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직업의 역사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8
이승원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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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고 평생 깡통만 만졌어. 깡통 재질이 변하는 거나 뚜껑 여는 방식이 달라지는 걸 보면서 세상이 점점 살기 편해진다는 걸 느꼈지. 깡통 포장 디자인이 바뀌는 걸 보면서 사람들 취향이 변해가는 걸 알았어. 사람들 입맛이 달라지는 건 새로 통조림이 생기거나 양념 맛이 달라지는 걸로 실감했어. 말하자면 이 깡통으로 세상을 알아 간 셈이야.


편혜영의 단편집 『저녁의 구애』 中 <통조림 공장>, 221쪽


 

산업화와 기계화의 전반부에 태어나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가는 것을 들어보자면 통조림이 있다. 물론 통조림이 그 때 그 시절처럼 병문안이나 명절선물의 인기품목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통조림 공장에는 통조림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배웠다고 자부할 만큼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이 몇 명쯤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전화교환수, 변사, 기생, 전기수 등 9개의 직업에서 일했던 사람들도 소설 속의 공장장과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비록 냉정한 역사가 이 직업들을 필요로 하지 않은 방향으로 발전해 갔고, 직업의 태생 자체도 제약이 많거나 평생을 일할 만큼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힘겨운 직업들 역시 우리에게 들려 줄 세상사가 있다. 근대의 욕망으로 태어났으나 더 큰 욕망으로 힘없이 사라진 9개의 직업들은 일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사고방식, 그리고 경제적 메커니즘의 성장통을 밑바닥에서 고스란히 겪어왔기 때문이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서...전화수, 물장수, 인력거꾼
근대화에서 눈에 띄게 변화한 것은 '기계'의 출현이다. 기계는 많은 사람들의 직업을 앗아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직업을 생산해 내기도 했고 혹은 직업의 형태를 진화시키기도 했다. 전화수의 경우 기계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직종이었다. 전화기는 처음부터 각 가정의 기계만으로 통화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중간에 연계자가 필요했는데, 송신자와 수신자를 연결해주는 기계 앞에 앉아 자신도 기계의 일부가 되어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전화수들이다. 또한 이들은 피크타임에는 무려 210통화라는 반복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동시에 서비스직으로서 진상같은 고객들까지 감당해야 했던 감정노동의 시조격이기도 하다. 물장수는 힘만 좋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직업 같지만 의외로 까다로운 점이 많았다. 물이란 게 먹거리의 기본이고 보건위생과도 직결되는 부분이 많아 철저한 관리가 필요했고 물을 퍼다 팔 수 있는 급수권, 자리권의 문제를 비롯 독점과 같은 시장의 문제와도 직면해야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1908년 이후 근대식 수도가 개통되면서 물장수들은 한차례 큰 변화를 겪었는데,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어이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물밀매까지 성행했다. 그렇다면 인력거꾼이라고 평이한 직업의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인력거꾼도 물장수처럼 힘 좋고 발 빠르면 그만이라 생각하겠지만 단발령에 항의하기도 하고 조합을 만들기도 하며 최하층민의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뿐만 아니라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고 3천명의 인력거꾼들이 단결한 가운데 박봉을 모아 자식들의 학교를 설립한 일화는 하층민들의 비장한 삶의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점점 더 기계화 되어갔다. 그리고 전화수는 통신 자동화의 속도에, 물장수는 거대한 수도 시스템의 흐름에, 인력거꾼은 희대의 발명품 자동차에게 생존의 수단을 빼앗겼다. 물론 현재는 고객센터 상담원이나 택시운전사 같이 이전 직업의 진화된 형태로 볼 수 있는 새로운 직업들이 생겼지만 이들이 가난과 비인간화에 맞서가며 초석을 놓은 노동자의 권리 투쟁은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고귀한 결실이었다.
 

