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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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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유명 미술평론가인 John Berger의 책이다. 미술 작품, 유화, 광고 등 주로 눈으로 보는 문화에 있어 새로운 눈을 말해주고 있다. 앞부분은 주로, 그리고 다른 부분에도 벤야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처음부터 그림이 나오고 평론 풍을 이야기는 시작한다. [평소에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방식, 즉 그들의 몸짓이나 얼굴 생김새, 더불어 행동방식, 사회 관습이나 의례 등등 여러 가지를 보고 얻은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사람을 보는 방식과 프린스 할스가 인물을 보는 방식이 일치할 때 그의 묘사 방식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사회관계나 도덕 규범이라는 측면에서, 아직은 할스가 살았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한 성격을 지닌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할스의 초상화들이 심리학이나 사회학의 절박함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된다. 우리가 그림 속에 그려진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갖는 것은, 유혹자로서의 화가의 솜씨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점 때문이다.] 무언가를 공감하려면 어느 정도 시대의 비슷함이 묶여질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인가?

내가 가장 익숙한 미술 단어인 원근법, 원근법의 관찰자는 잠시나마 신이 된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을 자기를 향하도록 만든다. 그는 그렇게 자기가 보이는 모든 것의 주인이다. [원근법의 관습에 따르면 시각의 상호 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는 타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신은 그 자신이 상황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원근법의 내부 모순은 신과는 달리 단지 한 장소, 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현실의 모든 이미지가 정돈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예술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을 말한다. [미술이란 그것이 지닌 유일무이한 변함없는 권위를 통해 다른 형태의 권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미술은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위계질서를 짜릿한 긴장감을 주는 것으로 만든다. 소위 국가의 문화유산이란 개념은 현대의 사회 시스템과 그것이 우선으로 중요시하는 것을 찬양하기 위해서 미술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전통 표현을 빌리면, 참으로 좌파스타일이시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눈을 가진 권위자가 있고 존중받는 그들을 보면, 한국과 시차가 언제쯤 극복될 것인가?

적어놓지 않으면 기억하기 힘든, 수많은 미술 작품이 있다. 그중 우유를 붓는 여인도 있다. [원작(얀 페르메이르<우유를 붓는 여인>)에는 그 그림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통해서도 느낄 수 없는 침묵과 고요함이 있다. 심지어 벽에 걸린 복제물도 이 점에서 원작을 따라갈 수 없는데, 왜나햐면 원작이 지닌 침묵과 고요함이라는 것은 실제 물질 즉 물감에 스며 있어서, 보는 이는 그 물질성을 통해 화가의 몸짓이 남긴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세잔이 화가의 입장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세상의 삶에서 한 순간이 지나간다!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되고, 예민한 감광판이 되는 것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로 남기고, 우리 시대 전에 나타났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 그림에 그려진 순간이 눈 앞에 바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미술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고, 그러한 기대는 우리가 복제를 통해서 체험한 그림들의 의미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는 사람에게 그리려는 어떤 순간이 나타나고, 거기에 그 사람의 기대가 더해져서 나타나는데, 그 기대는 그동안 어떤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의 의미가 어땠느냐에 의해 나타날 것이다라는 말인가?


기존 혹은 전통이라고 묶어왔던 시대와 구별하는 현대 미술의 특징이 나온다. [현대의 복제 기술이 해낸 것은 예술의 권위를 파괴하고 예술을 그 어떤 보호영역으로부터 떼어낸 일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술 이미지가 순간이고, 도처에 존재하고, 실체가 없으며, 어디서나 얻을 수 있고, 무가치하며, 자유로운 것이 되었다. 이제 예술 이미지는 마치 언어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 싸고 있다. 예술 이미지는 삶의 주류에 합류했는데, 이제 예술 자체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삶을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벤야민의 느낌을 풍기는 글로 보인다. 예술, 그림 그 자체가 그 동안 가졌던 권위는 현대의 복제 기술로 극복되었다. 전에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림을 갖고 있음이 의미하는 권력, 힘이라는 말이 가지는 가치가, 하나밖에 없는 그림과 닮은 꼴들이 나타나서 그 힘이 무너진 것이다. 그건 현대 기술의 업적이나, 그 뒤에 숨어있는, 현대 사회와 기술이 갖는 교묘한 메타포-이제 이런 것들을 갖고 있으니 그 옛날 이루지 못한 상층부로의 진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달콤한 뱀의 목소리-앞에서 우리는 이브가, 아담이 되었다.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복제본의 저작권 문제, 미술 매체와 출반사의 소유권 문제,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정책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이런 문제들은 극히 작은 전문성이 높은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현재의 위기가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 문제가 된 이유이다.] 새로운 세력이 기존 세력이 갖고 있는 힘의 구도 속에서 자기의 새로운(그리고 보다 나아진) 모습을 가져가기가 정말 어렵다는 말일지


미술 속에 나타나는 여인들로 넘어가보자.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주어진 한정된 공간에서, 남자들의 보호관리 아래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자들의 사회 존재는 이렇게 제한된 공간 안에서 보호, 관리를 받으며 그 여자들 나름대로 살아남으려고 머리쓰고 애쓴 결과로 이룩된 겻이다. 그러나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여자의 자아는 찢겨 두 갈래로 갈라진다.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늘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항상 그녀를 뒤따라 다닌다. 방을 가로질러 갈 때, 또는 아버지가 사망하여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도록 교육받고 설득당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여자는 한 여자로서의 정체성이 이렇게 감시하는 부분과 감시당하는 부분이라는, 서로 분명히 구별되는 두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자는 자기 존재의 모든 면과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을 늘 감시해야 한다.왜냐하면 여자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이, 그녀 인생의 성공 여부가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고 보통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맞이하여 갖는 생각은 이렇게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감정으로 대체된다.] 현실에서 여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그러는지 궁금할 때가 수두룩한데, 이론으로 이 글에 대해서는 100% 공감한다. 그 말은 다음의 구절로 더 잘 요약이 된다.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행동하고 여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그렇다면 남자, 여자로 태어났다는 그 말미암음이 감시자와 스스로 감시받는 자의  구도를 만든 근본 원인일까?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여자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시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 놓고는 이를 도덕상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이제 누드로 들어간다. 남자로서 흥미가 가는 그림의 형식이다. 그리고 여기도 남자의 보기, 그것도 즐겁고 보기가 개입한다. 그런데 그 즐거움을 즐거움이라 하지 않고, 여자로 인해 나타나는, 어쩔 수 없이 보는 즐거움으로 꼬아서 이야기한다. [누드를 그린 보통의 유럽 유화에서 주인공은 절대로 그림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림 앞에 있는 관객이며, 남자로 상정된다. 모든 것이 그를 향하고, 모든 것이 그가 거기에 있는 결과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 그림 속 인물이 누드가 되는 것은 그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낯선 사람이고, 여전히 옷을 걸치고 있다.] 처음에서 누드까지 보면 거의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유럽의 그림세계를 지배한 담론의 압축이라고 여겨 진다. 철저하게 권력을 움켜진 남성이 그림의 담론 세계를 지배한다. [유럽의 누드 예술 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히 각인되어 있어 지금까지도 많은 여자들의 의식을 형성한다. 남자들이 여자에게 요구하는 것을 여자 스스로도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여성성을 살펴본다.] 이런 내용은, 이 책의 제목인 다르게 보기의 취지와 달리, 주류와 같게 보기로 보인다.


