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 1 -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해방일기 1
김기협 지음 / 너머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45 8 15일 그날을 해방이라고 하나? 광복이라고 하나? 아직 이 논쟁도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소제목처럼,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이다. 일제에 넘어간 것도, 거기서 벗어난 것도 모두 우리의 의지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요즘 건국절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면 건국절에 대한 논란은 필요 없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얻은 자유가, 우리의 피와 땀에서 나온게 아니었기에, 근대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역사의 아킬레스 건이 되어 버렸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근현대사 중에서 1940년대, 그러니까 식민 통치의 마지막 시기에 일제의 극악무도함이나 그때 한국 사람들의 생각, 갑자기 온 해방(또는 광복)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군정기는 어떠하였는지 궁금해왔다. 이때 마침, 김기협 선생님의 <해방 일기>를 접하게 되었다. 프레시안으로 기억하는데, 전에 연재 기사형태로 이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이 책을 우연히 보고는 냉큼 집어 들었다. 10권의 책은, 쓴 사람의 노고가 엄청나게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긴 여행이다. 하지만 한걸음 들여놓았기에 천천히 가보려고 한다. 이 정도를 이 책을 보고 느낀 점의 앞 부분으로 정리한다.

 

시작은 45 8 1일이다. 해방에 앞서 주축국을 포함한 세계의 움직임과 일본의 모습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원자폭탄이 터졌고, 마지막 남은 파시스트 전쟁기계 일본은 항복을 준비했고, 항복했다. 이에, 한국의 총독부는 정무총감(총독이 아닌!)을 시켜 여운영 선생을 만나서 치안 유지 협조를 요청한다. 여운현 선생은 안재홍 선생 등과 함께 건준을 만들고, 그간 독립운동을 해왔던 왼쪽의 사람들도 움직인다. 여기서 글쓴이는 그때의 왼쪽이 갖는 정의를 지금과는 달리 하고 있다. [일제에 반대하여 형성된 조선의 좌익은 민족주의를 널리 공유했다. 공산당 조직활동을 해온 볼셰비키 중에도 투철한 민족주의자가 많이 있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관계,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와 함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도 해방 후 조선의 진로를 결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일제 하 독립 운동을 볼 때, 주목할 것 중 하나가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다. [개신교가 한국에서 융성하게 된 데는 선교 초기의 식민지 상황이 큰 몫을 했다. 이민족의 폭압스러운 통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식민지인은 기독교에서 위안을 찾기도 하고 희망을 찾기도 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으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대신함으로써 피지배민족의 질곡으로부터 도피하기도 하고, 서양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일본의 폭압이 제거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국가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교로부터 그 역할을 대신 기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좌익, 기독교가 나오면 그 다음은 우익으로 넘어갈 차례다. 아주 초기 형태의 근대 부르조아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부르조아지의 생각은, 자본주의 초기 다른 지역의 부르조아지와 별 차이가 없었다. [20년대 이후엔 지주층이 산업자본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그들은 민족자본의 간판을 이용했다. 일본제 경쟁상품보다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을 만회하고 조선 내에서 독점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민족정체성은 사업을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이제 역사의 대칭이라는 게임을 해보자. 같은 때 북쪽 땅은 어떻게 일제벗어나기를 하고 있었을까? 분명 남쪽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두 군대의 성격은 어떻게 달랐을까? 북한에서 김일성이란? [소련의 점령방침이 미국과 다른 점 하나가 바로 나타났다. 소련군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함경남도의 행정권을 접수하자 그 즉시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에 넘겨줬다. 함흥에서는 16일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된 정치범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가 결성되고, 또 건준 함경남도 지부도 결성되어 있었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두 단체가 합쳐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를 만들어 도행정권을 넘겨받은 것이다소련과 미국의 군대 성격의 차이도 작용했을 것이다. 소련 군대는 정치장교의 역할이 컸다. 초기에는 정치위원이 중대급 이상 각 부대에서 지휘관과 대등한 위치를 가진 시기도 있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 각급 부대에서도 정치위원은 지휘관에 버금가는 위치에서 큰 역할을 맡는다. 일반장교의 정치교육도 서방의 군대보다 훨씬 비중이 크다. 소련 장군들 중에는 하지처럼 순진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을 것 같다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에서 김일성은 여러가지 리더쉽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항일투쟁 경력으로 민족주의자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점, 소련극동군에 4년간 편성되어 있던 경력으로 점령군 간부들의 신뢰를 받은 점, 국내 무장투쟁이 없던 시절 보천보사건 등으로 큰 명성을 쌓아놓은 점, 그의 손발과 두뇌가 되어줄 정예집단을 보유한 점12월 테제의 뒤를 이은 8월 테제엇 계급투쟁을 강조했기 때문에 남한 공산주의 운동은 지식층 좌익 속에 확산되기 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북한에서는 잠재의 좌익이 공산주의운동에 흡수되었다. 미군정의 박해라는 악조건도 물론 작용했겠지만, 박헌영 일파의 편협한 극좌노선도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해방 후 각 지역에서 주민들이 만든 인민위원회가 각 도인민위원회로 묶이고 10 8일부터 10일까지 110명의 대표가 참석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에서 체제의 표준화를 결정했다. 그 시점까지 각 도 인민위원회는 서울의 인민공화국 중앙에 귀속하는 것으로 보고 북한 지역을 통합하는 조직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0 10일의 아놀드 망언 이후 미군정의 인공 부정 방침이 확실해짐에따라 잠정 통합 조직으로 5도 행정국을 만든 것이다.]

