정일의 공부>와 맥을 같이하는데, 여기서 그는 나이 마흔에 갑자기 공부를 하겠다며 각종 인문학 서적들을 읽고 자신의 색깔(정치적 색깔)을 찾아나갔었다. 결국 그가 갖게 된 색깔이 무엇이든 간에 독자로서 주목할 것은 "원래 공부란 '내가 조금하고' 그 다음에 '당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 책을 읽어줄 젊은 독자들이...'여기서부터는 내가 더 해봐야지'하고 발심(發心)하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서문이다. 그의 공부를 이어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심(發心). 장정일은 9번째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에 발심(發心)의 소망을 담아 '사회적 독서'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행군을 부추킨다. 따라서 지난 1권에서 종종 눈에 띄었던 장정일의 독서관, 헌책방 이야기, 독서광 테스트 등 처럼 소소한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들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인권으로부터 시작해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역사 등을 아우르는 이 책은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비판, 근대화와 같은 우리 시대의 주요 논점들을 짚어가며 독자들이 다방면의 인문서적들을 접할 수 있도록 소개할 뿐만 아니라 문학을 통해서도 사회를 통찰할 수 있는 글들로 가득하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근대화와 관련해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는 것인데, 과연 요즘 세대의 젊은 독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이 깊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사회과학 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게 주목받고 있는 인권 문제를 상세히 다뤘고, 과학과 생명, 슬럼, 원전, 미디어 파악하기와 같이 (상대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까지 고르게 선별해 사회문제 전반을 다뤘다는 것은 '사회적 독서'를 표방하는 이 책으로서 매우 책임감있는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는 사회적 쟁점을 논하면서도 소설가 장정일 답게 문학에 관한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사회적 관점으로 풀어낸 문학도서의 서평과는 조금 다른 성격인데, 예를 들면 세계문학전집의 구성에 관한 이야기,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를 통해 들려주는 서평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에 더해 글쓰기에 관한 <작가가 작가에게>의 서평까지 포함한다면 장정일은 사회적 독서 가운데 짬을 내어 은밀히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삽입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특히 내게 와닿았던 것은 단연 서평에 관한 이야기였다(지금 나는 서평을 쓰고 있지 않은가!). 양심적인 서평을 위해 조지 오웰이 제시했던 몇 가지 해결책 보다는 '서평가란 서평을 쓰는 동안 도덕성이 마비되는 사람'이라는 말이 그동안 써 왔던 나의 서평들을 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장정일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책 뒤에 들어가는 원고지 1~2매의 추천글은 날조고 사기이며 제대로 된 서평을 위해서는 원고지 15매 가량의 충분한 분량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지만 독서와 서평을 병행하는 대다수의 독자(아마도 이 책은 서평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읽으리라 예상한다)라면 이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 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서 가장 날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황석영의 <심청>이다. '그 냄새가 그리 좋더냐'라는 선정적인 제목도 그렇지만 갖은 문학적 기교를 동원해 욕지거리에 가깝게 비아냥거리는 글의 내용은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만든다. 이 책에 대한 장정일의 글은 실상 황석영의 <심청>이라는 작품에 대한 비난이라기 보다는 이 작품에 찬사를 보낸 서평가에 대한 비난이었다. 비난의 중심은 '모더니티'의 남발이었는데, 모더니티와는 전혀 상관 없는 민족주의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발상에 찬사를 퍼붓는 서평가를 완전히 두드려버린 것이다. 실제로 장정일이 그의 서평에서 뽑아낸 '모더니티'라는 단어의 횟수를 살펴보면 정말 이처럼 모더니티를 남발했는가 싶을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렇게 같은 단어들이 수없이 반복되었다면 일단 주책없는 주례사 비평의 수준을 너머 문장상으로도 서평가가 쓸만한 문장이었을까 의심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비판하는 장정일의 글조차 '막장 서평'이 되어야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도대체 장정일은 무슨 마음으로 이런 글을 썼을까? 날선 서평이라는 자신의 개성을 위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황석영 작가나 황씨 성을 가진 그 서평가와 좋지 않은 사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심청> 바로 다음에 있는 <박근형 희곡집1>에 대한 서평을 읽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본다(이것은 전적으로 '나름대로'이다). <박근형 희곡집1>은 일반적으로 서평집에서는 보기 드문 희곡인데, 이 작품의 대사와 등장인물의 작태를 보니 그동안 장정일이 접해왔던 소위 파격적이고 앞서간다는 작가들의 글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떠오른 생각. 그가 <심청>에 대해 썼던 농염하고 수위높은 욕지거리들이란 일종의 실험적 서평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역시 결론은 이런 서평이라면 좀 자제해 주시라는 것.

언제부턴가 인문경영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기업 CEO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나 인문 고전 읽기가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기업 홍보의 수단으로 새로운 물망에 오른 것이 인문학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은 인문학이 마치 자기계발의 수단인 것처럼 간주된다는 것이며, 더불어 취업이나 승진을 위한 스펙의 일종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장정일이 역설하는 '사회적 독서'의 취지를 바로 알고 독서를 통해 현실과 사회의 변화로 눈을 돌릴 줄 아는 미덕이 그 어느때 보다 필요하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이유가 성공인이 아니라 단지 시민이 되기 위함이면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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