자산으로서 그림의 의미는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랄까? [레비 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건의 소유자 입장에서나 심지어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 같이 이렇게 탐욕스럽게 물건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노골화시켜 드러내는 것이, 서구문명의 미술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색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근대화의 특징 중 하나인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는 유산은 그림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레비 스트로스는 또다시 그림 컬렉션이 수집가의 자존심과 자기애를 확인해주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르네상스 시기의 예술가에게 회화는 앎의 도구였을 수도 있지만 또한 소유의 수단이기도 했다. 르네상스 회화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피렌체와 그 밖의 지역에 어마어마한 부가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런 회화가 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부유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화가들을 일종의 대리인으로 봤다는 사실을 잊어는 안된다. 대리인으로서 화가들은 이탈리아 상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과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피렌체의 궁전에 쌓인 그림들은 하나의 소우주를 대변하고, 그 소우주 안에서 독점 소유주는 예술가 덕분에 쉽게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리고 가능한 한 가장 현실의 형태로, 자신과 관련이 있는 세상의 모든 면모를 재창조할 수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자본과 이미 연계되어 있었다.


앞서 얘기와 조금 다른 말이지만 서구의 고급 담론에 엮인 분야에 공통으로 검토할 내용이 있다. [대략 열여섯 살때부터 전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에 적합한 작업 방식을 공부했던 도제나 학생이 예외의 화가가 되려면, 자기 나름의 독자 시각이 중요함을 깨닫고 전통 관습이 요구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독특한 시각을 키워 나가야만 한다. 혼자 힘으로 자기가 이제까지 배워온 예술의 규범에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화가로서의 시각을 거부하는 화가로 스스로를 생각해야만 한다. 이 말의 의미는 그동안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두점을 보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게 유럽에서 미술 뿐 아니라 주요 학문의 학풍이 아닐까?


40년 전에 쓰여진 책의 내용이라 보면, 아직 광고가 스스로의 독자성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 삶의 길을 앞서의 그림 문화에서 많이 따왔다는 말로 들린다.[유화와 광고 사이에는 특별한 작품의 인용 이상의 훨씬 더 깊은 연속성이 있다. 광고는 굉장히 많은 부분을 유화라는 언어 형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같은 것에 대해 같은 목소리로 얘기한다. 때때로 우리 눈에는 유화의 언어와 광고의 언어가 매우 비슷하게 보여서, 마치 온갖 이미지 중 거의 동일한 이미지를 나란히 늘어놓고 '찾았다'하고 외치는 게임이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광고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시각 예술을 대신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그 시각예술이 마지막으로 소멸해가는 형태가 광고인 것이다. 본질상 광고는 무언가에 대한 향수다. 그것은 과거를 미래에 팔아야만 한다. 광고는 광고 자체가 요구하는 기준을 스스로 채울 수 없다. 게다가 광고가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모두 복고와 전통에 근거를 둔다. 광고가 단순히 당대의 언어만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확신과 신용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버거씨는 광고가, 앞서 내가 해석한 시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기생의 성격으로 굳혀서 말한다. (유화)이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광고의 목적은 광고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자기의 현재 생활방식이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을 갖도록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일반 생활방식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개인 생활방식에 대해 불만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다. 광고에서는, 만일 광고하는 물품을 누군가가 구입한다면 그 사람의 생활이 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광고는 그 사람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한다.] 이거 진짜 이상한 형태의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 기생충이 뇌로 들어가, 그 사람의 머리를 이상하게 뒤틀고 지금과는 다른 몸짓을 하게 계속 뒤에서 조종하는, 영화나 만화속의 외계인이랄까? 그런 측면에서 버거씨의 이런 해석은, 이성주의의 흔적이 아직은 남아있어 보인다. 현대의 광고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대상을 포획해서 그 사람을 바꾸려는, 아주 이상한 그 무엇일 뿐이라는…[광고에 의하면 현재란 불충분하다고 단정짓고 얘기된다. 유화는 영원히 남는 기록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림이 그 소유자에게 주는 기쁨 중 하나는 그것이 자신의 현재 이미지를 미래의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유화는 자연히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 화가는 실제에서건 혹은 상상에서건 자기가 보는 것을 그렸다. 반면에 순간의 쓰임새 때문에 만들어진 광고의 이미지는 미래 시제만을 사용할 뿐이다. 이것으로 당신은 장차 이성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당신의 관계는 이제 한결 행복하고 빛나는 것이 될 것이다.] 시뮬라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의미없는 노동시간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끝없는 현재는 꿈속에서 미래에 의해서 상쇄돼 버린다. 이 미래의 꿈 속에서 노동하는 순간의 피동성은 상상의 행동에 의해 대치된다. 백일몽 속에서 피동의 남녀 노동자는 능동의 소비자로 바뀐다. 노동하는 자아는 소비하는 자아를 선망하는 것이다.] 결국 앞서 말한 장치와 의도는,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앞으로 더 나아질거라는 환상을 계속 던져주고, 그 환상을 소비에서 찾도록 유도한다는 말인듯 싶다.

마지막으로 이책을 압축하면 바로 이것이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냈다.]