 

최근 건국절 논란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근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닌 최초이자 정식의 유일한 정부로 평가하는 의견이 많다. 그 의견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해방 이후 헤게모니를 쥐지 못함에 있어서는 그분들도 그 문제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 부분이 아쉽고, 향후에도 역사의 논쟁에서 계속 씹힐만한, 불투명하고 씁쓸한 뒷맛을 줄 법하다. [45 8 15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들에게 해방된 한국의 관리를 맡길 만큼 믿음직한 존재로 인식되지 못했다. 일본과 전쟁에서 뚜렷한 역할도 없었고, 국내에 조직된 지지세력도 없었다. 임시 정부를 지지한 유일한 연합국인 중국은 다른 연합국의 존중을 받지 못했고, 중국마저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지금의 시점에서 임시정부를 바라보는 데도 임시정부와 김구의 절대화와 신화화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표준 교육과 교양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임시정부와 김구의 문제점과 한계를 투철하게 인식할 때 그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음미도 가능할 것이다광복군의 작전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임정은 보다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 권한까지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김구 자신이 생각해도 임정은 개선장군 행세를 할 실적이 모자랐다. 그래서 일본 항복 후의 상황에서도 임정의 실력을 키우는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했다. 그 하나가 일본군 포로들 중 조선인 장병을 편입시키는 광복군 확장 시도였다김규식, 김원봉, 장건상 같은 이들은 국무회의 석상에서의 발언을 통해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실시되는 현실에서 더구나 국내외 각 정파가 서로 자기 목소리를 외치는 현실 아래 중경 임시정부가 전민족의 의사를 집약,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어느 정도 합리성에 기반한 논리를 폈다식민통치의 폐단은 그 통치가 지속되는 기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모든 면에서 독립 구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식민통치의 속성이고, 그 효과는 통치자의 철수와 함께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해방 시점의 대다수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어떤 노력이 참으로 필요한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도 식민통치가 남긴 구조화된 문제의 일부였다.]

 

8 15일 이후 일본은 분명 패전국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연말 대규모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자리에 옮겨갈 준비를 하는 정도랄까? 적어도 미국 점령군은 한국의 일본군을 패전국의 잔당 정도로 취급하지 않고, 무지 몽매한 원주민을 다스려온, 그래서 그 경험을 잘 인계해줄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총독부 세력은 이를 분명 알고 있었다. [총독부가 건준에게 협력만을 요구하고 상응한 권력이양을 거부한 데 있다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협조를 부탁하면서도 실제로는 건준의 협조를 요긴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는 항복선언 두 주일 후에야 일본에 상륙했지만, 그 두 주일동안 일본 정부와 맥아더 사령부 사이에 온갖 의논이 오고갔을 것이다. 맥아더 취향의 통치노선도 드러나고 새로운 정보의 일부는 조선 총독부에도 계곡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건준의 협력에 대한 총독부의 수요는 계속 줄어들었을 것이다.]