강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기생, 유모, 여차장
근대화가 이뤄지면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바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다. 물론 그 당시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도 않았고 숫자도 지금보다 훨씬 적었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커다란 변동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들 중 기생은 사실 고려시대부터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주로 왕이나 고관대작을 상대했으므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매춘부와는 전혀 다른 격이다. 기생에는 여러 층이 있어서 최고의 기생 ‘예기(藝妓)’는 말 그대로 문화예술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이미 1927년, 전난홍이라는 기생이 '기생도 노동자'라는 주장을 했다고 하니 자부심마저 대단한 듯하다. 여성 직업인으로서 요구되는 자격은 유모에게 있어서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유모를 두는 가정이 주로 부유층이었고 아이의 교육과도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차장의 경우 그나마 자격조건이 크게 까다롭지 않은 편이어서(하지만 그 때에도 '어느 정도' 예뻐야 했음은 오늘날과 같다) 경쟁률이 대단했지만 교통사고와 소매치기의 위협, 더 심각하게는 성희롱과 성폭력에 노출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이란 순수한 여권신장을 의미하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여성을 값싼 노동력이나 구색 맞추기의 일환으로 여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으로 여성이 진출하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부유계층을 통해 주어진 자격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격하되어 갔다. 하지만 여성들에게도 꿈이 있었다. 비록 사회의 약자에 해당하는 위치에서 남성들로부터 부당하고 억울한 취급을 받았지만 경제권이라는 비밀의 열쇠를 향해 묵묵하게 인고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여권신장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낮은 곳으로부터 솟는 활력...변사, 전기수, 약장수
유럽을 거닐다 보면 길거리 예술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마술쇼, 때론 춤을 선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근대 풍경 속에서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이 풍경의 주인공들이 바로 전기수와 약장수이다. 전기수는 한 마디로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다. 해외의 경우 전기수는 노동자들의 위안이 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는 담배가게, 약국, 주막 등을 무대로 낭독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이동 도서관의 역할도 했으며 전기수들 여럿이서 무리를 지어다니는 기업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약장수들은 악기연주나 서커스로 호객행위를 하며 팍팍했던 시절 일상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이너 역할을 (본의 아니게) 했다. 그러나 의약품 또한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이들의 호객행위 보다는 불법 매약행위가 더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의료기관과 약품이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반가운 이동약국이 되어주기 보다는 짝퉁 약품으로 그들을 등쳐먹던(?) 약장수. 그들의 약을 사먹느니 차라리 호객행위만 바라보는 것이 건강에 더 도움이 될 듯싶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무성영화에서 대사를 읊어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변사는 마치 오늘날 영화스타에 준할 정도로 인기있는 연예인이었다. 또한 변사의 전성시대에는 각 변사마다 전문적으로 맡아 하는 영화의 장르도 분화되어 있었고, 극장들은 변사 모시기에 열을 올릴 만큼 대단한 위치였다. 하지만 영화산업이 발달하면서 그들의 연기나 막간 엔터테인먼트는 삼류 취급을 받기 시작했으며 영화를 즐기는 지식인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변사의 비중은 영화산업의 발달 가운데 변화를 겪었으며 유성영화, 칼라영화, 3D, 4D로 진화하는 가운데 어느덧 우리 기억에서 잊혀졌다.
 
비록 서민들의 문화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묘기요, 음악이었겠지만 이들로 인해 거리가 활력에 넘쳤음에는 틀림이 없다. 지나치다 곁다리로 듣는 음악, 그러다가 둘러보는 짝퉁 물건들, 이것이 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던가! 변사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마니아인 지식들이 보기엔 이류, 삼류에 해당하지만 자신의 직업적 본분을 다하기 위해 열정적인 막간연기를 펼치고 사랑과 박수를 얻어내는 모습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흥겨움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킨다. 이들이 아니었더라면 가난하고 무료하고 지친 삶에 위안이 되어줄 것이 또 무엇이 있었을까!


 

