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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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인류의 위대한 고전의 하나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의 하나로, 중고등학교 시절 위대한 소설의 하나라고 익히 들어온 그런 책을,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희곡으로, 오래전 영국에서 쓰던 말하기를 가져와서 번역을 하였고, 그 밑에 그 당시 상황을 각주로 넣는 등 옮긴 이는 나름대로 이 고전의 이름값에 맞는 일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 싶다. 그럼에도, 그 당시 시대 상황, 당시의 주요한 서적이나 속담 등을 잘 모르고 있음이 이 책의 참맛을 느끼는 데 많은 걸림돌이 되었다. 많은 읆조림, 싯구를 보면서 이게 정말 무슨 맛일지, 번역으로 인해 참된 그 뜻을 퇴색시킨건 얼마나 되고, 그 당시 살지 못함으로 인한 무지는 또 얼마나 그 맛을 떨어뜨리는지, 그리고 이런 걸림돌은 각각 얼마나 그 맛의 헤침을 담당하고 있는지, 이 모든 게 매우 아쉽다.

대 문호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한 사람이고, 그 사람의 작품이라고 충분히 부를 만하다고, 나 허영심은 나를 부추기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의 얘기가 내가 할 수 있는 얘기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내게 재미를 주는 말은 종종 튀어나온다. 여자들은 좋아하지 않겠지만…[하느님은 여자들에게 한 가지 얼굴을 주셨는데, 여자들은 딴 얼굴을 만들어. 삐딱빼딱 걸음에 혀찌래기 소리내며, 아무 데나 별 이름을 다 붙이고, 변덕을 무식으로 치부하지]


책을 읽으면서 삼촌이자 왕인 클로디어스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클로디어스가 햄릿을 어떻게 방해하고 햄릿을 어디까지 몰아가려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햄릿이 사랑했던 오필리아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어떻게 햄릿의 주변에 있다가 죽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비극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에 대한 좋은 예를 가져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필리아가 정신을 잃고 말하는 대사를 보면서 이게 무슨 말인지, 아무리 정신줄을 놓은 사람의 대사라고 하더라도 읽으면서 정말 나도 정신을 놓지 않을까 싶을 만큼 읽고 무언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햄릿은 연극으로도 많이 공연되는데, 아직 한번도 못보았다. 그만큼 무지와 무관심의 세상에 살고 있는 내게, 햄릿은 하나의 소설이 되어 내게 나타났다. 이를 통해서 나도 좋은 고전의 맛을 느끼는 소믈리에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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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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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로 시작하는 이 책은, 지금 이 시대의 질병으로 피로를 말하고 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에서 볼때 박테리아스럽지도 바이러스스럽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스럽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병은 긍정화에서 기인한다고 본다.[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의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성으로 인해 면역 저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긍정성의 폭력은 박탈하기 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직접 지각되지 않는다…신경성 폭력은 시스템에 이질의 부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스템의 폭력,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다. 우울증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소진증후군도 긍정성 과잉의 징후다.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동질의 것의 과다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활동과잉에서 과잉은 면역학의 범주가 아니며, 다만 긍정의 대량화를 의미할 뿐이다.]


