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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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란 참 독특한 건물이다. 덩치는 크지만 내부는 대부분 텅 비어있고 모든 공간은 흐름을 전제로 존재한다. 이는 밀집과 머묾을 기본으로 하는 일상의 아파트, 학교, 사무용 빌딩과는 확연히 다른 유형의 공간이다. 오죽하면 어떤 건축가는 미술관을 가리켜 '텅 빈 상자의 연속'이라고 불렀을까! 그러나 미술관의 텅 빈 공간에도 엄연한 점유자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빛이다. 빛은 미술관 곳곳으로 스며들어 주인장의 이름으로 잠들어 있는 신화를 깨우고, 역사에게 이야기를 재잘거리게 하며, 인물들의 눈동자를 반짝이게 한다. 그리고 때론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통해 내부로 흘러 들어와 미적체험의 순간을 선사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 순간이 물리적 흐름을 떠나 감상자로서 예술적 흐름으로 편입하는 교차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림으로부터 충격을 받아 전율하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오랫동안 떠날 수 없는 극적인 경험들을 예술과 만나는 순간, 즉 예술의 흐름속에 빠지는 순간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심미안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에게 해당될 뿐, 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수의 범인들은 어떻게 미술을 감상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이 '지식'이다. 심미안은 선천적인 재능과도 같아서 노력한다고 반드시 얻을 수 있는 능력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식을 갖추고 사유하기에 힘쓴다면 그림을 보는 눈이 조금씩 열리기를 기대할 수 있다. 한편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라도 지식이 없다면 직관으로 얻은 감동을 하나의 탁월한 가치로 승화시키거나 재구성할 수 없다. 이렇게 미술감상에서의 지식의 역할과 심미안(직관)의 역할을 구분해 보는 것은 이 책을 읽어나가는 출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직관을 실에, 지식을 구슬에 비유하고 있는데, <지식의 미술관>은 우리들에게 구슬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심미안을 갖게 해준다는 허황된 약속은 하지 않는다. 다만 지식이 미적체험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지식을 통해 사유를 확장해 나가는 가이드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매우 솔직한 면이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지식은 낱낱의 정보 한 톨로부터 시작된다. 개별적으로는 별 것 아닌 것 같고, 이를 통해 대단한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쌓이다 보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눈송이처럼 부지불식간에 모여 커다란 힘의 근원이 된다. 이 책에도 정보형 지식이 상당히 담겨있는데, 키아스쿠로, 데칼코마니아, 디 소토 인수와 같은 용어를 비롯해 인상파와 튜브물감, 위작, 스탕달 신드롬 처럼 흥미를 유발하는 곁다리 이야기들이 가미되어 소소한 정보와 함께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보들은 그림에 얽힌 역사, 종교, 문화에 관한 이야기들로, 결코 가볍게 읽어 넘길 수 없다. 뿐만아니라 <지식의 미술관>에는 18세기 이전의 명화들이 상당수 소개되기에 그림을 통해 시대를 읽는 힘 또한 기를 수 있다.예술가의 방, 혹은 경이의 방을 뜻하는 쿤스트카머는 유명화가의 걸작에 속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역사적 지식을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은 그림이다. 온갖 진귀한 것을 모아놓은 이 수집품들은 당시 서구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나타내는 척도였으며, 단순히 특산물이나 외국의 풍경, 진귀한 동물들을 백과사전식으로 모아놓은 것 같아도 이면에는 경험주의 철학의 등장과 기득권자들의 특권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배경이 흐르고 있다.

 

 

 

<지식의 미술관>에서 가장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알레고리'에 관한 작품들이다. 알레고리란 '다른 이야기'라는 뜻으로 겉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가 내포되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알레고리를 해독하는 재미가 16~18세기의 명화들을 감상하는데 큰 몫을 차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알레고리'하면 빈번히 등장하는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부터 신앙의 알레고리, 바니타스 알레고리, 문법의 알레고리 등 상징을 통해 그림을 읽어나가는 방법과 이들을 통해 총체적으로 가치를 통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알레고리를 보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말한 '인생이란 초콜렛 상자와 같다'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마치 예측할 수 없는 초콜렛을 꺼내는 것처럼 그림속에 숨어있는 상징들을 발견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콜렛을 다 꺼내 먹어야 한 상자가 어떤 맛의 컨셉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림도 모든 상징들을 다 발견해야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음미할 것은 한 병의 포도주와 같은 지식들이다. 포도주는 생포도를 원료로 하지만 알콜과 배합되고 숙성되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형(transform)된 음료인 것처럼 지식에서도 하위지식(정보)을 원료로 전혀 다른 경지의 맛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특별히 낱알같은 사소한 지식에서 한 묶음의 초콜렛 같은 지식, 그리고 차원을 달리하는 포도주같은 지식으로 확장되며 진행하는 책은 아니지만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대를 오가며 새로운 시각을 접목시키고 숙성시켜 나간 흔적은 책 속에서 빈번히 접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의 창작법인 데페이즈망(낯설게 하기)에서 비즈니스 세계의 데페이즈망을 연관시키기도 하고, 오감도(五感圖)가 성행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여성 누드화와의 관계를 찾아내기도 한다.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키스>는 남성 안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화해한다는 깊이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남녀 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우게 된다.

 

가부장 사회에서는 성 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기 때무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중략)...따라서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은 시종일관 억압된다.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이기도 한 것은 그것이 남성 안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녀 화해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넘어 이렇듯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이 그 반대의 정체성과도 화해를 하는 것이다.(p.129~130)


<지식의 미술관>은 미술 입문서라고 부르기엔 조금 특별한 책이었던 것 같다. 일단 시대나 사조별로 그림을 나누거나 몇 가지 주제를 통해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려는 책이 아니었던 까닭도 있고,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양한 지식을 종횡무진 하며 사고를 확장해 가는 것이 신선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아니라면 '빅토리안 페인팅과 영화', '반달리즘과 미술'같은 주제의 글을 만나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미술의 중심 키워드라 여기기엔 조금 부족한 사냥감 그림, 트롱푀이유, 미술품 약탈(엘기니즘) 등의 이야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는 점인데, 역시 다른 책에서는 진지하게 살펴볼 기회가 흔치 않으므로 이 책을 통해 읽어보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통념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뛰어난 심미안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감식안을 가지고 큐레이터나 비평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미술에 대한 지식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익한 감상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그림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도 좋지만 어떤 그림에서든 자기만의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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