 

이 책을 마무리하자면, 벤야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함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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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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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둘간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커넥션, 음모가 있었을까? 박정희는 마음의 고향인 일본, 거기의 (일본식 표현으로 하면 막후 실력자)인 기시 노부스케에게 무언가 빚진 것이 있었을까?와 같은, 타블로이드 찌라시 수준의 내용이 있나 싶은 마음을 조금은 안고 이 책을 들었다. 강상중 교수의 책을 읽은 바 있어서, 강교수님의 스타일이 타블로이드 수준으로 글을 쓰지 않음을 충분히 알았으면서도... 적다 보니 스스로 조금 창피한 마음마저 들려고 한다.


(그 누구의 말처럼) 어느 나라건 근대화는 폭력이 수반된,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에게는 식민지의 통치를, 그리고 이후 (현대 개념의) 전쟁, 장기 독재와 군부 독재로 그 폭력은 지독히도 이어져왔다. 박정희라는 사람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그 사람의 논의, 잘함과 자잘못은 아직도 논의가 끝나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박정희라는 사람의 삶의 궤적을, 기시 노부스케라는 요괴와 짝지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속에는, 식민-피식민 속에서의 폭력, 지식인의 출세욕, 미국과 세계 최종의 결승 전쟁을 준비하는 꼼꼼하지만 미쳐버린 정신병자, 동족을 팔고 매질해서 한자리 하려는 앞잡이가 각각 똬리 틀면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 책의 두 명도 그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한 세상을 정말 풍미했다. 그 속에서, 아무리 초짜 정치인이라지만, 식민 통치국가에 가서 식민지 어로 그 나라의 정치인들에게 정치 한수를 구하고자 하는 그 정신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간다. 그래서 그자가 쓴 혈서는 정말 그의 진심에서 나온 거였는지 매우 혼란스럽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국의 귀태라고 불리는 일본의 2차 대전 주역들이 나타난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의 교차점으로 괴뢰국이라 불리는 만주국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문관으로 자기의 수완을 부리고 인정받기 시작한 곳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식민지인으로 철저히 스스로를 바꾸고 일본 군인으로서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곳이다. 또한 박정희의 만주 인맥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나중에 사형 구형도 살려 준다.


책을 보면, 오늘날 정치권에서 말해지는 것 중에 그 기원이 일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정도 밖에 안되나 하는 슬픈 마음이 막 끓어오르려 한다. 1925년 치안 유지법 등 사상 통제의 내용을 보면 초등학교 시절에 많이 나왔던 말이 생각난다. [구미의 사조와 가치관이 가져온 시민의 자유를 요구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위기를, 천황의 조서는 공덕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며, 충효의용의 미와 질실강건의 기풍을 높이고 황조황종의 유훈에 따라 국가의 훙륭과 민족의 안영을 도모하여 국민정신을 떨쳐 일으키으로써 극복하자. 기강을 바로 잡고 국가주의를 철저하게 하자고 다그쳤다]


이 번에는 두 사람의 슬픈 공통점이다. 이들은 패자부활전으로 살아남아 그들이 갖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상식이라는 차원에서의 윤리-도덕과는 거리를 두고 있어 보인다.[두 사람은 기사회생으로 부활하여 전후 일본과 해방 후 한국에서 저마다 최고 권력자로 떠올라, 각각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역사의 우연 치고는 너무나도 유사한 공통점이 거기에 보인다. 우선 첫째로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의 그림자가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게 되었다. 전쟁 종결은 전쟁 자체의 종결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미소 대립이라는 거대한 파워 쉬프트는 제국의 귀태들이 새로운 승리자(미국) 아래에서 소생할 무대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욕으로 뒤범벅이 된 과거의 경력을 지워 없애고 그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부여하는 하늘이 내린 선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이런 의미에서 정치가가 성공하는 데는 자신의 힘이랄까, 그런 것보다는 운이 7할입니다.라고 했던 기시의 입버릇이 꼭 과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기시는 그 기회와 운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틀어쥐는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시대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민감한 관찰인이었던 것이다.] 기시는 정말 요괴 맞나보다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냉전이라는 호기를 자신들의 권세확대로 이어나가는 데 만주 인맥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넷째로 지적되는 것은, 기시도 박정희도 만주국 건국을 포함해서 전쟁 전의 역사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이제 박정희라는 사람의 경제 모델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 기시가 무엇을 했는지 살펴 보자. [기시는 이미 자유당 의원이 된 첫해, 침체에 허덕이는 일본 경제의 실태를 놓고 중점 산업부문으로의 자원 배분에 의한 자본 축적과, 중공업 진흥에 의한 수출 산업의 육성을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는 한편, 중소영세기업의 보호육성, 사회 보장과 사회 정책의 충실화를 통한 민생의 향상을 주장하고 있었다기본 발상은 만주국의 경사생산 방식에 의한 중공업 진흥과 사회정책의 실험에 있었다박정희 정권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서 한국의 산업 구조를 수입대체형에서 수출주도형으로 바꾸고, 나아가 중화학공업화로 발전시켜 나갔다. 다만 박정희의 한국이 국책으로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노동집약 산업을 발전시킨 것은 만주국과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그것도 군수산업을 타깃으로 한 중화학공업화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고, 자주국방을 지향한 중화학 공업화라는 점에서 만주국과 공통점이 있다 ]


무조건 박정희 정권이 기시를 따라했다고 말할 것은 아니다. 그들도 고민했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했다. 하지만, 그들이 잘했다고 말을 듣는 많은 부분은 그 사람들이 남들과 다른 통찰력이나 분석의 눈을 가졌다고 평가해줄 만큼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있으면서 느끼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들에게는 큰 성장판이 아니었을까? [정권 초기의 경제 정책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는데, 경제를 담당할 사람이 부족한 군부 세력이 처음부터 그런 명확한 전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정책은 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간섭이라는 대외 압력과 국내 재계의 요구라는 대내 조건 속에서 수정되며 시행착오를 거쳐 방향을 잡아 나갔다.]