(에로스의 종말에서도 말하듯) 이 사회의 모두가 각자 자신이 인생을 프로젝트화하고 그에 대한 프로젝트 매니저가 된다.[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 주체가 아니라 성과 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이러한 성과사회에서 부정성은 점점 더 없어져야 하는 그 무엇이다.[점증하는 탈규제의 경향이 부정성을 폐기하고 있다.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 조동사이다. Yes We Can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사회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려는 열망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제 적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어제의 나, 쉬고 싶은 나, 무기력한 나)이다. 이로 인해 우울증은 호황을 맞는다.[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그러다보니 하루하루는 팍팍한 삶으로 곤두박질한다. [그리하여 성과 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 상태는 어떤 역설의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의 자유의 병리 표출인 것이다.] 팍팍한 삶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피로를 더욱 가속화하는 아이러니한 되먹임으로 역할을 한다.[긍정성의 과잉은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의구조와 경제에 근본 변화가 일어난다.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업무 부담의 증가도 시간과 주의를 관리하는 특별한 기법을 요구하는데, 그러한 기법은 다시 주의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사색을 깊게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없다. 이제 좋은 삶이라는, 당연히 가져야 할 목표도 잃은 채 표류하는 삶으로 내려앉아있고, 이 와중에 왜 인생의 목표가 없느냐?’는 식으로 유명 멘토나 회사 내 임원으로부터 비아냥을 받는다.[수렵자유구역에 사는 동물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잠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먹이를 먹을 때도, 짝짓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최근의 사회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화는 인간 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예컨데 직장 내 집단 따돌림은 큰 규모의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다. 좋은 삶이란 성공스러운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거니와,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이 밀려나고 있다아렌트는 바로 사색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무엇보다 활동스러운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실제로 바쁘고, 입에도 바쁘다는 말이 벤 오늘날의 우리에게, 심심함은 생산활동을 하지 않는 비생산의, 무의미한 무엇으로 취급된다.[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의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러면 어떻게 심심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오직 깊은 주의만이 "눈의 부산한 움직임"을 중단시키고 "제멋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연의 손을 묶어둘" 수 있는 집중 상태를 만들어 낸다…그러나 예술이란 "표현 행동"이다. 존재를 의지로 대체한 니체조차 인간에게서 모든 관조 요소가 제거된다면 인간의 삶은 치명의 과잉활동으로 끝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의 면을 대폭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다."]


눈뜨면 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거나 고민해야 하는 이 시대에 활동하는 삶이야 말로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제대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와 비교해서 느끼는 자유의 증대가그 기표가 갖는 능동의 의미가 실은 수동을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행동이 능동으로 새로운 과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라면, 근대의 인간은 반대로 익명의 삶의 과정에 수동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유도 계산이라는 뇌의 기능으로 전락한다.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활동스러운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근대를 보는 아렌트의 관점이다. 이 시대는 모든 인간 능력이 전례 없이 영웅처럼 활성화되면서 출발했지만, 결국 치명스러운 수동성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잠이 부족하지만, 나중에 푹자려면 지금 덜자야 한다는 이상한 주문을 걸며 하루 하루 지내는 삶을 산다.[그런데 후기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정확히 말해서 전혀 동물스럽지 않다. 그는 과도하게 활동스럽고 신경 과민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왜 모든 인간 활동이 후기 근대에 와서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지는가,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왜 그토록 초조하고 부산한 상태에 빠지는가 하는 물음은 다른 대답을 요구한다.] 결국 소수의 자산가를 제외한 많은 사람에게, 산업혁명 시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산은 몸뚱이뿐이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겨난다.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만일 벌거벗은 생명 자체를 넘어서는 의지 지평이 존재한다면, 건강의 가치가 이토록 절대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현대의 우리는 노예에서 주인으로 업그레이드된 게 아니라,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헤겔식으로 표현하면, 노예가 자신을 주인과 동등한 인격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에로스의 종말에 나오듯) 자본과 생산의 운동은 무한한 가속화에 빠진다.[과잉활동, 노동과 생산의 히스테리는 바로 극단으로 허무해진 삶,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반응이다. 오늘날 진행중인 삶의 가속화 역시 이러한 존재의 결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노동사회,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과 노예 변증법은 모두가 자유롭고 빈둥거릴 수도 있는 그런 사회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를 낳는다.]

