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 베버 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진태원 선생님이 하시는 첫번째 강의에서 쓴 책이다. 베버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분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접하고자 하는 마음을 크게 갖지 않고 있다가, 이번 강의를 통해 접했고, 선입견은 역시 선입견일 뿐이구나라는걸 크게 느꼈다.


여기 정리하는 이 책은, 두개로 나눠져있다. 앞에는 베버의 책에 대한 강의이고, 뒤에는 베버의 책이 나온다. 원문을 읽기에 앞서 해설서가 같이 있다는건 좋은 장점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 적는 소감은 주로 뒷부분인 베버의 책에 맞추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무엇일까 라는 묵직한 질문을 베버는 다음의 질문으로 정리한다. [정치를 소명이자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일까? [근대 국가란, 국가만이 하는 고유 업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특수한 수단을 준거로 정의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그 수단이란 곧 물리의 폭력/ 강권력이다.] 여러 전제와 조건을 다 짤라서 말한다면, 수단으로서 폭력이 필요조건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지배에 복종할까? [정치란 권력의 배분과 유지 그리고 권력 이동의 이해 관계가 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정책 결정을 제약하고 해당 관료의 업무를 규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권력을 갖기 위한 부분은? 관료의 업무를 규정한다는 투로 관료만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지배의 정당화는 어디서 찾을까?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에는 세가지가 있다…(1) 첫째는 '인간 역사 속 영속의 존재', 즉 아득한 옛날부터 통용되어 왔으며 사람들은 이를 지키려는 성향을 갖는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는 신성화된 관습의 권위다. 과거 가부장과 군주가 행사하던 전통 지배가 이 유형에 속한다. (2) 다음으로 비범한 개인의 천부 자질, 즉 카리스마에 의거한 권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신의 계시와 영웅주의 혹은 그가 가진 다른 자질을 이유로 한 개인 지도자에 대한 완전한 헌신과 신뢰를 보내는 것을 뜻한다. (3) 마지막으로 합법성에 의거한 지배가 있다. 이는 제정된 법규의 타당성에 대한 신뢰, 합리성을 갖춘 절차에 따라 부여된 객관의 권한, 그리고 법규가 규정하고 있는 의무를 기꺼이 수행한다는 복종의 관념에 따른 지배로서, 근대 공무원을 비롯해 그와 유사한 형태로 권력을 갖게 된 사람에 의해 행사되는 지배 형태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두 번째 유형, 즉 복종자들이 지도자가 갖는 순수한 개인 카리스마에 추종함으로써 성립되는 지배 유형이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인 소명 beruf이라는 개념은 바로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서는 마치 역사의 발전 흐름과 짝지운 듯하다. 21세기의 우리에게는 셋째가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베버가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면 그는 얼마나 그의 시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지 조금은 공감을 하고 싶다.


지배의 조직화로서 행정의 조건은 무엇일까? [(지배를 조직화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든 통치자는 물리의 폭력/강권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물질 재화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점은, '통치자=폭력/강권력'가 아닌, '통치자=재화=폭력/강권력'으로 중간에 매개체를 두고 지배의 조직화를 풀어나간다. 행정 관점에서 국가를 구분해보면 [국가 조직은 서로 다른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는 두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행정관리들이 화폐, 건물, 전쟁 물자, 마차, 말과 같은 행정 수단을 독자 소유한다는 원리다. 둘째는 행정관리를 행정 수단으로부터 분리한다는 원리로서, 그것은 마치 오늘날 자본주의 기업 내에서 사무직 봉급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것과 동일한 방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권력자가 자신의 지시에 의해 일을 하는 사람을 통해 직접 행정을 관리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에 있다…근대 국가의 발전은 어디서나 군주가 그와 공생해 왔던 계층의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때까지 이 계층은 행정 수단, 전쟁 수단, 재정 수단 그리고 기타 정치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재화를 직접 소유한 계층이었다. 그 과정 전체를 보면 독립 생산자의 생산 수단을 점차 박탈하는 것으로 진행된 자본주의 기업의 발전과 아주 유사하다…다시 말해 오늘날의 국가에서는 물질 바탕의 행정 수단을 행정 관리, 즉 행정 관료 내지 행정 직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이 철저하게 관철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국가라는 개념에서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마치 '자본론의 행정/정치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해지는 건, 공공이건 시장경제 영역이건 그 안에서 몸바쳐 일하는 계층은 이제 몸뚱아리를 빼곤 남은게 없는 힘든 상황으로 밀쳐내졌다는 점이다. 토지나 봉건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자유는 근대에서 성공한 누군가에게만 진정한 자유를 뜻하는 것일뿐이었다.


