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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2 -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 ㅣ 해방일기 2
김기협 지음 / 너머북스 / 2011년 9월
평점 :
두번째 책에서는, 드디어 이승만이 본격 등장해서 정국을 서서히 휘어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임시정부 사람들이 귀국해서 옛터에서 다시 자리잡으려 애를 쓴다. 이어서 신탁통치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지난 이야기,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 외부의 힘센 누군가의 결정에 따라 우리의 명줄이 왔다갔다 하는 시절에 일어난 옳지 못한 상황을 볼 때면,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고통만이 주어질까? 생각될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일 것이다.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피와 아픔 없는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가 있을까? 나의 아쉬움은, 그 아픔이 우리의 긴 역사의
가장 최근에 더 도드라지게 나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또 그 아쉬움의 다른 하나는, 식민 시대 토지 소유 체제를 그대로 이어간 미군정을 보면서 느낀 바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인데 말이다. [미군정은 사유재산의 매매를 허용했는데, 완전한 허용이 아니라 군정의 허가를 거치게 했다. 허가의 기준도
명확히 세우지 않아 엄청난 이권이 군정청에 쌓이게 되었다. 일본인은 재산을 헐값에라도 처분하고 싶어했고, 조선인 재력가는 헐값에 사들이고 싶어했다. 그리고 허가권은 군정청에
있었다. 유착관계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이란 사람은 우리에게 누구일까? 누구 말처럼 과보다 공이 뛰어난
사람일까? 이 책에서 우리는 현대사 정치공학의 최고 달인인 이승만이 주변 상황을 정말 잘 이용하는 대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승만의 첫 묘수였다. 미군정은 임정이건 인공이건 어떤 조직에도 정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식 방침이었다. 정말 어리석은 방침이었다…임정과 인공 양쪽에서 존중받고 군정청의
신뢰를 받는 입장. 정말 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3자 사이의 신뢰감을 키워서 해피엔딩으로 끌고 가는 영웅 역할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승만이 임정, 인공과 경쟁할 전국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독립촉성이라는 기능 목표를 내새우는 겸손한 자세였지만, 임정과
인공이 군정청과의 긴장 관계로 발전에 한계를 가진 반면 자신은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독촉의 위상을 키워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그는 갖고 있었다. 임정, 인공 어느 쪽에서도 존중은 받지만 실세를 못가진 그는 자신의
세력을 키울 근거지로 독촉을 만든 것이다…(외교위원회 내에 협찬부라는)
제2의 임시정부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요즘
한국 정치계에도 양파론이 유행하는데, 이승만의 음모와 책략이야 말로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원조 앙파라
할 것이다…이승만이 반공이나 반소의 개념을 애초부터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승만은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193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일도
있고 1945년 3월 28일까지도
워싱턴 주재 소련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과거 조러 우호관계를 들먹이며 조선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일 후 얄타 밀약설을 들고 나온 것은 정략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극좌파가 극우파만큼
이승만에게 절박하게 매달릴 입장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박헌영 일파는 인공과 공산당을 발판으로 인민위원회, 전평, 전농 등 자생 진보 운동을 수렴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승만과 결탁하더라도 그에게 큰 권력을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친일파 처단의 위험에 직면해 있던
극우파는 이승만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줬고, 이승만은 그것을 받아먹은 것이다…국제관리 형태의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군정청, 이승만, 한민당 세력이 협력해 온 사실을 정병준의 연구를 중심으로 소개해왔다. 정용욱의
조사를 통해 이 허위기사에도 같은 맥락에서 맥아더 사령부와 군정청, 그리고 한민당 세력이 작용한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승만 역시 이 음모에 끼어 있었던 사실이 그 전날 밤의 방송 내용에 나타난다…그리고 책속에 나오는 송진우, 나중에 김구 선생의 죽음과도 무언가
끈이 있어 보인다는 정황이 나온다.]