니체의 생각을 빌리면, 피로사회에서 우리는 진정 사색, 음미가 절실하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눈으로 하여금 깊고 사색하는 주의력,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 교육"이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는 당당함이 매우 아쉽다.[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여기서 니체가 표명하는 것은 바로 사색하는 삶의 부활이다. 이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의 자기 개방이 아니다. 사색하는 삶은 오히려 몰려오는, 또는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을 수행하며, 시선을 외부의 자극에 내맡기기보다 주체로서 조종한다.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 행위를 통해 사색하는 삶은 어떤 활동과잉보다도 더 활동스럽게 된다. 실상 활동 과잉은 다름 아닌 정신의 탈진의 증상일 뿐이다. 아렌트는 활동성의 변증법을 인식하지 못한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스러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 주체로 바로 서고 싶다면, 이제 폭주하는 이 기관차를 멈출 줄 알아야 한다.[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활동 반응과 해소 작용으로 흩어져버릴 것이다. 순수한 활동성은 그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연장할 뿐이다. 진정 다른 것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려면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의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 단순한 활동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 볼 수 있다. 머뭇거림은 긍정의 태도는 아니지만,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오늘날 우리는 중단, 막간, 막간의 시간이 아주 적은 시대를 살고 있다.] 스테판 에셸이나 장하성이 말하는 그 분노는 이제 멸종 단계에 다다랐나 싶다. 조금 말을 풀어보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분노보다 짜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그 누군가가 말했던 "분노하라!"는 그 마음은 어딘가에 꽁꽁 숨어있고, 자기 스스로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 어떤 못한 마음에 대해서도 짜증과, 여기에 폭력이 덧붙여진 모양새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의 사회를 특징짓는 전반의 산만함은 강렬하고 정력의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렸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 간다. 사람들은 불가피한 일에 대해서도 짜증을 내곤 한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여기서 글쓴이의 조금 애매한 견해가 나온다.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 상태는 글쓴 이가 말하는 층위와는 다른 차원과 의도로 보이는데, 글쓴 이가 조금 오해하고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상태의 정상화와 현재 강요받는 긍정된 현실을 같은 반열에 놓고는 틀렸다고 말하는 그의 관점에 오류가 있어 보인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화되어 가면서 예외 상태도 더 줄어든다. 아감벤은 이처럼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을 지배하는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그리하여 정상 상태가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증대되는 세계의 긍정성이야말로 "예외 상태" "면역성"과 같은 개념에 대해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이유다. 하지만 그렇게 주목받는다고 해서 이런 개념이 현재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이들이 소멸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다시 한번 긍정의 지배(부정의 제거)로 논의를 되돌아가보자. 사람이 스스로와 자기를 둘러싼 우주를 다양한 방법(긍정-부정-종합-해체-무화)으로 이해하고 발전시켜왔다고 가정해보면, 부정의 존재라는 한 측면만을 부각시키지 않더라도 성과(이윤) 극대화를 위한 개개인의 노력은 인간을 한 방향으로 치우치게 하고, 이는 곧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빤하게 만들지 않을까? 일종의 '긍정 중독'은 이 사회에 분명 만연하고 있고, 긍정의 태도는 오늘날 하나의 미덕으로 포장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No!'라는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세계 전반이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된 성과기계로 변신한다. 또는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과도한 노력이 가속화 과정에 방해가 되는 부정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 전면에 대한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헤겔에 따르면 부정성이야말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이다.] 미친듯 무언가를 항상 하고 있고, 잠시의 휴식은 생산을 위한 도구여야 하고, 무언가 미친듯 하지 않고 한발짝 빠져 있음으로 인한 사유와 성찰의 기회를 놓쳐버림으로써 우리는 결국 =휴식이고, 잠시를 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은 '긍정','생산'의 가장 큰 적으로 자리매김된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은 없다면 우리는 치명스러운 화동 과잉 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무언가 생각할 힘밖에 없다면 사유는 일련의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기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긍정의 힘, 긍정성의 광잉은 오직 계속 생각해나가기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과유불급'이라는 단순논리로 활동 과잉을 저격하기에는, 자본이 만들어놓은 '긍정화를 통한 생산'의 신화라는 방탄복은 아주 강력해보인다.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 힘들다. 하지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더 건강하게 우리의 긍정화된 미래를 확보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역설스럽게 활동과잉은 극단의 수동 형태의 행위로서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다. 그것은 긍정화된 힘의 일방으로의 절대화가 낳은 결과이다.]