[근대 국가는 제도화된 통치 조직이다. 이 통치 조직은 한 특정하 영토 내에서, 지배의 수단인 정당한 물리 폭력/강권력을 독점하는 데 성공한 지배 조직이다. 근대 국가는 이런 독점을 통해 모든 물질 기반 통제 수단을 지도자의 수중으로 통합시키고, 과거 이 물질 기반 통치 수단에 대해 독자 처분권을 가졌던 모든 신분제 기구의 권한을 박탈하고는, 그 대신 국가 자신을 최정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국가가 강권력을 독점하도록 이론을 만들고 실제 집행해서 성공한 그들의 통찰력이 얼마까지 앞을, 옆을 보았는지 알기 힘들지만, 어떻게 이런 전략이 나왔고, 힘을 얻어서 서구의 근대를 움켜쥐었는지는 곱씹을 값어치가 매우 높다.


근대 정치에 세 가지 경향을 말하고, (1) 그 첫 번째는 새로운 직업 정치가의 출현이다. [정치를 전업으로 하는 새로운 유형의 정치가들은 행정 수단의 박탈을 둘러싼 투쟁 과정에서 군주의 편에 섰고, 그의 정책을 집행해 주었으며 이를 통해 한편으로 자신의 생계기반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 자신의 삶에 이상이 넘치는 의미를 부여했다.] 결국 봉건제에서 전제 군주로 넘어 가는 시기에 발생한 새로운 서비스 분야가 나왔고, 이때 왕이 서있는 쪽으로 줄을 서서 이를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말인듯 한데…[정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경제의 속박이 없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계를 버는 일에 자신의 생산 에너지와 생각의 모두 혹은 상당 부분을 지속 쏟아 넣지 않고도 자신의 수입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 활동에 묶여 있지 않은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 생활자, 즉 왅완전한 불로 소득 생활자이다.] 직업 정치가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조건으로 다시 봉건시대 상층부를 끌고 온다. 의도는 알겠으나,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내용은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는 느낌이다. (2) 두 번째는 전문 관료제의 발달이다. [근대 관료층의 발전이들은 장기간의 예비교육을 통해 전문 훈련을 받은 고급 정신노동자로 발전했으며, 청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도로 발전된 신분상 명예심을 갖췄다. 이런 신분상 명예심이 없었더라면 반드시 엄청난 부패와 저속한 속물근성이 만연했을 것이다.] 정신 교육, 그에 따른 명예심이 근대 관료제도 발전에 중요하다. 즉 계몽의 측면을 관료제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전쟁 기술의 발전은 전문 장교를 낳았고 사법 절차의 정교화는 훈련된 법률가를 낳았다. 16세기에 들어와 발전된 국가에서는 이 세분야, 즉 재정, 군사, 법률 분야에서 전문 관료제가 완전히 장착된다. 그리고 이 전문 관료층은 트구건 신분 계층에 대한 군주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분 계층에 대한 절대 군주의 이런 승리와 동시에 군주는 자신의 절대 지배권을 서서히 전문 관료층에 넘겨주기 시작했다.] 관료는 절대군주의 헤게모니 장악에 도우미 역할에 머물렀으나, 점차 군주의 역할을 대체하는 군주와 동등한 수준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근대 정당 체제는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 내지 권력을 다루기 위한 방법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에 따라 정치라는 일은 이제 훈련을 필요로 하는 업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공 기능이 두개의 뚜렷한 범주로 나뉘게 되었다. 비록 두 범주 간의 차이가 그렇게 절대시할 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하나는 전문 관료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관료이다.] 절대왕정이 민주정이나 입헌제로 권력을 확보하는 그 목적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리고 절대왕정에서 왕의 손에서 까딱거리는 권력이라는 공은 정당제에서 어떻게 그 공을 가져와서 놀지에 대한 방법으로 고민의 차원이 바뀌었다. [이 점에서 현재(1917년 혁명 이후의 러시아 내지 1918 11월 독일 혁명의 여파로 새롭게 등장한) 혁명 국가에서도 근본이 새로운 것은 없다. 행정은 완전한 아마추어들 손으로 넘겨졌고, 이들 아마추어는 전문 훈련을 받은 관료를 행정 집행을 위한 두뇌와 수족 이상으로는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체제가 안고 있는 어려움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하지만 그 문제는 오늘 우리가 관심 가질 만한 것이 못된다.] 참 고민스러운 대목이 여기다. 해방 이후 한국에 친일 관료/군인/경찰이 득세한 논리가 이것 아닌가? 앞서의 세련된 정치 흐름을 아마추어 상태로 떨어뜨리면 통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그 논리 말이다. 하지만 전문 관료 또한 절대 왕정 기에 아마추어 시기를 거쳐서 그 자리에 올라왔을 터이다. 