식민시대 부를 축적한, 한국의 근대 부르주아지(지나치게 정중한 표현일까?)는 식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군정체제를
잘 이용한다. 이용한다기 보다는, 자본의 생리가 왜곡된 형태로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알맞아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옳지 못하게 축적한 자본이 한국의 근대화와
자본주의 역사의 주춧돌이 되면서, 한국에서 자본과 윤리와의 격차는 이미 그 시작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정치 측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 측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한민당을
간판으로 한 재산가 집단은 미군정의 영향력을 두 방향으로 써먹었다. 하나는 친일파 처단의 압력을 면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인이 남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는 것, 특히
재산권을 넘겨받는 것이었다. 적산 취득에 매달린 조선인은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송진우에게 하면서
그들이 송진우와 어떤 관계의 사람들인지 하지가 알고 있었을까?]
앞서 1권에서도 나왔지만, 당시
미군정청의 지배층에 있는 군인들의 역량은 게으르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게으름 보다는 함량
미달이 더 맞지 않나 싶다. 1800년대 말부터 진행한, 남아메리카를
쥐고 흔들었던 미국의 정책을 보면 미국 또한 식민지 경영국이고 그 경험을 민주주의로 승화시키지 않은, 유럽의
다른 식민지 경영국보다 더 낫다기보다는 그 밥에 그 나물인 격이다. 이러다보니 일반 민중의 생활은 일제보다
더 나아졌다고 단칼 휘두르듯 말할 수 있을까? [협력 또는 친일에 대한 관점으로, 일면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민심이 극도로
민감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 일면의 타당성에 지나치게 비중을 둔 감이 있다. 미군정의 자본주의 편향성과
친일문제에 무감각에 가까운 관용은 민족정기 확립과 사회주의 원리의 일부 적용을 원하는 일반 민심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고, 그 반감을 극좌 세력이 이용하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일본인이 나가고
빈자리를 조선사람으로 채운다. 이것이 당시 조선인의 민족주의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미군정 당국자는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식민통치제제가 어떤 문제를 가진 것었는지 아무 인식이 없고, 그 지배자가 미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는 사실만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인 대신 미국인이 지배하면ㅅ 높은 자리를 과거보다 많이 주기만 하면 조선인은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소작료율이 8할에 육박하게 되었다는 것은 쌀 생산원가 중 노동력의
비중이 2할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전통시대에 5할을 넘던 노동력의 원가 비중이 이렇게 줄어든 데는 근대기술의 활용으로 인한 비료값, 水利 비용 등 다른 원가 요인의 증가도 약간의 몫을 했겟지만, 압도 원인은 노동력의
착취 강화에 있었다. 종래의 소작농은 미약하나마 농업경영의 주체로서 역할을 지키고 있었는데, 식민지 시대 농장체제에서는 단순한 착취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연합군
사령부(GHQ)가 일본 정부를 그대로 두고 지령으로 통제하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한 반면 조선 점령군은
직접 군정을 시행했다…점령의 가장 악질스러운 유산은 일본제국주의의 최대 희생자인 아시아인들의 존재가
패전한 일본 땅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데 있다. 중국인, 조선인,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은 종전 후 일본에서 제대로 된 역할도, 제대로 된 영향력도 갖지 못한 채 그저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제국
육해군을 패퇴시키는 데 아시아인들이 수행한 역할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한 미국의 그늘 아래 감추어져 버렸다. 아시아인들에게 돌아갈 영광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식민지화와
전쟁을 통해 그들에게 저질러진 갖가지 범죄는 더더욱 쉽사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는 나중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임무의 하나는 합참과
국무부의 지시나 지원 없이 이 공산정부를 파괴하는 것이었소"…이남의 미군은 자기네 정치원리의
도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군정 정책이 민심과 유리되거나 대치되는 상황이 좌익세력 성장의 온상이 되었다는
얘기를 흔히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투쟁을 추구하는 좌익세력의 득세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군정 반발 때문에 좌익 지지기반이 저절로 늘어났기 때문에 좌익 내에서 건전한 정책발전의 노력보다 헤게모니 쟁탈의
양상이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적대 공생관계의 전형이다…임정이
민족의 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라면 인공은 민족의 육체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두 존재의 원만한 협력과 결합이
민족의 장래를 가장 잘 풀어나가는 길이었다. 1945년 12월 28일, 해방 후 처음으로 민족의 의지를 적극 표명할 기회가 왔을
때 임정은 인공과 인민위원회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반탁운동의 에너지를 이용해 지역 차원에서 인민위원회를 대치할 조직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인공과 전면 대결노선이었다…커밍스의 책에는 미국의 정책혼선 상황이
세밀하게 살펴져 있다. 번스 국무장관이 대표하는 국무성의 국제주의 노선이 공식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국가주의 노선이 이미 강력히 대두하고 있어서 맥아더와 하지의 일탈행위도 현실 근거를 상당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커밍스는 본다.]