이제 성과사회는 도핑사회로 버전이 올라간다. 글쓴 이는 도핑사회를 얘기하면서, 오늘날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아주 위험하고 재미있는 발상을 말한다. 나쁜 짓이라도 모두가 하면 그걸 나쁜 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식의 논리(일제시대 소수의 희귀한 독립운동가를 빼면 다 친일파라는 논리는 이런 사고의 일종의 확장판이라고 할까?), 또 하나는 100미터 달리기를 할때 동일한 출발점만 보장된다면 출발점을 80미터로 땡기면 어떠냐는 식의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이런 논리가 통용된다면 100미터 달리기는 간판을 내려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억지 긍정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지쳐간다(영혼의 경색)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발전해간다. 그 와중에 "브레인 도핑"처럼 부정의 표현은 "신경 향상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최근에는 어엿한 과학자들조차 그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태도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외과의사가 신경향상제의 도움으로 좀 더 정신을 집중하면서 수술할 수 있다면 실수도 줄어들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신경향상제를 복용하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다. 단 공정성만 보장하면 된다. 모두가 그런 약을 똑같이 구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의 피로와 탈진 상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부정성의 결핍과 함께 과도한 긍정성이 지배하는 세계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징후이다. 그것은 면역학에서의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하는 면역학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기 때문이다. 과도한 성과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얘기하는 중간에 잠시 이 책을 정리해보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아프다. 다시 말해서 정상이 아니다. 그런데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면, 그건 부정의 태도이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마치 흙수저 얘기가 나올때, 그 원인을 찾기보다 어떤 불순한 세력이 (이렇게 건강한 사회를) 비뚤어진 모습으로 나타내, 많은 순진한 사람들의 머릿속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의견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자본 밑에서의 이 냉혹한 논리를 긍정하던 부정하던,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긍정','성과'를 내야하고, 이 속에서 타자를 밟고 올라서야 함이 필연은 아니지만, 거의 필연에 가까운(=필연스러운?)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남을 밟고 올라가기의 게임 속에서 그 결과는 무엇인가? 결국 최종의 강력한 한명(또는 하나의 그룹)만이 살아남아서 이 세상을 주무르게 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사회라고 불리기는 힘든, 야만의 상태 아닐까? 이게 자본이 갖고 있는 한계일 것이리라.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으로 폭력을 낳았다. 아마도 이러하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로 자체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내용에 동의하지만, '피로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근본에 놓여있는 피로는 오히려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위에 관한 것이다. "승자가 아니라 피로한 자에게 바쳐진 핀다로스의 송가! 성령을 맞는 오순절의 사람들을 나는 언제나 피로한 모습일 거라고 상상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는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피로는 특별한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한다. 그것은 모든 감각이 지쳐 빠져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 이렇게 우울한 현대 사회를 보면서, 우리는 다시 고대의 노예로 돌아가는 것인가? 속으로는 그때보다는 훨씬 다르다(나아졌다!)고 자족하면서 말이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부재하는 자와의 부정 관계가 멜랑콜리의 조건인 것이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아무런 중력도 없다.] 그렇다면 자본이 이전의 다른 제도보다 더 나은 제도라고 하는건, 기만 행위일까? [우울증은 "갈등이라는 준거가 상실"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완결된 형식을 만들어내고 보상 기관으로 기능하는 객관화된 결정의 심급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의 잣대가 된다면, 나는 자아이자 타자가 되는 것이다. 이게 미친다는 말과 뭐가 다를까?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 자체가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로서의 성격이다. 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하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그래서 종종, 대기업의 임원이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살하지 않는가? 그렇게 소중한 자신을 불나방처럼 태워버리다니…[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 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나 능률이 높게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 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기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 그럼 이렇게 처절한 삶의 터전에서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산수단으로서 육체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건강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무언가라도 할것 아닌가? 하지만 살아남는다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다보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논리는 무색해지고 만다. 우리의 인생은 정말 연기처럼 덧없어보인다. [자본주의 경제는 생존을 절대화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관심은 좋은 삶이 아니다. 이 경제는 더 많은 자본이 더 많은 삶을, 더 많은 삶의 능력을 낳을 거라는 환상을 자양분으로 발전한다. 이때 삶과 죽음의 엄격한 분리는 삶 자체마저도 섬뜩한 경직성을 띠게 한다.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생존의 히스테리에 밀려난다. 생물학의 생존 과정으로 환원된 삶은 벌거벗은 생명이 된다. 삶을 감싸던 서사성은 완전히 벗겨졌고 삶의 생동성은 잃어버렸다. 생동성이란 단순히 생명력이나 건강보다 훨씬 더 복합화된 것이다.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의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화된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 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화가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환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몇 가지 느낌을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피로 사회, 도핑 사회, 우울 사회 등 글쓴 이는 현재의 사회에 대해 독특하고 그럴듯한 처방을 내린다. 치료를 잘하는 의사라기 보다 의학 카피라이터가 더 어울린다고 할까?
둘째, 이 책에서 말하는 피로는, 오늘날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능동의 선택이 아닌, 수동의 선택 받음 속에서 치열히 살면서 도착한 중간 정거장이다. 많이들 지쳤다. 하지만 계속 뛰라고 한다. 뛰지 않으면 앞으로는 어떤 보장도 할 수 없다고 사회가 말한다. 그래서 더 피로하고 피곤하다. 피로사회는 바로 그 모습이 넘쳐나는 지금을 가리킨다.
셋째, 피로사회 속에서 자기와 경쟁하며, 그 과정에 지치고 우울증에 빠진 우리에게 경쟁자는 우리 스스로이다. 문제는 나를 타자처럼 냉정하게 보기 어렵고, 그래서 문제를 객관화된 시각에서 바라보고 답을 찾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이다.
넷째, 그런데 이렇게 나의 에너지를 무한히 갖다 바쳐야 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피곤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알던 모르던 극복할 방법이 있어야 할텐데, 이렇게 무자비한 게임에서 답을 찾을 여유와 시간이 있을까? 결국 그 답은, 여유를 갖고 있는 피라미드 상층부에서 금수저를 놓고 있는 그 누군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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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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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본 적은 없지만 어떤 책은 그 이름을 수없이 들어본 적이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도 그런 부류의 하나다. 그 어떤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 며칠 사이에 두 주인공 사이에 일어나는 일, 그리고 대화와 몸짓,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 일상을 베케트는 아주 담담하게 희곡으로 적어나갔다.