결국 밥그릇 싸움으로 환원해야 하는가? (3) 세 번째는 직업 정치가의 유형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전문 관료는 데마고그가 아니며 데마고그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데마고그가 되려 한다면 대체로 그는 매우 나쁜 데마고그가 되고 만다진정한 관료는 그의 본래 사명에 비춰 볼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단지 '행정'만 하게 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비당파의 자세로 행정을 해야 한다관료는 분노도 편견도 없이 그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정치가, 지도자와 그의 추종자들이라면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것, 즉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 당파성, 투쟁, 열정 등은 정치가,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활동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관료는 전문성을 갖춘, 큰 주제를 숙제로 받아서 그 뼈대와 살을 채우는 행정 기계가 바른 모습이라는 말인가?


이제 정당체제로 넘어가서, 몇 가지 민주주의 정당체제를 논의한다. (1) 첫째로 명사 정당체계는 [명사들의 지배와 의원들이 주도하는 역할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의회 밖에 있는 전업 정치가들이 정당 조직을 손에 넣었다. 이들은 사실상의 사업가일 수도, 아니면 고정 월급을 받는 관료일 수도 있다.] 한국은 어디쯤일까? 명사의 지배는 한국에서도 막을 내렸는가? 아니면 전업 정치가들이 명사가 되려고 아직도 노력하는 그런 수준일까? (2) 두 번째는 지도자와 머신이 주도하는 정당 체제이고 여기서 베버가 강조하는 카리스마 지도자가 나온다. [사람의 기구-머신-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 이 기구를 주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의회 의원을 제어할 수 있고 상당 정도 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정당 지도자를 선발하는 데 있어서 특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무엇보다 추종자들은 지도자가 가진 개성스러운 힘이 선거전에서 데마고그로서의 효과를 발휘하여 당에게는 지지표와 통치 권한, 즉 권력을 가져다주고, 자신과 같은 지지자들에게는 더 많은 보상의 기회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상으로 잡은 기준에서 보면, 그들을 추동하는 힘의 하나는 진부한 것들로 구성된 한 정당의 추상화된 정책 프로그램이 아니라 어던 한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에서 얻는 만족감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도력이 가진 카라스마의 요소다.] 카리스마 지도자는 떡고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야 한다. 영국의 코커스 시스템은 건너뛰고 (4) 미국은 엽관 체제가 나온다. 승자 독식 프로그램이다. [미국에서 대중투표제의 머신이 그렇게 일찍부터 발전했던 이유는,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만, 대중 직접 투표의 원리로 선출된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자 관직 임면권의 최고 책임자였으며, 삼권 분립의 결과로 직무 수행에 있어 의회로부터 거의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 승리의 보상은 특히나, 관직에 따른 봉록의 형태로 전리품을 분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쉬웠다. 그 결과는 엽관제로서, 그것은 앤드루 잭슨에 의해 체계를 갖추고 하나의 원칙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제 봉건주의의 옅은 경험, 왕이 멀리 떨어져있다던가 이런 상황에서 임기제 왕과 같은 대통령 제도가 미국에서 튀어나오고, 그 대통령은 엽관제를 통해 자기의 심복을 잘 챙기게 되었다. [승리한 후보의 추종자에게 모든 연방 관직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엽관제가 작용한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정당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경합하는 정당들이 일관된 원칙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관직 사냥꾼을 위한 조직이고 선거전이 있을 때마다 득표 가능성에 따라 정책 프로그램을 바꿔 버린다.] 오늘날 한국에도 유효한 말일까? [이런 제도에 기반을 둔 엽관제가 미국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의 문화가 젊어서 순수한 아마추어 국가 운영을 관용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에 충실히 봉사했다는 자격 이외에는 어떤 자격도 제시할 필요가 없는 30만에서 40만 명의 파당 정치인들이 있는 상황이란, 당연히 엄청난 폐단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아직까지도 무한정한 경제 기회를 가진 나라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미국의 엽관제 성공은 환경(자원)과 국민의 성향(때묻지 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는 어떤 확고한 정치 원칙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원칙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무엇으로 표를 끌어모을까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그의 교육 수준이 상당히 낮은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보통 흠잡을 데 없이 바르다. 