이제 박정희 정권의 철학의 하나인 근대화를 힘껏 파보자.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 논리로서 효율화된 동원과 노동, 근검 절약, 집단주의, 욕망의 절제 등을 국민에게 요구했다. 천리마 운동을 통해 자력 갱생과 혁명의식을 붇돋움으로써 사회의 조직화가 침투되는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정신 혁명은 빠뜨릴 수 없었다. 이러한 의식혁명운동의 중심 존재로 유신체제를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떠받친 인물이 전전에 만주에서 활동한 이선근이다. 이선근은 만주에 모든 것을 걸었고, 전후에는 서울대 교수가 되었으며, 이승만 정권에서는 문교부 장관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박정희 정권에서도 권력층을 향한 역사 교육을 담당하는 등 여러모로 중용된 인물이다. 와세다 대학에서 게무야마 센타로나 쓰다 소키치의 영향 아래 역사학을 공부한 이선근은 전후에 자신이 경영하던 신문에 <화랑도 연구>라는 글을 연재했는데, 그것이 건국 이념을 요구하는 당시의 정세 속에서 평판을 얻어 국방부의 정훈국장으로 초빙된다. 화랑은 신라시대에 청년들의 수양과 훈련을 맡은 조직으로, 전시에는 전투부대로서 국가통일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다는 사실에서 이선근은 화랑도를 국가 이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화랑도에서 민족정신의 기원을 찾는 신라중심사관은 북한과 대치하며 민족사관을 정립해서 이데올로기 면에서 국내체제를 다잡으려는 박정희 정권에게 유용했다. 이선근은 박대통령에게 국사를 진강하고 또 국무위원 일동에게도 국사를 강론하여 민족 주체사관에 입각한 국사교육을 강화하는 국책수립에 적극 찬동하고,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새로운 국가관과 유신정권의 구현을 위해서 칠순의 노구를 돌보지 않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철학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에서 만주국의 잔재가 얼마나 스며들어왔는지를 보면서 한심함과 놀라움을 같이 느꼈다. […만주국에서의 비합리 정신주의가 한국사회에도 만연하게 된다…1분간 묵념, 행진, 시국강연 청강, 선전영화 시청, 포스터 작성, 학생웅변대회, 집회와 대운동회 참가 등의 국가의례이러한 것들은 원래 1930년대 만주국의 국가행사재건체조라고 해서 시작한 라디오 체조의 모델은 만주국의 건국체조반공대회나 멸공대회도 거슬러 올라가면 만주국에서 수없이 열린 반공대회건국정신 함양을 위해 만주국 교육청이 주최한 학생웅변대회는 수십년 후 한국에서 실시되는 학생웅변대회의 원형가정의례준칙은 낭비나 허례의식을 삼가는 협화식 결혼식을 상정하고전국 각지에 세워지는 동상 역시 만주국에서 제사지낸 공자나 관우의 재래일 따름만주국에서 행해진 규율화의 방법을 엄밀하게 반복할 수 있는 국가는 박정희 정권기의 한국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새마을 운동에는 온갖 규율화의 방법이 동원오후 6시에 사이렌이 울리는 국기하강식에서는 길을 가는 사람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춰서서 황국 신민의 서사에 해당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


마지막으로 박정희의 평가를 들여다보자. [박정희의 돌격 근대화는 바로 국가에 의해 지도된 변혁과 위로부터의 고도성장을 의미했다. 그것은 최빈국으로 허덕이던 해방 후의 구식민지를 신흥 산업국가로 변모시키게 되었다. 하지만 위로부터의 변혁은 민주주의 이념을 산 제물로 바침으로써 가능했다. 한국의 현대사는 그러한 이념을 국민 스스로가 정의하고 쟁취해가는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리고 독재자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고 한국은 민주화라는 목표에 도달하면서 독재의 시대는 과거가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박정희 정권은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이제 과거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습관처럼 과거, 아니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렇다면 이미 끝나버린지 30년이 지난, 그 정권의 시절을 보면서 무처 나아졌어야 할 지금을 느껴야 하는게 마땅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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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 베버 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진태원 선생님이 하시는 첫번째 강의에서 쓴 책이다. 베버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분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접하고자 하는 마음을 크게 갖지 않고 있다가, 이번 강의를 통해 접했고, 선입견은 역시 선입견일 뿐이구나라는걸 크게 느꼈다.


여기 정리하는 이 책은, 두개로 나눠져있다. 앞에는 베버의 책에 대한 강의이고, 뒤에는 베버의 책이 나온다. 원문을 읽기에 앞서 해설서가 같이 있다는건 좋은 장점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 적는 소감은 주로 뒷부분인 베버의 책에 맞추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무엇일까 라는 묵직한 질문을 베버는 다음의 질문으로 정리한다. [정치를 소명이자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일까? [근대 국가란, 국가만이 하는 고유 업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특수한 수단을 준거로 정의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그 수단이란 곧 물리의 폭력/ 강권력이다.] 여러 전제와 조건을 다 짤라서 말한다면, 수단으로서 폭력이 필요조건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지배에 복종할까? [정치란 권력의 배분과 유지 그리고 권력 이동의 이해 관계가 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정책 결정을 제약하고 해당 관료의 업무를 규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권력을 갖기 위한 부분은? 관료의 업무를 규정한다는 투로 관료만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지배의 정당화는 어디서 찾을까?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에는 세가지가 있다…(1) 첫째는 '인간 역사 속 영속의 존재', 즉 아득한 옛날부터 통용되어 왔으며 사람들은 이를 지키려는 성향을 갖는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는 신성화된 관습의 권위다. 과거 가부장과 군주가 행사하던 전통 지배가 이 유형에 속한다. (2) 다음으로 비범한 개인의 천부 자질, 즉 카리스마에 의거한 권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신의 계시와 영웅주의 혹은 그가 가진 다른 자질을 이유로 한 개인 지도자에 대한 완전한 헌신과 신뢰를 보내는 것을 뜻한다. (3) 마지막으로 합법성에 의거한 지배가 있다. 이는 제정된 법규의 타당성에 대한 신뢰, 합리성을 갖춘 절차에 따라 부여된 객관의 권한, 그리고 법규가 규정하고 있는 의무를 기꺼이 수행한다는 복종의 관념에 따른 지배로서, 근대 공무원을 비롯해 그와 유사한 형태로 권력을 갖게 된 사람에 의해 행사되는 지배 형태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두 번째 유형, 즉 복종자들이 지도자가 갖는 순수한 개인 카리스마에 추종함으로써 성립되는 지배 유형이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인 소명 beruf이라는 개념은 바로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서는 마치 역사의 발전 흐름과 짝지운 듯하다. 21세기의 우리에게는 셋째가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베버가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면 그는 얼마나 그의 시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지 조금은 공감을 하고 싶다.