<사라진 직업의 역사>는 근대의 문화와 일상을 대표하는 직업들을 통해 시대상과 사람들의 의식, 경제 메커니즘을 통찰하려 했다. 그리고 기대 이상으로 직업들에 관련된 법률, 노동에 대한 관념, 언론으로부터의 시선, 부작용과 돌발적인 에피소드들을 볼 수 있어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관련된 영화와 문학, 사료 등을 통해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갔으며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기사들을 제시해 마치 그 날의 신문을 읽는 것처럼 과거의 시간에 푹 빠져들었다. 비록 근대의 수많은 직업들 중에서 거대한 경제의 흐름을 다스리는 선망직업도 아니요, 오직 생활고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의 9가지 직업이었지만 그 직업에 종사했던 이들의 애환과 치열한 삶, 그리고 그들이 비춰내는 일상을 통해 역사책에 등장하지 않는 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어 유익했다. 역사란, 작은 것들을 밀어낼 수 있지만 삶이란, 그 어떤 큰 것이라도 담아내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사라진 직업들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무척 의미있는 일이다. 요즘처럼 평생직장의 개념이 흔들리고 이전에 없이 비정규직이 증가하는 시점에서, 직업들의 탄생이 빈번해지고 또 죽음과 변화마저 빈번해지는 상황에서, 직업이란 무엇인지, 거대한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지 진지하게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이후로 나와 직업을 동일시하는 사고방식이 만연했었다. 물론 이것은 성공지향적인 사회풍조 때문에 더 왜곡되어 두드려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직업이 없거나 내 직업이 사라질 경우 내 존재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한편으론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라진 직업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삶이 답해줄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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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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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좋은 답변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 대체적으로 좋은 질문이란 그 출발점에서부터 낯선 세계를 탐색하며 생성되기 때문이다. 익숙한 세계에 대해 '왜?'라고 이유을 묻는 것은 좋은 질문에 속한다. 미지의 무엇이나 가치있는 무엇에 대해 탐색케 하는 질문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얄궂게도 좋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좀처럼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도 답변의 문은 견고한 듯 잠잠하기만 하다. 그래서 좋은 질문들은 대체적으로 익숙한 삶 가운데 잊혀진다.

 

'잊혀진 질문들'은 결코 의지에 의해 떨쳐진 것이 아니기에 우리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질문들이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잊혀져 있지만 다시 발굴되게끔 되어있는'(p.10) 질문들인 것이다. 따라서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이하 <잊혀진 질문>)은 우리가 완결하지 못했던 좋은 질문들을 소환하고 이들과 재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좋은 질문들'이란 개인의 가치와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특히 위기와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떠올릴만한 질문들과 궁극적인 삶의 목적과 희망을 구하는 질문들을 중심으로 '좋은 질문들'을 구성하였다.

 

사실 <잊혀진 질문>은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 목록에서 시작되었다. 사연인즉, 1987년 이병철 회장이 박희봉 신부에게 보낸 질문지가 적임자로 채택된 정의채 몬시뇰에게 넘겨졌는데, 이병철 회장과 정의채 몬시뇰의 만남이 주선된 상황에서 이 회장이 갑작스레 타계한 것이다. 이후 이 질문지는 오래도록 잊혀졌다가 다시 차동엽 신부(이 책의 저자)에 의해 답변이 시도되고, 그는 故 이병철 회장의 질문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될 수 있도록 약간의 구조조정을 거쳐 새롭게 정리했다.

 

책 속에는 이병철 회장의 질문 원본이 수록되어 있어서 너무도 궁금한 마음에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일단은 정성스레 써 내려간 가지런한 손글씨에 놀랐고, 다음으로는 24개의 문항 모두가 종교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에 놀랐다. 세상에서 가질 것은 다 가진 이병철 회장이 무엇이 아쉬워 종교에 대해 이토록 많은 질문을 품었을까? 이런 것을 보면 샐러리맨인 옆집 아저씨나 대기업 회장인 이병철이나 인생의 궁극성 앞에서는 별반 차이 없이 평등한 듯 싶었다. 질문 중에는 '영혼이란 무엇인가?'처럼 상당히 근원적인 질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볼만한 신과 종교에 관한 질문들이며 어떤 질문들은 천주교도라면 쉽게 답할 수 있을만큼 간단한 질문들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병철 회장이 그 질문들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면밀히 정리해냈다는 점이며, 이것은 기어이 답변을 찾아보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보인다. 물론 그가 세상에서 쌓은 부와 이에 관한 비리를 생각해 볼 때 일반인들보다 더 절실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질문에 향한 자세에만 국한해 본다면 그의 치밀함과 결단력은 본받을만 하다.

 

<잊혀진 질문>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병철 회장의 질문 중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당면문제와 맞닿는 것들을 선택해 새로이 구성한 것이다. 좀 더 간략히 말하면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 어떻게 희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런 주제는 이미 너무 흔하다. 자기계발서뿐만 아니라 심리학, 철학에서도 넘쳐나는 것이 '희망'이나 '위로'인데, 굳이 이병철 회장의 질문까지 곁눈질해 가며 찾을 필요가 있을까? 이에 대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이다.