 

정치는 생물이다. 그리고 정치인은 자기 앞의 상황에서 스스로가 갖고 있는 대의 명분을 최적화하려 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와 같은 혼란기때는 각자 정치인의 이런 동상이몽은 그리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견해를 발표하고 있었다. 임정도 여러 독립운동 세력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것은 좌익의 일반화된 관점이었다. 좌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밀착되어 있던 임정이 우파에 치우쳤다고 보았다. 8 30일 임정 요인들이 중경 미대사관에 가서 했다는 말을 보면 타당성이 있는 관점이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 몫을 키우기 임정을 깎아내리고 싶은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여운형이 임정을 부정하거나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문자 그대로 경시한 것이다. 임정의 역량 만으로 상황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건준을 키우려 애쓴 것이다. 그리고 건국동맹을 내세운 것이다그러나 회의스럽게 볼 점이 많다. 무엇보다 국내 근거가 거의 없던 임정의 약점을 안성맞춤으로 보완할 수 있는 국내의 대중운동이라는 점에서, 건국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낼 동기가 있었던 존재다.]

 

김기협 선생님의 이책의 관점을 보면 하나는 중도이고, 하나는 (현실은 땅에 발을 디뎠으나) 꿈꾸는 이상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꿈꾸는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민족주의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분단을 꺼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익을 표방하던 해방 당시의 가진 자들 대부분은 민족이 갈라지고 식민지 시대의 악질 경찰이 사회를 다시 주름잡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양보할 용의가 있었다보통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정치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자기 가족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약간 찜찜한 채로 시키는 짓 한 것을 너무 엄하게 다스릴 필요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시키지도 않은 것을 차장 저지른 놈들만 잡아내도 혼낼 놈들 얼마든지 많습니다해방 당시 한국 사회에는 사회주의 정책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많이 있었다. 그렇다 해서 자본주의 측면을 일체 배제하는 철저한 공산주의 체제를 꼭 필요로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한국의 중도 정치인들은 양 측면을 조화시킬 방책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일각에서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를 고집하는 극우파가 나타났다. 타협 아닌 대결의 양상으로 사태를 끌고 가는 데 미군정의 편의주의 태도를 이용한 것이다...국민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38선 문제의 제기였던 것이다지양회통은 한 사회의 문화 성장 원리일 뿐 아니라 한 생명체의 생장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변화를 겪되 원래의 내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변증법/유기화된 변화과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전에 동양인들이 말하던 동도서기나 중체서용 화환양재가 모두 이 원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 원리의 구체화된 성격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말로 지양회통을 쓴 것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은 이제 서서히 갈라지고 자기의 색을 드러낸다.[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진보의 노력도 현실을 무시하는 오만에 빠진다면 사람사는 세상의 기반 조건을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약자옹호라는 소박한 수준에서라도 사회주의 원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극소수의 수구파를 배제하는 것이 당시 현실의 필요였다. 그런데 좌파 일각의 헤게모니 추구가 중도파를 우익으로 내몰거나 무력화시켰다. 비극의 역사전개 발판인 적대 공생의 길이 열린 것이다한민당은 우익정당이었지만 그 5대 강령 중에 3)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을 기함과 8대 정책 중에 4) 교육과 보건의 기회 균등 6)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7) 토지제도의 합리스러운 재편성 등 진보스러운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정도는 당시의 우익인사들도 사회의 당연한 진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9 8일 성명서는 결성단계의 한민장에 조직력을 가진 주류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자금력과 정보력도 가진 세력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의 힘을 가지고 현실의 힘을 설복해 새 국가 건설의 길에 참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계를 주축으로 하는 한민당 주류는 정치공학에 의존하며 정치철학을 물리쳤다. 