해방이 끝나고 우리 역사에 나오는 다양한 헛발질이 있다. 임정(김구) 또한, 돌아오고
난 후 굳이 그 대열에 끼어든다. 물론 한치앞도 못보는 우리같은 중생이라면, 먼 앞날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은 우리 민족이 큰 기대를 갖고 있던 분이고, 역량도
클 것이라 크게 믿어왔다. 그분도 사람인지라, 모든 앞날을
계산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그리고 당장 선생과 임정도 살아서 이 땅에 다시 뿌리 박아야 했겠지만, 친일을 맞이하는 헛발질은 좀 크게 엇나가 보인다. […친일파
처단은 좌익의 구호가 되는데, 임정과 김구가 친일파 문제를 합리스러운 범위 안에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면
좌익이 그 구호를 써먹을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김구는 친일파 문제를 너무 쉽게 풀어줌으로써 임정의
정치 자산을 잃어버리고 좌우대립의 극단화를 유발하고 말았다…임정의 정치 가치는 능동의 정책보다는 흔들리지 않는 지킴의 자세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움직여야 할 상황에 왔다. 움직이면서도
지킴이로서 근본 가치를 최대한 지켜내는 것이 귀국 후 임정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12월 중순 한민당
간부들이 임정 요인을 국일관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신익희가 친일파의 엄격한 숙청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매 장덕수가
"그러면 나는 숙처이 되겠군"하는 것을 신익희가 "설산 뿐이겠는가"맞받을 때 곁에 있던 송진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해공,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거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삼일 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이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김학준의 고하 송진우 평전)"…김구 선생이 무리한 반탁운동에 나선 데는 순수한 애국심만이 아니라 전국조직 수립 등 임정 법통 강화의
기회로 본 전략 판단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본다. 전략가로서는 이승만이 김구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반탁운동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26년간 존재한 임정이미잠, 귀국시의 그 모습은 42년 10월의 좌파 포용 이후의 것이었다. 좌우합장의 모델 노릇에 임정의 큰 가치가 있었다. 극한의 반탁운동
속에 좌우합작의 정신이 외면당하면서 임정의 깃발이 찢어졌다. 돈과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한민족을 지켜줄
가장 큰 도덕 권위의 주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왼편은, 그 나름 홀로서기 위해 명분쌓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간다. 물론 박헌영이란 사람을 보는 시각, 그의 대표성, 식민 시절부터 계속되어 온 독립 운동의 하나로서의 사회주의 등이 혼합되어,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 굳히기에는 왼편이라는 표현이 메타 수준의 기표로 표현되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극좌파가
공화국(인민 공화국) 간판을 필요로 한 것은 임정과의 대결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교과서를 비롯한 큰 물줄기에 안나와서 몰랐지만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그 모임은 많았다. […독립동맹은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입국한, 중경 임정 다음으로 중요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이었지만 역사가 짧아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독립동맹의 입국으로 해외 독립운동 주요 세력의 무대 입장이 끝났다.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만주 유격항쟁을 대표한 김일성 집단, 중국 공산당을 배경으로 최근까지 무장항쟁을 벌여온 독립동맹, 미국
교민사화를 이승만이 제대로 대표했는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더 효과높은 대표를 따로 보내지는 못했다…이런 점에서 남한의 이승만, 한민당의 반탁운동과 조만식의 그것은 차이가
있었다…그건 점에서 조만식은 일관되게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었으며, 그의
반탁도 그런 민족주의자로서의 연장선 위에 선 것이었다.]