 

이 책은 삶의 목적이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신(神)'의 지혜를 빌고자 하므로 천주교인이나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 상당히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인드맵 코치나 심리학자, 철학자가 들려주는 답변과는 다른 종류의 내용일 것이다. 비록 종교적인 색채가 강해 일부 무신론자들에게는 불편한 내용이 될 수도 있지만 부당하고 절망적인 세상에 대해 '왜?'냐고 묻는다면 그저 불평등한게 세상이니까, 확률에 의한 결과이니까라는 체념의 결론을 내리는 것 보다 신을 통해 의미있는 답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신의 존재 여부와 그의 뜻에 대해 가졌던 여러가지 의문에 관해서도 과학과 철학과 말씀(경전)을 아우르는 답변들을 가급적 쉽게 말해주고 있으므로 평소 신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면 간략하게나마 천주교나 기독교의 입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데 있어서 염두에 둘 것은 신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죄(罪)'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를 예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아는 죄는 법이나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을 의미하지만 천주교가 말하는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을 의미하며 그 기준은 신, 혹은 신의 말씀이다. 만일 어떤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탈세도 하지 않고, 고용인들을 착취하지도 않으며, 기부까지 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업을 한다고 하자. 그가 사업을 통해 대단한 부를 누리는지의 여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어느날 신께서 그에게 공부를 하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이 사업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공부할 시기는 훌쩍 넘어섰고 너무도 예상치 않았던 것이었기에 실행으로 옮기지 않는다. 이런 경우,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선하고 존경받을만 하지만 신의 기준으로 보면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이처럼 신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에는 차이가 있으며 역사를 바라볼 때 시대의 눈을 가져야 하는 것 처럼 신을 바라볼 때에도 기준의 조절이 필요하다.

 

차동엽 신부의 스승의 스승이되시는 故 최민순 신부의 자작시는 사랑의 본질과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시(詩)이지만 이 시를 통해 관점의 변화가 갖는 위대함 또한 설명할 수 있다.

 

꽃을 본다.
꽃의 아름다움을 본다.
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p.216)


현재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절망과 원망의 관점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꽃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싸워야 할 적'이라는 관점으로 바꾼다면 '꽃을 본다'고 할만큼의 제정신은 차릴 수 있다. 더 나아가 마음 속의 분노를 거둬내고 위기를 기회라는 관점으로 바꾼다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행복, 즉 '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대체적으로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의 한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꽃의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는 관점이란 어떤 것일까? 그 답은 이 책 속에 있다. 그리고 저자가 역설하고자 하는 '희망'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희망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새로운 관점의 희망이 될 것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는 이생에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울고, 웃으며 세월을 보낸다. 그러는 동안 한때 품었던 좋은 질문들은 잊혀지고 결국 마지막 순간 문득 생각나는 것이 후생에 대한 질문인데, 이병철 회장의 예화에서처럼 그 때가 되면 너무 늦을 수도 있다. 이미 철저한 무신론자나 유신론자가 아니라면 <잊혀진 질문>을 통해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신과 그가 주는 생(生)의 의미에 대해. 어떤 결론이 나든지 죽음에 임박해서 구하는 것보다는 낫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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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 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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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허기질 땐 바다로 간다. 끊어질 듯 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갈라질 듯 마른 입술을 앙다물고. 그리고는 무한히 넘실대는 바다의 잔을 온 몸으로 들이키며, 벌건 육즙이 뚝뚝 듣는 일출까지 기다렸다가 게걸스레 삼켜버린다. 아침이 되면 바다는 조금도 줄지 않았고 태양은 날쌔게 하늘 위로 솟아 있는데 어째서 포만감은 이리도 충만한 것일까! 모래 사장에 남겨진 빈 소주 한 병은 아무런 단서도 되지 않는다.