그렇게 해서 현실 정치는 조직과 돈에 의해 결정된다는 대한민국 정치의 원리를 세웠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한 축에는 미군정과 그들의 왜곡된 시각이 있다. [하지의 눈에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군인과 외교관, 두 종류인 모양이다. 예와 같은 기만정책을 안쓰겠다고 한 데서 그것이 외교관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간접으로 드러낸 것이다. 미군정이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많이 일으키게 되는 것은 군인과 외교관 사이에 정치가의 입장을 설정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하지 사령부는 진주 전부터 조선 주둔 일본군 17방면군과 긴미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얻은 왜곡된 정보가 점령 직후의 어리석은 정책에 많이 작용했다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보고 있다)…남한에서 미군은 점령군을 표방했다. 일본과 독일 진주에서와 같은 자세였다. 주민을 적대시하고 협조를 기대하지 않은 자세였다한민당 주류 세력이 폭력에 의지해 극우의 길로 흘러가는 것을 군정이 방치 내지 방조한 것이 한국의 정치수준을 타락시키고 중도파의 길을 봉쇄한 기반조건이었다. 좌익의 폭력은 군정을 등에 업은 극우파의 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적어도 미군정이 질서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던 남한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없다거의 한민당 인사만으로 구성된 고문단을 군정청이 위촉하는 것은 10 5일의 일이다. 그러나 한민당 인사들과의 집중 접촉은 진주 시점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아무리 확인된 근거가 없더라도 9 22일 군정청의 토지소유권 무변동 발표는 한민당 인사들의 로비에 의한 것의 기반이었던 만큼, 겉으로는 토지제도의 합리성에 기반한 재편성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변동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45 9월 말 시점에서 조선 내 통화량의 40%가 최근 달포 동안 찍은 새 돈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그 대부분이 권력의 성격을 지닌 뭉칫돈으로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상당히 타당한 추측이다. 그리고 당시 한민당 주류 세력이 막강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그런데 닷새 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소작료를 30%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대한민국은 식민지체제로부터 많은 달갑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부패 한가지는 식민지 체제가 아니라 미군정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친일에서 친미로 옮겨온 일부 세력만을 자기네 편으로 받아들이고 일반민중을 불신의 새앙으로 삼은 것은 일본의 식민 통치와 똑같은 자세였다. 이런 자세에서는 남한에 미국의 절대 영향을 받는 국가를 우선 세운 다음 군사력으로 북한을 통합하자는 내용으로 짐작되는 이승만의 제안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북한에서처럼 점령군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데도 남한 거의 전역에 군단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 대부분이 얼마 동안이라도 상당 수준의 경찰과 행정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제 우리나라 근대에 있어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이승만은 그 시절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의 직함을 걸고 미국의 신탁통치를 청원한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힘들여 독립운동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처신해서 직함을 따내고, 그 직함을 이용해 하나의 예속상태를 자기에게 유리한 다른 예속상태로 바꾸는 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해방 후까지도 그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예속상태를 계속 찾고 있었다이승만은 미국이 일본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안 일본을 적대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터진 후 1939년 워싱턴으로 건너가면서부터 일본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그는 친미파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인이었으며, 직업은 지한파 정치브로커였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다.

1) 우리는 일제라는 거악을 우리 힘으로 끝내지 못하고 다른 국가가 점령을 이어 받아 지속하는걸 막지 못했다. 2) 토지 개혁등 당연히 있어야 할 구체제의 극복을 하지 못하고, 구권력의 기생 세력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층이 그 자산을 삼켜버렸다. 3) 잠시 갈라지더라도 그 나눠짐을 명확히 반대하고 하나로 돌아가기에 우리 안에 이해관계가 심하게 갈렸다. 4) 중도의 길은 그 목적하는 바가, 치고 나가기 보다는 양 극단의 명분 사이에 있어서 역사에서 좋게 자리매김하기가 어렵다. 5) 예나 지금이나 사람사는 세상은 일관됨보다는 변화와 변절이, 원칙과 정절보다는 세상을 따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