지배의 조직화로서 행정의 조건은 무엇일까? [(지배를 조직화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든 통치자는 물리의 폭력/강권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물질 재화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점은, '통치자=폭력/강권력'가 아닌, '통치자=재화=폭력/강권력'으로 중간에 매개체를 두고 지배의 조직화를 풀어나간다. 행정 관점에서 국가를 구분해보면 [국가 조직은 서로 다른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는 두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행정관리들이 화폐, 건물, 전쟁 물자, 마차, 말과 같은 행정 수단을 독자 소유한다는 원리다. 둘째는 행정관리를 행정 수단으로부터 분리한다는 원리로서, 그것은 마치 오늘날 자본주의 기업 내에서 사무직 봉급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것과 동일한 방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권력자가 자신의 지시에 의해 일을 하는 사람을 통해 직접 행정을 관리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에 있다…근대 국가의 발전은 어디서나 군주가 그와 공생해 왔던 계층의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때까지 이 계층은 행정 수단, 전쟁 수단, 재정 수단 그리고 기타 정치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재화를 직접 소유한 계층이었다. 그 과정 전체를 보면 독립 생산자의 생산 수단을 점차 박탈하는 것으로 진행된 자본주의 기업의 발전과 아주 유사하다…다시 말해 오늘날의 국가에서는 물질 바탕의 행정 수단을 행정 관리, 즉 행정 관료 내지 행정 직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이 철저하게 관철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국가라는 개념에서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마치 '자본론의 행정/정치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해지는 건, 공공이건 시장경제 영역이건 그 안에서 몸바쳐 일하는 계층은 이제 몸뚱아리를 빼곤 남은게 없는 힘든 상황으로 밀쳐내졌다는 점이다. 토지나 봉건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자유는 근대에서 성공한 누군가에게만 진정한 자유를 뜻하는 것일뿐이었다.


[근대 국가는 제도화된 통치 조직이다. 이 통치 조직은 한 특정하 영토 내에서, 지배의 수단인 정당한 물리 폭력/강권력을 독점하는 데 성공한 지배 조직이다. 근대 국가는 이런 독점을 통해 모든 물질 기반 통제 수단을 지도자의 수중으로 통합시키고, 과거 이 물질 기반 통치 수단에 대해 독자 처분권을 가졌던 모든 신분제 기구의 권한을 박탈하고는, 그 대신 국가 자신을 최정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국가가 강권력을 독점하도록 이론을 만들고 실제 집행해서 성공한 그들의 통찰력이 얼마까지 앞을, 옆을 보았는지 알기 힘들지만, 어떻게 이런 전략이 나왔고, 힘을 얻어서 서구의 근대를 움켜쥐었는지는 곱씹을 값어치가 매우 높다.


근대 정치에 세 가지 경향을 말하고, (1) 그 첫 번째는 새로운 직업 정치가의 출현이다. [정치를 전업으로 하는 새로운 유형의 정치가들은 행정 수단의 박탈을 둘러싼 투쟁 과정에서 군주의 편에 섰고, 그의 정책을 집행해 주었으며 이를 통해 한편으로 자신의 생계기반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 자신의 삶에 이상이 넘치는 의미를 부여했다.] 결국 봉건제에서 전제 군주로 넘어 가는 시기에 발생한 새로운 서비스 분야가 나왔고, 이때 왕이 서있는 쪽으로 줄을 서서 이를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말인듯 한데…[정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경제의 속박이 없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계를 버는 일에 자신의 생산 에너지와 생각의 모두 혹은 상당 부분을 지속 쏟아 넣지 않고도 자신의 수입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 활동에 묶여 있지 않은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 생활자, 즉 왅완전한 불로 소득 생활자이다.] 직업 정치가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조건으로 다시 봉건시대 상층부를 끌고 온다. 의도는 알겠으나,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내용은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는 느낌이다. (2) 두 번째는 전문 관료제의 발달이다. [근대 관료층의 발전이들은 장기간의 예비교육을 통해 전문 훈련을 받은 고급 정신노동자로 발전했으며, 청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도로 발전된 신분상 명예심을 갖췄다. 이런 신분상 명예심이 없었더라면 반드시 엄청난 부패와 저속한 속물근성이 만연했을 것이다.] 정신 교육, 그에 따른 명예심이 근대 관료제도 발전에 중요하다. 즉 계몽의 측면을 관료제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전쟁 기술의 발전은 전문 장교를 낳았고 사법 절차의 정교화는 훈련된 법률가를 낳았다. 16세기에 들어와 발전된 국가에서는 이 세분야, 즉 재정, 군사, 법률 분야에서 전문 관료제가 완전히 장착된다. 그리고 이 전문 관료층은 트구건 신분 계층에 대한 군주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분 계층에 대한 절대 군주의 이런 승리와 동시에 군주는 자신의 절대 지배권을 서서히 전문 관료층에 넘겨주기 시작했다.] 관료는 절대군주의 헤게모니 장악에 도우미 역할에 머물렀으나, 점차 군주의 역할을 대체하는 군주와 동등한 수준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근대 정당 체제는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 내지 권력을 다루기 위한 방법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에 따라 정치라는 일은 이제 훈련을 필요로 하는 업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공 기능이 두개의 뚜렷한 범주로 나뉘게 되었다. 비록 두 범주 간의 차이가 그렇게 절대시할 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하나는 전문 관료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관료이다.] 절대왕정이 민주정이나 입헌제로 권력을 확보하는 그 목적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리고 절대왕정에서 왕의 손에서 까딱거리는 권력이라는 공은 정당제에서 어떻게 그 공을 가져와서 놀지에 대한 방법으로 고민의 차원이 바뀌었다. [이 점에서 현재(1917년 혁명 이후의 러시아 내지 1918 11월 독일 혁명의 여파로 새롭게 등장한) 혁명 국가에서도 근본이 새로운 것은 없다. 행정은 완전한 아마추어들 손으로 넘겨졌고, 이들 아마추어는 전문 훈련을 받은 관료를 행정 집행을 위한 두뇌와 수족 이상으로는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체제가 안고 있는 어려움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하지만 그 문제는 오늘 우리가 관심 가질 만한 것이 못된다.] 참 고민스러운 대목이 여기다. 해방 이후 한국에 친일 관료/군인/경찰이 득세한 논리가 이것 아닌가? 앞서의 세련된 정치 흐름을 아마추어 상태로 떨어뜨리면 통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그 논리 말이다. 하지만 전문 관료 또한 절대 왕정 기에 아마추어 시기를 거쳐서 그 자리에 올라왔을 터이다. 결국 밥그릇 싸움으로 환원해야 하는가? (3) 세 번째는 직업 정치가의 유형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전문 관료는 데마고그가 아니며 데마고그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데마고그가 되려 한다면 대체로 그는 매우 나쁜 데마고그가 되고 만다진정한 관료는 그의 본래 사명에 비춰 볼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단지 '행정'만 하게 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비당파의 자세로 행정을 해야 한다관료는 분노도 편견도 없이 그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정치가, 지도자와 그의 추종자들이라면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것, 즉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 당파성, 투쟁, 열정 등은 정치가,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활동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관료는 전문성을 갖춘, 큰 주제를 숙제로 받아서 그 뼈대와 살을 채우는 행정 기계가 바른 모습이라는 말인가?