 

허기진 인생에 대해 바다는 늘 이런 식으로 채워주곤 했다. 그래서 바다는 마르지 않는 신비의 충전소라 생각했으며, 고독의 순도를 높여 절망에 탁해지지 않는 법을 연마하는 훈련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변했더라. 이제는 나와 독대하지 말고 좀 더 윤택하게 허기를 다독이라고 말하더라. 바로 21세기형 자산어보라 부르는 이 책을 통해.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가 알려주는 일차적인 해법은 진정으로 먹는 것이다. 먹거리에는 숭어의 위(위장), 군소, 거북손, 노래미처럼 평소 뭍에서는 쉬 먹을 수 없는 해산물들도 있고, 삼치, 참돔, 홍합처럼 흔히 먹을 수 있는 해산물들도 있는데, 다들 어찌나 신선해 보이는지 생기의 광채가 유난히 밝다. 투명하고 먈먈한 살갗을 빛내며 가지런히 누워있는 회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찜통 뚜껑을 막 열었을 때의 '훅~'하는 바다내음이 나는 삶은 해산물과 얼큰하게 바글거리는 생선탕까지, 지지고, 볶고, 무치고, 구워도 생기는 끝내 가시지 않는다. 천 만번을 부서져도 다시 일어나는 파도처럼 해산물의 생기는 그 어떤 양념과 조리법에도 끄떡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타고 올라 더욱 생생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가장 원초적인 바다내음을 품은 성게알을 밥에다가 썩썩 비벼먹고, 병어회에 구수한 된장을 구성지게 찍어 입 안으로 집어 넣는데, 니들이 고등어를 아느냐! 섬에서 먹는 고등어는 뭍것들과 격이 다르니라 하며 고등어가 의기양양하게 끼어든다. 뭍에서 겪었던 비릿한 시간들일랑 잊으라고, 그것은 너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일러주는 듯했다. 오! 즐거운 날것들의 향연이여, 맛 뿐만 아니라 가르침마저도 훌륭하구나!

 

그러나 연이어 펼쳐지는 해산물 잔치는 단순히 미식기행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이 책은 <허기질 때 바다에 가라>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인생'의 허기에 대한 본격적인 해법은 날 것과 맨 손과의 만남, 그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제 손으로 낚시줄과 그물을 드리워 기다리고 끌어 올려 생명의 꿈틀거림을 촉각으로 각인시키고 아가미의 마지막 한 호흡을 숨죽여 바라보며 상하지 않은 또렷한 눈동자를 맞받아 응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다의 생기를 나의 감각으로부터 삼키우고 '쌩(生)'의 의미로 마음을 떠먹이는 인생 허기해소법의 시작이다. 그런가하면 잡아 올린 날것들을 제 손으로 손질하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게 배부른 명상이다. 유선형의 세계에 담긴 오묘한 생명의 지형도를 따라 경건한 손길로 비늘을 긁어내고, 배를 갈라 필요한 내장과 필요치 않은 내장을 가려내며, 가시와 살점을 구분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깨끗하게 도려내는 것. 이것은 뭍 세계의 시름을 잊고 오직 날 것이 내게 준 소우주에 몰입하는 경지를 지나게 한다. 이 책은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노동의 과정을 생계형 낚시라는 저자만의 방식으로 몸소 보여주었는데, 숙련된 손놀림이며 해산물에 대한 지식이 어찌나 대단하던지 이 사람이 정말 소설가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허기에 대한 또 하나의 해법은 바다에서 눈을 돌려 마을로 향해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삶의 의욕이 없을 때 시장에 나가 현장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북적거림을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 물론 여기서 한 마디 참견하며 떠들썩한 사투리의 정겨움에 자신의 정을 섞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여수시 삼선면 거문도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낚시를, 아홉 살에 해녀들 틈에서 잠수하는 법을 배웠던 저자의 바다마을 살이를 슬며시 참고로 해본다. 돌담에 줄을 맞춰 김을 널고, 여름 갈치 시즌을 맞아 신나게 배를 띄우며, 할머니들께서 옹기종기 모여 홍합을 손질하시는, 고독이란게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삶에 충실히 몰두하는 그 모습들을 말이다.