아직 연극의 맛을 몰라서일까? 대본 형태로 적힌 이 작품의 깊은 뜻을 마음에서 흠뻑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마치, 유명한 와인이라고 해서 마시는데, 왜 그런지 그 까닭을 모르는 모양새라고 할까? 아무튼, 이 작품이 나오고 그 당시의 연극계에 아주 큰 울림을 주었고, 그러한 효과 중 하나는 두 주인공만으로 계속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는 구조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우리나라만 해도 칠수와 만수처럼 두 주인공이 나와서 서로가 이상한 얘기를 주고 받는 스타일이나 관객 모독이라는 일명 부조리 극 등 비슷하게 보이는 작품이 나와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갖고 있었던 자기만의 빛깔이 조금은 빛바래 보이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모방을 만들어 오는 작품이라면, 얼마나 선구자로서 개척을 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주인공 둘 사이의 관계, 그리고 기껏해야 중간에 튀어나오는 다른 조연 몇 명이라서 여기 나오는 각각의 사람을 살펴보고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는 아주 많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두 주인공의 지난 날과 앞으로 올 날에 대해서도 나만의 버전으로 이야기를 생각해보고 싶은 충동이 올라온다. 정말 고도는 있는 건지? 아니면 지나간 다른 두명? 세명? 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은 정말 고도가 있고, 그가 올거라고 믿는걸까? 배고픔과 외로움, 지침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에게 있지도 않은 그 누구(또는 무엇)인가를 주문처럼 스스로의 머릿속에 불어넣고는 요술 램프 속 지니처럼 나와줄꺼라 생각하는걸까? 가만 생각해보면, 나 자신도 때로는 나만의 고도가 있어 왔다. 많이 힘들고 지칠 때, 고도와 같은 누군가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선의 만으로 나로부터 이 무겁고 힘든 껍질을 벗겨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세상의 삶이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그 둘에게만 힘든 곳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동서양) 문화/ 위치/ 시대 중 그 어떤 차이에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의 풀어나감에 선뜻 와닿지 못하는 내 마음은 무엇때문일지 설명이 잘 안된다. 그럼에도 세계 명작이니 노벨상 수상작이니 하는 수식 어구에 마음이 끌려 이 책을 읽은 나 자신 또한 내 스스로가 상당히 부조리의 연속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들게 만들게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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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물리학 - EBS 다큐프라임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제작팀 지음, 홍성욱 감수, EBS MEDIA 기획 / 해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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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포함해서 사람 등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시절이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앞서 읽었던 호킹의 <위대한 설계>의 기억의 잔여물이 남아 있어서인지, M이론이라 양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그렇게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이해 수준이 높지 않음을 전제로 깔고 말이다.