이제 정당체제로 넘어가서, 몇 가지 민주주의 정당체제를 논의한다. (1) 첫째로 명사 정당체계는 [명사들의 지배와 의원들이 주도하는 역할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의회 밖에 있는 전업 정치가들이 정당 조직을 손에 넣었다. 이들은 사실상의 사업가일 수도, 아니면 고정 월급을 받는 관료일 수도 있다.] 한국은 어디쯤일까? 명사의 지배는 한국에서도 막을 내렸는가? 아니면 전업 정치가들이 명사가 되려고 아직도 노력하는 그런 수준일까? (2) 두 번째는 지도자와 머신이 주도하는 정당 체제이고 여기서 베버가 강조하는 카리스마 지도자가 나온다. [사람의 기구-머신-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 이 기구를 주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의회 의원을 제어할 수 있고 상당 정도 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정당 지도자를 선발하는 데 있어서 특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무엇보다 추종자들은 지도자가 가진 개성스러운 힘이 선거전에서 데마고그로서의 효과를 발휘하여 당에게는 지지표와 통치 권한, 즉 권력을 가져다주고, 자신과 같은 지지자들에게는 더 많은 보상의 기회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상으로 잡은 기준에서 보면, 그들을 추동하는 힘의 하나는 진부한 것들로 구성된 한 정당의 추상화된 정책 프로그램이 아니라 어던 한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에서 얻는 만족감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도력이 가진 카라스마의 요소다.] 카리스마 지도자는 떡고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야 한다. 영국의 코커스 시스템은 건너뛰고 (4) 미국은 엽관 체제가 나온다. 승자 독식 프로그램이다. [미국에서 대중투표제의 머신이 그렇게 일찍부터 발전했던 이유는,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만, 대중 직접 투표의 원리로 선출된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자 관직 임면권의 최고 책임자였으며, 삼권 분립의 결과로 직무 수행에 있어 의회로부터 거의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 승리의 보상은 특히나, 관직에 따른 봉록의 형태로 전리품을 분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쉬웠다. 그 결과는 엽관제로서, 그것은 앤드루 잭슨에 의해 체계를 갖추고 하나의 원칙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제 봉건주의의 옅은 경험, 왕이 멀리 떨어져있다던가 이런 상황에서 임기제 왕과 같은 대통령 제도가 미국에서 튀어나오고, 그 대통령은 엽관제를 통해 자기의 심복을 잘 챙기게 되었다. [승리한 후보의 추종자에게 모든 연방 관직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엽관제가 작용한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정당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경합하는 정당들이 일관된 원칙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관직 사냥꾼을 위한 조직이고 선거전이 있을 때마다 득표 가능성에 따라 정책 프로그램을 바꿔 버린다.] 오늘날 한국에도 유효한 말일까? [이런 제도에 기반을 둔 엽관제가 미국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의 문화가 젊어서 순수한 아마추어 국가 운영을 관용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에 충실히 봉사했다는 자격 이외에는 어떤 자격도 제시할 필요가 없는 30만에서 40만 명의 파당 정치인들이 있는 상황이란, 당연히 엄청난 폐단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아직까지도 무한정한 경제 기회를 가진 나라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미국의 엽관제 성공은 환경(자원)과 국민의 성향(때묻지 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는 어떤 확고한 정치 원칙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원칙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무엇으로 표를 끌어모을까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그의 교육 수준이 상당히 낮은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보통 흠잡을 데 없이 바르다. 다만 정치 윤리면에서 그는 기존의 통상 차원의 정치 윤리에 적응하고 있을 뿐인데, 이는 우리 독일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통화 퇴장 시기에 경제 윤리 영역에서 취했던 태도와 다를 바 없는 정도다.] 베버는 역사가 짧은 미국을 낮춰 보는게 아닐까? [미국에서 정당들은 뚜렷한 자본주의 노선에 따라 운영된다. 그들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긴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그들은 태머니홀과 같이 지극히 안정된 정치 클럽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들 정치 클럽은 특히 지방자치 행정기구들을 정치 통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5) 다섯 번째는 독일의 관료 체제다. [독일 정치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 요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 번째 요인은 의회의 무기력함이다두번째 요인은 훈련된 전문 관료층이 독일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했다는데 있다세 번째 요인은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는 정치 신념을 가진 이념 정당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을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해당되지 않을까? 마지막은 정치제제의 전망-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직업 정치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내면의 즐거움은 어떤 것이 있고, 이 길을 택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개인으로서 자격 조건은 무엇인가? 정치가라는 직업은 우선 권력감을 제공한다직업 정치가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자신이 어떤 자질을 갖춰야 이 권력을 제대로 다루고, 그래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성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그 권력이 제아무리 좁고 특수한 업무 분야에 한정된 권력일지라도 말이다. 이 질문은 우리를 이제 윤리 문제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어떤 종류의 인물이라야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일 권리를 갖는가를 질문한다는 것은 곧 윤리 문제를 꺼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정치가와 윤리라는 주제다. 먼저, 정치가에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정치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가지 자질이 중요하다. 열정 passion, 책임감 sense of responsibility, 균형된 판단  judgement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화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와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에 대한 열정의 헌신을 가리킨다대의에 대해 헌신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끈는 결정할 만한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된 판단이다균형된 판단은 내면의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삶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균형된 판단이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문득 신화에 나오는 신과 주역에 나오는 다양한 괘, 사상 의학에 등장하는 네가지 구분법이 떠오른다. 모든 걸 다 갖춘 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열정의 정치가를 그저 불모의 흥분 상태에 있는 정치 아마추어들과 구분하게 해주는 것은, 영혼에 대한 자기 통제력이 있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거리감에 스스로 익숙해져야만 성취될 수 있다.] 정치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인가? 그리고 그 예술은 신의 영감을 가져와야 가능할걸까? [권력 추구가, 온전히 대의에 대한 헌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결여한 순전히 개인의 자기도취를 목표로 하는 순간, 그의 직업이 갖는 신성한 정신에 대한 죄악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정치 영역에서는 궁극으로 두 종류의 치명스러운 죄악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의 결여와 책임성의 결여가 그것이다.] 자기도취가 죄악이라면, 수많은 정치가가 죄인이 될 성 싶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항상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상 아무리 당당한 정치 성공이라 하더라도 이 성공에는 사실 피조물 특유의 공허함이라는 저주가 드리워질 것이다.] 내용이 뒤로 갈수록 정치라기 보다 종교의 엄숙함이 엄습한다.