다만 정치 윤리면에서 그는 기존의 통상 차원의 정치 윤리에 적응하고 있을 뿐인데, 이는 우리 독일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통화 퇴장 시기에 경제 윤리 영역에서 취했던 태도와 다를 바 없는 정도다.] 베버는 역사가 짧은 미국을 낮춰 보는게 아닐까? [미국에서 정당들은 뚜렷한 자본주의 노선에 따라 운영된다. 그들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긴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그들은 태머니홀과 같이 지극히 안정된 정치 클럽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들 정치 클럽은 특히 지방자치 행정기구들을 정치 통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5) 다섯 번째는 독일의 관료 체제다. [독일 정치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 요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 번째 요인은 의회의 무기력함이다두번째 요인은 훈련된 전문 관료층이 독일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했다는데 있다세 번째 요인은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는 정치 신념을 가진 이념 정당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을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해당되지 않을까? 마지막은 정치제제의 전망-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직업 정치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내면의 즐거움은 어떤 것이 있고, 이 길을 택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개인으로서 자격 조건은 무엇인가? 정치가라는 직업은 우선 권력감을 제공한다직업 정치가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자신이 어떤 자질을 갖춰야 이 권력을 제대로 다루고, 그래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성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그 권력이 제아무리 좁고 특수한 업무 분야에 한정된 권력일지라도 말이다. 이 질문은 우리를 이제 윤리 문제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어떤 종류의 인물이라야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일 권리를 갖는가를 질문한다는 것은 곧 윤리 문제를 꺼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정치가와 윤리라는 주제다. 먼저, 정치가에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정치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가지 자질이 중요하다. 열정 passion, 책임감 sense of responsibility, 균형된 판단  judgement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화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와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에 대한 열정의 헌신을 가리킨다대의에 대해 헌신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끈는 결정할 만한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된 판단이다균형된 판단은 내면의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삶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균형된 판단이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문득 신화에 나오는 신과 주역에 나오는 다양한 괘, 사상 의학에 등장하는 네가지 구분법이 떠오른다. 모든 걸 다 갖춘 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열정의 정치가를 그저 불모의 흥분 상태에 있는 정치 아마추어들과 구분하게 해주는 것은, 영혼에 대한 자기 통제력이 있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거리감에 스스로 익숙해져야만 성취될 수 있다.] 정치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인가? 그리고 그 예술은 신의 영감을 가져와야 가능할걸까? [권력 추구가, 온전히 대의에 대한 헌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결여한 순전히 개인의 자기도취를 목표로 하는 순간, 그의 직업이 갖는 신성한 정신에 대한 죄악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정치 영역에서는 궁극으로 두 종류의 치명스러운 죄악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의 결여와 책임성의 결여가 그것이다.] 자기도취가 죄악이라면, 수많은 정치가가 죄인이 될 성 싶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항상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상 아무리 당당한 정치 성공이라 하더라도 이 성공에는 사실 피조물 특유의 공허함이라는 저주가 드리워질 것이다.] 내용이 뒤로 갈수록 정치라기 보다 종교의 엄숙함이 엄습한다.