이 책은 시간의 흐름대로 적혀나가지 않는다. 우리가 제일 잘 아는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과 특수 상대성 이론이 가장 먼저 나온다. 상대성이란? [아인슈타인에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절대 시간이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원래부터 없던 (모두에게 똑같은) 시간을 표준화된 시간으로 만드는 자본주의는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상대성 원리 중 특수 상대성이 먼저 나오는데, 일반 상대성은 특수 상대성의 일반화라는 측면에서 뒷장에 나오도록 꾸며져있다. 그렇다면 특수 상대성이란? [등속운동은 일상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라고 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는 특수상대성이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결국 절대 시간이란 우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에 와서야 우리는 절대와 상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한가지 궁금점이 있다. 각자의 시간이 다르다고 하지만, 그 다르다고 알 수 있는 기준을 알고, 정했다면 무언가 절대 기준은 인정해야 하는 걸까? 서로 다른 시간이라도 그 다른 시간의 차이에 대한 범위는 있지 않을까?


일반상대성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먼저 그 유명한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나온다. [결국 지구를 도는 달도 앞으로 계속 나아가려는 관성과 지구와 달이 서로 잡아당기는 만유인력 때문에 끊임없이 돌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도는 원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완벽한 이론은 없다.[ 뉴턴의 이론에 하나의 문제가 발견되었다. 바로 가속이라는 골치아픈 문제이다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속도가 다른 관찰자가 보기에 그 길이가 짧아진다고 했다. 그러면 (원을 따라 도는)열차가 빨리 돌면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해 길이가 짧아질 것이다….원의 지름도 변하지 않았고, 파이값도 그대로인데 왜 달리는 열차의 길이, 즉 원둘레는 줄어들까?... ...파이값은 인류가 오랫동안 추적해서 찾은 변하지 않는 값이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의 천재 아인슈타인은 이에 대한 답을 찾았다. [아인슈타인은 답을 찾았다! 힘이 가속도로 움직일 때 원주율이 변하는 것은 바로 공간이 휘어지기 때문이었다. 원운동을 하는 열차가 점점 짧아져서 선로를 벗어나게 되는 건 바로 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이었다가속도의 힘이 존재하는 공간, 즉 중력이 존재하는 공간은 모든 물체를 휘게 한다질량이 있는 곳에서 공간은 휘어진다. 태양 주변도 마찬가지다. 태양 뒤에서 오는 별빛은 직진하고 있지만 휘어진 공간을 따라 오게 된다중력은 잡아당기는 힘이 아니라 공간이 휘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아인슈타인의 답이었다.]


그렇다면 빛의 속도는? 그 속도를 알기 위해 수세기동안 갈릴레오, 뉴턴, 맥스웰 등 그야말로 세기의 천재들이 이 문제에 달라붙는다. [맥스웰은 전자기파가 나아가는 속도를 계산대략 310,740,000m/s…바로 빛의 속도다…이것은 무슨 뜻일까? 빛과 전자기파가 같은 것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고 전자기파의 일부다.]