 

바다에서 태어났으나 뭍 세상에서 떠돌다 뼛속까지 굶주렸던 저자는 바다에 올 때마다 그 허기를 채우고 다시 힘을 얻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헛헛한 삶에 마침표를 찍고 아예 고향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는데, 바다가 주는 포만감의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비록 이 책이 그의 소설작품은 아니지만 곳곳에 배어있는 바다와 생명에 대한 사색이 뭉클할 정도로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쩐지 '두터웠다'고 표현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바다에 대한 저자의 우정이 글 속에 내재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생선 손질을 할 때 지느러미를 잘라내지 않는다.[...]서양요리의 아스파라거스는 이를테면 분향소의 흰 국화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생명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스파라거스를 접시 위에 올렸단다. 따로 올릴 것이 없는 나는 본 모습을 망가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다.(p.108-109)

 

나는 잡은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 거쳐온 이력을 알고 싶은 것이다.(p.281)


 

고독과 이상의 상징이었던 바다는 여전히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먼 발치에서 가르침을 하사하는 스승으로서의 바다라 할지라도 인생의 허기를 채워줄 만한 충만함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맛깔스런 음식과 날것의 촉감, 사람살이의 정을 통해 차오르는 포만감에는 수평적인 우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인생을 두텁게 감싸준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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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비상시대 - 석유 없는 세상, 그리고 우리 세대에 닥칠 여러 위기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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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커다란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미래의 세상을 떠올렸다. 제아무리 인간의 의지가 스위치를 올린다 할지라도 얼마 후면 기계화된 세상을 움직여 줄 석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석유가 없다면 원시적인 톱니바퀴부터 최첨단의 정교한 부품들까지 단 한 바퀴도 굴러가지 않는다. 우리들의 세상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기계들이 아닌지라 고철덩어리가 자유의지로 움직여주길 기대할 수는 없다. 남은 것은 그저 멈춰서서 부식되고 녹슬 날을 기다리는 것 뿐. 앞으로 100년도 아니고, 50년도 아닌, 37년 후...지구상엔 단 한 방울의 석유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석유종말의 위기가 드러나고 비상 시스템을 가동할 시점까지 고려해 본다면 석유를 마음놓고 쓸 수 있는 날은 37년보다 훨씬 적게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상은 모든 것이 석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 주변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어떻게 수송되어 왔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러나 옷을 입고,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는 동안 석유를 떠올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처럼 생활과 밀접한 석유에 대해 우리는 어째서 무심한 것일까? 클레이 셰키가 인터넷 시대를 맞은 대중들의 잉여 시간을 '많아지면 달라진다'는 논리로 풀어갔다면 석유에 대해서는 '멀어지면 달라진다'라는 논리쯤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대량소비에 부합할 만한 산유국은 전 세계 국가 중 몇 개국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우리나라와 같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는 생산과 관리의 측면에서 한 발치 멀어진다. 풍성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산유국이라 할지라도 석유는 국가와 기업차원에서 관리되며 일반인이 제 집 앞마당에서 우물을 퍼올리 듯 마음대로 시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석유의 실태에 관해 멀어진다. 뿐만아니라 석유를 통해 생산되는 플라스틱, 섬유 등과 같은 제품들은 주변에 넘쳐나지만 화학공학의 공정과정을 거친 이후라 우리에게 석유로서 인식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눈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형태의 석유는 이렇게 눈속임을 하며 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석유의 보유, 생산, 관리, 제조, 응용 면에서 모두 멀어진 대중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한대로 여겨질 만큼 쉬지않고 공급되는 석유를 '소비'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맘 편히 석유를 소비하는 동안 석유를 가진 자들과 이에 관여된 자들만이 진실을 공유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에릭 데이비스라는 학자는 '합의된 최면상태'라고 불렀는데, 위에서 언급한 '멀어지면 달라지는' 결과를 매우 정확히 말해 주는 듯하다. 석유 매장량에 대한 여러 학자들이나 기관의 수치 중 어떤 것이 진실일까? 석유를 대체할 만한 에너지는 미래를 보장할 만큼 그 연구성과가 긍정적일까? 각종 미디어를 통해 석유와 미래 에너지에 관한 낙관적인 견해와 회의적인 견해가 들려오지만 관련 직종의 종사자가 아닌 이상 무엇이 '진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내 집 앞의 우물과 저 먼 나라의 시추지와의 차이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것이다.