정치가의 윤리에는 대의와 신념 그리고 도덕이 있다. [당당하고 냉철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전쟁이 끝났을 때 늙은 아낙들처럼 누구 때문이라며 책임자를 색출하러 다니는 대신에 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전쟁에서 우리가 졌고 당신들이 이겼다. 그 문제는 끝났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실질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할지를 염두에 두고 그리고 승자가 짊어져야 할 미래에 대한 책임을 고려하여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자정치에 윤리에 관한 요구를 부과하는 문제와 관련해, 정치란 하나의 특수한 수단, 다시 말해 폭력/강권력을 내포하고 있는 권력이라는 수단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볼셰비키와 스파르타쿠스의 이데올로그들 역시 바로 이런 정치 수단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 독재가와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음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지배와 구체제 권력 집단의 지배는 인물이 교체되었다는 사실과 아마추어리즘을 빼고 나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의 글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우주론의 사랑의 윤리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지만 정치가는 정반대의 격언, 즉 너의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폭력이 답이란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폭력을 정치의 수단으로 쓰면서 악을 잘 다루라는 말일 것이다. 정치판은 분명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말할만큼 그렇게 깨끗한 곳이 아닐테니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윤리가 나온다. [윤리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이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하는 두 원칙을 따른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다그러나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상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리 측면에서 선한 목적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윤리 차원에서 위험한 수단과 부정의 결과를, 언제 그리고 어느 정도 정당화해줄 수 있는지를 가리켜줄 수 있는 그 어떤 윤리도 세상에는 없다.] 그렇다면 정치에 있어 윤리는 필수의 사항이 아니며, 그렇다고 필수가 아니라고 말할 어떤 기준을 갖고 있지도 않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우리가 목적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원칙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어떤 수단을 정당화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윤리 계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개의 윤리가 같지 않고 상충도 아니고 때로는 같을 때도 있고 때로는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모른다. 결국 두개의 윤리는 여러 윤리 중 대표성을 갖고 있어서 선택된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윤리 자체에 대한 고민을 아주 깊숙이 가기에는 정치의 속성이 이를 허용하지 못할지 둘 중 어떤 것으로 설명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정치 윤리를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 윤리는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모든 종교가 이 문제와 씨름했고 다만 그것이 가져온 성취의 정도가 종교마다 달랐을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 조직체가 쥐고 있는 정당한 폭력/강권력이라는 특수한 수단 바로 그 자체가 정의와 관련된 모든 윤리 문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강권력이라는 이 특수한 수단과 손을 잡은 자는 누구든 그것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든 혁명이든 신념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특히나 그러하다.] 정치와 윤리는 모두 우리 삶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정치는 어떤 보편의 가치를 말하기 어렵고 그때 그때의 상황을 잘 반영해야 한다. 반대로 윤리는 (종교처럼 아주 극대화된 모습까지 밀고 나가지 않더라) 어떤 보편의 선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런 두가지를 하나로 융합하려는 시도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을 아직까지도 썩 그렇게 그럴듯한 모습의 가치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베버의 결론-비관의 현실 속 정치가-에서 몇 가지 정리할만한 내용이 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윤리의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중요한 것은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런 삶의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정치란 열정과 균형된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삶들이 없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온전히 옳고 모든 역사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느낀 바를 조금은 비관조로 적어보았다. 정치에는 선악과 좋고 나쁨의 판단이 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좀 지난 책은 아무리 고전이라도 지금과 시간의 거리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또한 글쓴이가 처한 때와 터(시공간)의 모습이 우리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이런 것까지 다 반영해서 오늘날 우리의 문제 해결과 앞으로 어떻게 가야할지의 그림에 슬기롭게 우겨 넣는다는 게, 차라리 이런 생각이 없이 하얀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반드시 도움을 준다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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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반격 - 더 이상 중국 보너스는 없다
중앙일보 중국팀 지음 / 틔움출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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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중국은 하나의 중요한 화두이자 블랙홀이고, 관계맺기의 대명사이자 우리를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이 책은 그런 중국의 경제와 정치, 사회의 관점으로 오늘날의 중국을 말한다. 무려 9명의 기자가 이 책의 이야기꾼이고, 그 안에 인터뷰한 중국과 한국의 사업가나 정치가는 꽤 많이 등장한다. 잘나가는 신문사가 자기가 보유한 자원을 잘 이용해서 나름 중국통의 자리에서 오늘날의 중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와는 다른 중국 이야기를 읊어나간다.


언제부턴가 중국은, 우리의 상품을 굽신거리며 가져가서, 한국 제품의 기술력에 감동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그런 나라가 더 이상 아니라고 한다. 인구는 옛날 그 언제적부터인지 이미 우리를 압도했고, IT라고 불리는 정보통신 산업에서도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용자/구매자 수와, 그들에게 상품과 서비스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 또한 우리의 상상을 훌쩍 벗어나버리는 크기로 등장한다알리바바의 비즈니스 규모는 이미 미국에서조차 이 정도는 나오지 않을 수준이다. 여기에 샤오미, 화웨이 등의 정보통신 회사는 글로벌 시장에서 IT강자로서 자리매김한 한국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그 위치를 끌어내리고 있다. 그 저변에는 한국의 창업과는 몇백배나 차이나는 중국의 창업(창커)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그 뒤에는 혁신정신이 있다(대중창업 만중창신 - 리커창). 그리고 그 뒤에는 만드는 경제에서 소비하는 경제로, 이제 후기자본주의의 프레임워크로 중국 지도층의 방향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온다.