정치가의 윤리에는 대의와 신념 그리고 도덕이 있다. [당당하고 냉철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전쟁이 끝났을 때 늙은 아낙들처럼 누구 때문이라며 책임자를 색출하러 다니는 대신에 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전쟁에서 우리가 졌고 당신들이 이겼다. 그 문제는 끝났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실질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할지를 염두에 두고 그리고 승자가 짊어져야 할 미래에 대한 책임을 고려하여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자정치에 윤리에 관한 요구를 부과하는 문제와 관련해, 정치란 하나의 특수한 수단, 다시 말해 폭력/강권력을 내포하고 있는 권력이라는 수단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볼셰비키와 스파르타쿠스의 이데올로그들 역시 바로 이런 정치 수단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 독재가와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음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지배와 구체제 권력 집단의 지배는 인물이 교체되었다는 사실과 아마추어리즘을 빼고 나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의 글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우주론의 사랑의 윤리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지만 정치가는 정반대의 격언, 즉 너의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폭력이 답이란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폭력을 정치의 수단으로 쓰면서 악을 잘 다루라는 말일 것이다. 정치판은 분명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말할만큼 그렇게 깨끗한 곳이 아닐테니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윤리가 나온다. [윤리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이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하는 두 원칙을 따른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다그러나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상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리 측면에서 선한 목적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윤리 차원에서 위험한 수단과 부정의 결과를, 언제 그리고 어느 정도 정당화해줄 수 있는지를 가리켜줄 수 있는 그 어떤 윤리도 세상에는 없다.] 그렇다면 정치에 있어 윤리는 필수의 사항이 아니며, 그렇다고 필수가 아니라고 말할 어떤 기준을 갖고 있지도 않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우리가 목적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원칙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어떤 수단을 정당화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윤리 계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개의 윤리가 같지 않고 상충도 아니고 때로는 같을 때도 있고 때로는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모른다. 결국 두개의 윤리는 여러 윤리 중 대표성을 갖고 있어서 선택된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윤리 자체에 대한 고민을 아주 깊숙이 가기에는 정치의 속성이 이를 허용하지 못할지 둘 중 어떤 것으로 설명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정치 윤리를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 윤리는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모든 종교가 이 문제와 씨름했고 다만 그것이 가져온 성취의 정도가 종교마다 달랐을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 조직체가 쥐고 있는 정당한 폭력/강권력이라는 특수한 수단 바로 그 자체가 정의와 관련된 모든 윤리 문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강권력이라는 이 특수한 수단과 손을 잡은 자는 누구든 그것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든 혁명이든 신념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특히나 그러하다.] 정치와 윤리는 모두 우리 삶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정치는 어떤 보편의 가치를 말하기 어렵고 그때 그때의 상황을 잘 반영해야 한다. 반대로 윤리는 (종교처럼 아주 극대화된 모습까지 밀고 나가지 않더라) 어떤 보편의 선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런 두가지를 하나로 융합하려는 시도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을 아직까지도 썩 그렇게 그럴듯한 모습의 가치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베버의 결론-비관의 현실 속 정치가-에서 몇 가지 정리할만한 내용이 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윤리의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중요한 것은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런 삶의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정치란 열정과 균형된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삶들이 없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온전히 옳고 모든 역사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느낀 바를 조금은 비관조로 적어보았다. 정치에는 선악과 좋고 나쁨의 판단이 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좀 지난 책은 아무리 고전이라도 지금과 시간의 거리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또한 글쓴이가 처한 때와 터(시공간)의 모습이 우리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이런 것까지 다 반영해서 오늘날 우리의 문제 해결과 앞으로 어떻게 가야할지의 그림에 슬기롭게 우겨 넣는다는 게, 차라리 이런 생각이 없이 하얀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반드시 도움을 준다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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