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최진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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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도서출판계는 부고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흉흉한(?) 세상이었다. 혹자는 시가 죽었다 했고, 혹자는 철학이 죽었다 했으며, 좀 더 광범위하게 문학이 죽었다, 인문학이 죽었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세간에 떠도는 부고들의 종결자가 나타났으니, 아예 '책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셔먼 영이다. 셔먼 영은 서구 여러나라들의 참담한 독서실태를 고발했을 뿐만 아니라 시장의 요구에 맞춰 일종의 상품처럼 출간된 '안티 책'의 문제점도 지적하는데, <불온한 인문학> 역시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국내 인문도서 현황을 분석하면서 우리 인문학의 현주소를 진단한다.

 

구전민요처럼 들어왔던 '인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2011년 현시점에서 볼 때 더이상 유효한 것 처럼 들리지 않는다. 올해 베스트 셀러 순위 100위 안의 도서들을 보면 인문학 도서가 9권이 들어있고, 200위 안에서는 21권 정도가 된다. 이는 외국어 교재 및 아동도서를 포함한 총 순위로 전체 10개 남짓한 도서분야의 숫자와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문학분야의 강세를 고려해 볼 때 그런대로 괜찮은 실적이다. 뿐만아니라 작년도 <정의란 무엇인가>와 올해 <닥치고 정치>의 히트까지 포함하면 오히려 '인문학이 부활했다'는 말이 신빙성있게 들릴 정도다. 그러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성급히 축포를 터뜨릴 일은 아니다. 이른바 인문학 베스트셀러에 속해있는 도서들을 보면 진정한 인문학의 깊이를 추구한다기 보다는 마음을 달래주고 막막한 인생길에 조언을 보태주는 에세이 형식이 더 많다. 또한 쉽고 즐거운 입문서들도 빼놓을 수 없는 인기 도서들이다. 물론 인문학이 대중들에게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이들이 가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른바 '행복'이나 '위로' 혹은 '지식충전'을 표방하는 현재의 인문학은 자기계발화, 상업화, 고급문화화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며 인문학의 참다운 발전은 커녕 소비주의와 권력의 통제 속에 귀속되어 본질마저 혼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더해 각 기업에서 앞을 다퉈 홍보하는 '인문경영'의 실체는 학문을 통해 상상력을 극대화하고 풍부한 창의력을 갖춘 인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스펙 갖추기 열풍에 일조할 뿐이다.

 

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p.83)

 

<불온한 인문학>이 추구하는 인문학은 강박적인 소비에 끌려가지 않으며 휴머니즘이나 문화주의와 같은 목적론을 거부하는 반(反)인문학이다. 더이상 '정신문화' 창달과 같은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지원에 충실한 인문학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다. 인문학이란 흔히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고 불려지며 영어의 표기를 보아도 'Human Science'나 'Humanities'에서 '인간'이라는 의미가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인문학에 내재된 휴머니즘(Humanism)도 바로 여기서 파생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인문학이 자리잡게 된 데에는 야코프 브르크하르트라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저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것이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면서 인문학은 결국 권력에 종속된다. 실상 인문학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르네상스의 '스투티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란 문법, 수사학, 역사학, 시학, 도덕철학 등과 같이 법학이나 신학을 제외한 과목들을 일컫는 교과개념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이처럼 인문학의 기원에서부터 그것이 권력에 의해 채택되고 '이용'되어온 사실을 낱낱이 밝히며 인문학 본연의 역할에 대해 재고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인성을 도야하기 위해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는 말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이것 역시 국민들을 규율로 '훈육'시키려는 권력자의 음모의 일환이다. 반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인문학이란, 그리고 인문학의 지향할 자세란 '횡단'의 성격를 내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진경의 글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은 이 책의 중요한 핵심을 담은 장이며 매우 치밀한 논리로 우리가 알고 있던 학제적 교류, 통섭, 소통 등에 대해 일격을 가한다. 그는 한때 화두였으며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는 통섭적 연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데, 통섭적 연구란 환원적인 방법론일 뿐이며 오히려 모든 학문을 자연과학적 방법 안에 포섭하려는 '통합'의 절차, 정치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전략의 일환일 뿐이라 주장한다. 더불어 '횡단'이란 계급과 여성조직, 인간과 도롱뇽처럼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이 만나고 이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시야내로 들어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생생하게 역설하며, 인문학이 갖는 보다 강력한 정치적 의미와 만나게 한다.

 

인문학의 기원과 이를 둘러싼 권력과의 관계, '횡단'을 통해 권력에 도전하는 불온한 인문학의 잠재성, 그리고 불온한 인문학의 일환인 현장 인문학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은 새로운 인문학의 면모를 엿보게 하며, 매우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장애인, 재소자, 탈성매매 여성 등이 인문학에 열정을 가지고 참여하는 모습과 그들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유너머N 연구진들의 정성에는 진정성이 가득한 아름다운 '횡단'의 실체가 담겨있다.

 

우리가 장애인, 재소자, 탈성매매 여성, 외국인 노동자, 노숙인, 철거민과 함께 인문학을 하려는 이유는 그들의 강팎한 영혼을 인문학으로 위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처한 비인간적인 처지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게 말들기 때문이다. 법의 바깥, 국민의 바깥, 시민의 바깥, 정상인의 바깥, 합리적 개인의 바깥에 내쳐진 날것의 삶에서 어떤 탈-휴머니즘적 인간과 인간학이 생성하는지 사유하고 실험하고 발명하기 위해서다. 현장 인문학은 인문학을 가지고 현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현장'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다.(p.187)

 

그러나 불온한 인문학을 성립시키는 정교한 논리와 현실에서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있다. 먼저, 인문학이 항상 불온해야하고 권력의 밖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문학이 권력 내에서 순기능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견해이다. 또한 인문학을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으로만 연결시켜 인문학이 가지는 다양한 면모들을 축소시켜버렸고, 논리의 성립을 위해 인터내셔널이나 횡단과 같은 용어들을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해 버렸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마르크스의 '인터내셔널'에 독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인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 단어를 제국주의적 침략의 수단으로 치부해 버렸고, 횡단의 경우 통섭과의 차별성을 설명하기 위해 무수한 증명을 펼쳐보였으나 정작 통섭이 환원주의라는 것에 대한 사회생물학자들의 반론은 아예 반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자(들)의 주장은 권력자와 피지배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논리가 되고 말았으며 이는 인간과 도롱뇽처럼 전혀 만날 수 없는 것들을 조우시키기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모순이 아니였나 생각해 본다.

 

인문학은 부유한 자를 위해서도, 가난한 자를 위해서도 존재하는 학문이다. 아니, 어쩌면 인문학을 통해 빈부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불온한 인문학을 통해 권력과 가진 자들의 음모와 통제를 꿰뚫어 보고 그것에 저항한다는 의도에는 공감하지만 좀 더 시야를 넓혀 인문학 전반의 균형잡힌 모습과 우리 인문학의 미래에 대해 논하는 장이 되었다면 저자(들)의 철학적 사유의 정교함이 더 빛나고 유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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