그럼 이제 바깥의 우주 세상이 아닌, 우리 눈에는 안보이지만 우리를 구성하는 아주아주 작은 곳으로 들어가본다.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원자 속 전자를 알게 된다.[톰슨은 음극선이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입자라고 발표하면서, 이 입자에 미립자(corpuscles)라는 이름을 붙였다…질량을 갖고 있고 음극을 나타내는, 원자보다 작은 미림자나중에 전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전자의 운동을 태양 주변을 도는 지구와 같은 모습으로 그려낸다.[러더퍼드는 전자가 원자핵 주변을 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그리고 태양이 지구를 붙잡아두는 힘이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그러려면 지구가 도는 것처럼 전자도 원자핵 주위를 돌아야 했다.] 그리고 원자의 문에 들어서면서 나오는 질문[왜 에너지는 무한대로 커지지 않는걸까?]에 대한 답도 나온다.[어떤 파동은 에너지를 갖지 않는다즉 자격이 갖춰진 파동만 에너지를 가졌다. 그 자격이란 파동의 진동수에 h(플랑크 상수)를 곱한 갑이었다…최소 단위는 파동의 진동수에 의해 결정된다. 에너지 최소 단위가 큰 파장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가더라도 아주 조금밖에 나가지 못한다…연속하지 않고 어떤 단위량의 정수배로 나타나는 에너지 단위를 양자라고 한다.양자의 세계는 에너지가 불연속이다. 에너지는 덩어리로 움직인다. 즉 양자화되어 있다. 그리고 건너뛰기를 한다. 그건 현실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전자도 원자와 같이 불연속의 운동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자는 선에 해당하는 에너지 진동수만 방출하기 때문에 낱낱의 선으로 나타난다. 즉 진동수는 스펙트럼에서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떨어진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원자는 선에 해당하는 에너지 진동수만 방출하기 때문에 낱낱의 선으로 나타난다. 즉 진동수는 스펙트럼에서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떨어진 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보어의 모델에서 전자가 움직일때도 궤도에서 궤도로만 갈 수 있다. 그럴 때 전자는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한다. 전자는 불연속으로 튀는 방식으로 궤도를 옮겨 다닌다이것이 바로 보어의 원자모델이었다.]

물리학사는 이론의 완벽성을 위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어떤 질문과 상상에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보어의 원자 모델도, 앞서 뉴튼과 아인슈타인 등 한때의 최고 위치에 있었던 그 누구의 이론처럼 도전을 받았다. [보어의 원자 모델에는 한계가 많았다. 도대체 왜 전자가 궤도를 따라 도는지, 그리고 궤도를 따라 돌던 전자가 왜 갑자기 다른 궤도로 이동하는지, 모델을 만든 보어 자신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슈뢰딩거가 파동방정식을 갖고 등장했다.[ 슈뢰딩거는 파동으로 된 궤도를 다시 살렸다. 전자는 그 궤도에서 돈다. 그리고 슈뢰딩거는 전자가 파동의 성질도 가지고 있다는 물질파 개념을 이용해 전자의 움직임을 설명해냈다…슈뢰딩거의 파동은 하나의 공간 안에 있다. 그런데 입자가 늘어나면 그 공간에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다.] 그리고 막스 보른의 그 공격 논리는 다음과 같다.[ (보른이 보기에,) 슈뢰딩거 방정식에 나오는 파동함수 프사이는 가상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며 실제로 진동하는 파동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파동함수는 허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막스 보른은 일명 확률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입자 하나가 하나의 특정 지점에 확률로 존재한다고 확신했다…보른은 전자가 어떤 공간에 확률로 존재한다고 해석했다.] 전자가 확률로 존재하다? [확율이론에 의하면 전자는 진폭이 큰 곳에서 발견될 확률이 높다. 발견되기 전까지 전자는 다양한 위치에 공존하고 있는 존재다. 간섭 현상으로 진폭이 두 개가 되는 곳에서는 전자가 발견될 확률이 두배가 된다. 서로 상쇄되는 곳에서는 전자가 발견될 확률은 0이다. 그리고 전자 운동의 미래는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렵다.] 결국 우연으로 보이는 것에서 원칙을 찾으려던 활동의 귀결은 다시 우연인가? 이게 물리학사이자 인생인가? 이에 대해 하이젠베르크는 불난 데 부채질하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시한다. [위치를 정확히 재려고 하면 전자의 운동량이 불확실해지고, 전자의 운동량을 재려고 하면 어디에 있는지 위치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즉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잴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코펜하겐학파가 최종으로 생각한 원자 모델은 다음과 같다.] 불가지론으로 빠졌다!