 

낙관론과 회의론 중 그 어느 것도 확인할 길은 없으나 회의론의 입장인 <장기비상시대>의 주장 가운데는 몇 가지 주목할만 점들이 있다. 먼저 그동안 소비해 왔던 석유는 가장 얻어내기 쉽고 질이 좋은 액체 석유였지만 남은 석유는 얻어내기 어렵고 질 나쁜 액체 석유, 그리고 반고체 및 고체 상태인 석유라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는 시추작업에 드는 에너지와 퍼 올릴 수 있는 석유를 비교해 볼 때 차라리 시추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상황도 벌어진다. 다음으로는 석유소비율과 인구증가율이 만들어 내는 부정적 시너지 효과이다. 저자에 따르면 석유 소비가 정점을 지난 후(이미 70년대에 지났다) 남은 양은 매년 2~6퍼센트 정도씩 고갈되어갈 것인데, 그 사이에도 세계의 인구는 한동안 늘어날 것이라 전망한다. 농업에 있어서도 지구온난화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천연가스로 만든 비료나 석유로 만든 농약, 탄화수소를 동력으로 한 관계 덕분에 곡물 생산량을 250퍼센트나 증가시켰던 것을 생각해 보면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의 조력 없이 현상을 유지해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기비상 시대에는 석유와 늘어난 인구 문제도 모자라 식량난까지 겪게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또한 저자의 시나리오처럼 석유 보유량에 따라 세계의 패권이 재배치되고 심지어 약탈전쟁까지 일어나게 된다면 미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무척 암담하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라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를 개발하고 그에 관련된 시스템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대체 에너지의 미래 역시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재생 가능 에너지는 석유나 가스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을 이용하면서 석유나 가스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다...(중략)...그런데 우리 시대의 많은 '환경주의자'나 '녹색 운동가'는 투입되는 에너지를 바꾸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석유나 가스로 생산한 전기를 이용하는 미국 휴스턴의 그 많은 에어컨을 전부 풍력이나 태양광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중략)...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하여 계속해서 거대한 시스템을 거대한 규모로 운영하고 싶다는 염원이야 말로 우리가 태양광이나 풍력이나 수력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의 본질이다.(p.166)

 

이밖에도 합성연료, 중합체 해체(TDP), 바이오 매스, 영점 에너지(ZPE) 등과 같은 최신 기술의 연료 역시 성공적인 활용에 있어서는 불투명한 상태다. 대체에너지에 관한 주장에 저자의 동의하지 않는(혹은 동의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한창 휴대폰과 노트북의 시대를 예견하던 90년대 초반 무렵 물로 가는 자동차와 태양열 주택에 관한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는데, 현재 휴대폰과 노트북에 대한 예견은 그대로 재현된 반면 대체에너지의 활용은 재현은 커녕 크게 진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가장 무서운 것이었고, 대체 에너지에 대해 너무 낙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으며 <장기비상시대>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다.

 

석유 없는 '장기비상시대'를 대처할 방안으로 저자는 '규모축소화(downscaling)'를 제안한다. 말 그대로 석유를 투입해 대규모로 운영하던 모든 것들을 소규모로, 지역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책에는 미국의 교외도시에 대한 비판이 적잖이 등장하는데, 석유를 다량으로 소비하는 자동차 기반의 출퇴근과 생활 물자 수송, 도로건설의 면에서 현재 교외도시를 중심으로한 도시계획이 얼마나 미래에 부적합한 것인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저자가 역설하는 소도시의 부활 또한 생태도시와 같은 맥락에서 깊이있게 고려해볼만한 견해이다. 현재 많은 도시에서 시도하고 있는 생태도시란 단지 환경오염이 적고 녹지가 많은 쾌적한 도시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태도시의 개념에는 지역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도시, 자생 가능한 도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이것이 소도시 규모로 추진될 경우 더욱 순조롭게 확산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장기비상시대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한다면 말이다.

 

<장기비상시대>는 석유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담고 있다. 석유 하나에 이렇게 많은 혜택과 문제점이 연관되어 있었는지 새삼 놀랄만큼,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사항들까지 다뤄나간다. 장기비상시대에 관한 저자의 비관적인 미래 시나리오는 차치하고라도 석유를 둘러싼 패권 다툼과 석유에 관련된 산업들의 전망, 그밖에 기후, 의학, 인구 등에 관한 면밀한 분석은 석유를 태우며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 세상을 실감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최면에 걸린 듯 무의식적으로 석유를 소비하는 대중들에게 이제 깨어날 시간이라고 알려주는 최면해제의 신호음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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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짓는 법 - 한옥시공 길라잡이
김종남 지음 / 돌베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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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옮겨놓은 것 같다. 진작 나와야 했을 책, 넘겨보고만 있어도 좋아서 웃음이 나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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