중국은 그간의 경제 성장 그리고 지난 한나라와 당나라의 영광 재현을 위해 일대일로라는 정책이자 물류망을 엄청난 속도로 확장 중이다. 그 성장을 위한 담론으로 시진핑은 신창타이(新常態: New Normal)을 던지고, 그 핵심 사상을 개혁을 통한 성장으로 잡았다.[중국은 국유기업 독점 분야를 민간에 개방하고, 시장을 옥죄는 행정 규제를 과감히 풀었다. 제조업 보다는 서비스업, 투자보다는 소비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겠다는 구조개혁과 일맥 상통한다길은 오직 하나, 개혁뿐이다. 시진핑은 ‘3개 전변을 말한다. 투자가 아닌 소비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아내고,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을 육성하고, 산업고도화를 통해 투입의존형 성장 패턴을 탈피하겠다는 뜻이다. 3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재균형 작업으로 시진핑 경제의 뼈대이기도 하다. 소비 시장을 키우지 않고는 중진국의 함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이 분석에 얼마의 객관성을 주어야 할까? 중진국, 선진국이라는 잣대를 아직 엄연히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외치는 나라에 들이대고, 측정하고, 해석하는 이 명확한 오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위에서 소비의 강조를 말했으나, 세계의 공장이자 생산의 중심에 있는 중국은 제조에서의 리더쉽을 갖기 위해 독일, 일본 등 제조 강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자본주의 체제는, 빨리 점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의 체제이고, 중국은 그걸 해냈다!는 자신감을 보이는게 그들이 가려는 방향성이 아닐까? 1949년에 이룬 사회주의는 경제 체제의 발전에 따른 운동의 결과는 비록 아니나, 적어도 과거 봉건 주의를 뛰어 넘었다. 그리고 한동안의 시행착오를 통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그들과 경쟁하고, 그 결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빠르게 G2의 역사를 이룩하고 이제 G1으로 발돋움중이다, 이런 식이 그들이 꿈꾸는 바가 아닐까 싶다.


경제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가져가야 할 중국과의 다음 단계 비즈니스는 중국과의 협업, 그리고 화장품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공략 등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기업과 가계 부채, 부동산 버블, 중국 리스크, 정부의 개입(보이는 손)등을 꼭 고려할 것들로 정리하였다.


책의 결론을 보면, 신문사에서 나온 책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얇고 넓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이 책에도 거의 판박이로 느껴지고, 그러다보니 생산에서 소비 중시로의 변화 등 경제나 정치 현상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철학 고민과 원천을 파헤치지 못하고 지극히 우리 입장(자본주의?)으로 소화해서 말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전처럼 땅집고 헤엄치는 수준은 아니지만, 충분히 들어갈 만한 매력이 있다고 한국의 기업가나 기업을 꿈꾸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으나, 그 얘기는 어느 때에 적용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항상 맞는 얘기로 보인다. (‘왜 지금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잘 안보인다!. 그냥 이런 저런 사례와 인터뷰를 해보니 그런게 아닐까 싶다고 추정된다.) 내가 요즘 누구의 말처럼, 장난(사업을 위한 지식 전달)에 죽자사자 덤벼드는걸까(경제와 철학을 들먹이며?) 또한 중국의 경제는 항상 자본주의로 치환시켜서 말해가는 한국의 언론을 보면서 게으름(사회주의 측면을 거부하던 모르고 넘어갔던)과 직무 유기(독자의 앎의 권리를 단절시킴)의 오명을 안겨드리는 걸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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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9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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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가 이 책에서 갖고 있는 원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1) 판단 가운데 어떤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되, 어떤 것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2)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 3) 훌륭하게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과 정의롭게 사는 것은 같다 4)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 5) 정의롭지 못한 짓을 당하더라도 보복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 6) 남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7) 해를 입더라도 보복으로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8)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합의한 것들이 정의롭다면, 그는 그것을 이행해야 한다.]


작품 해설을 보면서 죽음에 처한 소크라테스가, 그동안 갖고 있던 자신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주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찰학을 금하는 법률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상위의 명령으로서 철학할 것을 지시하는 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주저없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쪽을 택하고자 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로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의 명령이란 단순히 종교의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종교 신념을 위해 법률 명령에 불복하려고 했다기보다, 철학함이라는 보편으로 가치있는 활동을 위해 그렇게 했다. 기르기 그가 지켜 내고자 한 철학 활동의 자유는 곧 사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한적은 없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것은 악법도 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런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크리톤 후반부에서는 의인화한 법률이 법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연설을 하지만, 이것은 법의 명령과 신의 명령이 상충할 때에도 오직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변론이나 크리톤에서 볼 때 그 두 명령이 상충할 때는 상위 명령인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작품 해설 이후 크리톤 본문을 보면, 거의 하나의 사상을 갖고 이렇게 저렇게 변주하는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변론술이 나온다. 학교다닐때 산파술이니 하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어진 이 방법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상대의 무지를 깨우치게 했음은 그 유명한 사례다. [나는 이제 처음이 아니라 언제나, 추론해 볼 때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이는 원칙 logos 이외에는 내게 속해 있는 다른 어떤 것에도 따르지 않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네. 그러니 내게 이런 운명이 닥쳤다고 해서 내가 이전에 말한 원칙을 지금 내던져 버릴 수는 없네. 그것들은 내게 이전과 거의 같아 보이며, 나는 바로 그 동일한 원칙을 이전처럼 우선시하고 존중하네]


그런데 이런 친구가 옆에 있을때 과연 품어줄 수 있을 만큼 넓은 그릇을 갖고 있기가 쉬울까? 소선생님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말이 갖고 있는 맛의 깊이가, 그 내용의 묵직함으로 인해 되씹기를 수없이 해야 하는 그런 내공보다는, 뛰어난 말빨로 내말 들어봐. 맞지? 아님 더 생각해봐. 거봐!’과 같은, 조금 과하게 말하면 지식 폭력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 더없이 훌륭한 친구여, 우리는 다수의 사람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그토록 크게 주목할 게 아니라, 정의로운 것들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과 진리 자체가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주목해야 하네. 그러니 우선, 자네가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그리고 이것들과 상반된 것들에 관해 다수의 판단에 주목해야 한다고 권고를 할 때 자네는 옳게 권고하는 것이 아니네] 그리고 이렇게 끝없는 설파를 통해 결국 [소크라테스, 나는 할 말이 없다네]라는 항복의 말을 받고 자신의 최후를 향해 더 나아가면서 이 책의 끝을 마무리한다 [그러면 이쯤 해 두게, 크리톤. 그리고 신께서 이렇게 하시니, 그대로 하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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