그렇다면 궁극의 이론, 형이상학의 그 한가지 원리는 어디에 있는걸까? [궁극의 이론, 즉 만물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이론이 과연 있을까? 어떤 명백한 근거도 없이, 오랫동안 물리학자들은 그런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이에 대해 많은 궁극이 나왔고, 사라지는 순환의 반복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끈이론이 나온다. [끈 이론은 끈이 다양하게 진동해서 온 우주를 만든다고 주장했다…지금까지의 우주론이 풀 수 없는 유일하면서도 힘든 지점은 빅뱅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렇다면 끈이론은 만물 이론이 될 수 있을까? [즉 모든 입자들은 동일한 끈이 다양한 패턴으로 진동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끈은 분리되거나 합쳐진다. 이것이 바로 끈이론이다끈이론은 M-이론으로 바뀌었으며, 여기서의 M은 세상의 모든 M이었다. M-이론은 11차원의 끈이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물리학의 관심이 돋아나서, 되도록 쉬운 책을 골라 읽었음에도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을 알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많은 논쟁과 고민의 축적을 한권에 눌러놓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닐거란 생각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해왔고 앞으로 할 것일까? 내가 몰랐거나 만나지 못했던 그 수많은 물리학자들의 고민과 노력에 대해 정말 감사함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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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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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변신이야기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말을 많이 느끼게 만든 책이다. 드라마나 영화, 만화, 소설 등 스토리가 있는 장르의 뿌리에는 이 책을 비롯한 옛 시대의 이야기가 똬리 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죽는다는건 비극일까? 자연사건 사고사건, 누군가 다른 존재에 의해 목숨이 끊어지건 그 당장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 주변 사람에게 충격으로 와 닿고 그걸 슬픔(비극)으로 말할 수 있다. 일단 비극인지 판단은 잠시 유보해보자. 2편을 보면 반인반신이나 사람의 등장이 1편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아킬레오스에서 카이사르까지 많은 사람이 늙지 않은 나이에 죽는다(물론 신들은 그게 그 사람들이 타고난 명이라고 하겠지만…) 그리고 그 죽음 뒤에는 이 책의 다른 이야기에서처럼, 신과 사람의 다양한 감정과 관계가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미워하고 다정했고 소원했던 그 느낌과 관계의 이야기 속에서 그 영웅들과 그 사람들의 터가 사라졌다. 다시 아까의 물음으로 돌아가보면, 이걸 비극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사람이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갖고 있는, ‘자신의 마지막으로 돌아감이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보고, 그냥 덤덤히 받아들일 것인가?


이 책을 보면 로마의 조상은, 토로이 전쟁 후 국가를 잃고 떠도는 (아이네이아스를 비롯한) 트로이아 유민들이고, 그들의 후손인 로물루스 등이 로마를 세우면서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제국이 불리는 거대 국가를 만들어낸다. 그 로마가 커지면서, 옆에 있던 선진 문화였던 그리스와 그 식민지를 격파하는 모습을 돌이켜보니, 로마에게 그리스는 선생님이자 원수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피타고라스와 그의 (일종의 존재론) 철학과 과학, 수학 이야기, 그리고 짧지만 강렬하게 나오는 카에사르의 승천은 그 앞의 다른 이야기와 어울려보이지 않으나,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넣고자 하는 의도가 오비디우스에게는 매우 강렬했다고 생각된다.


업무를 기획하고, 소설이나 평론 등의 글을 쓸 때 변신이야기는 매우 좋은 참고서 역할을 해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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