이 책에는 두가지 큰 비교가 나온다. 하나는 우리 안의 역사의 대칭
거울로서 북한, 그리고 우리 밖의 베트남이다. [12월 8~10일의 농민조합총연맹 창립대회에는 38선 통제로 인해 이북 지역
대표가 많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농민조합운동은 이북에서 더 활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쌀의 비중이 적은
지역 특성상 소작비율이 맞고 지주세력이 약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생각된다. 이북 지역 농민운동은
농민조합총연맹 이북지부를 발판으로 하여 이듬해 1월 31일
북조선 농민동맹을 창설, 토지개혁의 주체로 활동하기 시작한다…조선의
식민지근대화를 논하는 이들은 베트남의 식민지 근대화를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일본의 조선 지배가 당시
상황에서 얼마나 근대화를 억제한 방향이었는지 바로 실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상태의 근대화 근본이
얼마나 파괴력이 큰 현상인지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나는 일본 지배가 조선에 일으킨 변화는
근본이 질의 변화가 아닌 양의 변화라고 본다. 농지 소유의 과도한 집중은 일본 지배 이전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일본은 조선에 새로운 산업구조를 건설하지 않고 농업생산의 효율화에 경제정책을 집중했다. 그 결과 농지 소유의 집중이 더 심화되면서 대량의 유휴노동력이 발생했다. 일본은
그 유휴노동력을 만주와 일본 등지로 유출하는 조치만 취하면서 조선사회의 발전방향을 열어주지 않았다…사회
혁명의 필요가 조선에도 있기는 했지만 베트남처럼 시급하고 절박하지는 않았다. 항일운동의 기초가 사회경제
문제보다 민족주의에 있었다는 점을 해외보다 국내의 운동이 미약했다는 사실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사회경제
문제가 심각했던 베트남에서는 국내의 저항운동이 훨씬 더 치열했다.]
최근 많이 나오는, 일제에 살던 사람은 많건 적건 친일이라는 논리를, 글쓴 이는 안재홍 선생님의 이야기로 받아친다. [며칠 동안
장맛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35년 일제 지배를 받고 나서 친을을 했냐 안했냐 하는 문제는 빗방울 맞은
일이 이냥 없냐 따지는 것과 비슷해요. 비맞고 싶어서 발가벗고 뛰쳐나간 사람들은 얼마 안되고, 대개는 우산 쓰고 나갔다가 부득이 튀닌 빗방울묻은 정도에요. 방안에
꼼짝않고 틀어박혀 비를 철저히 피한 사람은 몇 안돼요.]
신탁통치를 둘러싼 소동을 보면, 정말 우리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건
누구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 이 생각이 몹시 흔들린다. […국제주의에
입각한 신탁통치안은 강자 독실알 막고 약자의 지분을 보장해 주는 것인데, 미국이 이것을 내놓을 때는
소련이 강자의 입장에 있을 때였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미국이 최강자의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군정 당국자들을 포함한 미국 극우파는 타협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실력대결을 원했다. 약자의 입자잉 된 소련은 신탁통치안의 관철을 통해 지분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다…반탁반대가 꼭 친닥이어야 하는가? 반탁운동은 극우파의 도발이었고, 반탁의 이념 자체보다 그 극단의 운동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의
요구가 3상 회담 지지였다면 반탁을 하면서도 지지할 길이 있었다. 7일의 4당 코뮤니케와 같은 길이었다. 상식 차원에서 찬탁으로 오해받을 극단의
반탁반대는 소련의 요구가 아니라 박헌영의 전술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극우파의 도발에 똑같이 극단
방식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좌우대립 국면을 고착시키고 그 안에서 극좌파의 위상을 확보한 것이다. 극우와
극좌의 적대 공생관계를 추구하는 길이었다…모스크바 결정은 민족주의자 누구라도 반기지 않을 수 없는 두가지
조치를 담은 것입니다. 하나가 임시정부 수립 촉진이고, 또
하나가 38선의 철폐입니다. 신탁통치는 당장의 일도 아니고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신탁통치의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스크바 결정 전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치고 불합리한 태도 아닐까요?]
물론 이때도 문제는 경제였다.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이승만의 야욕, 한민당의 반동성,
공산당의 독단 등 해방공간 역사의 흐름을 험한 길로 이끌어간 요인은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그런 요인의 파괴력은 엄청난 규모의 검은 돈에 비하면 오히려 약소한 것 아니었을까? 몇달 사이에 통화량의 70%가 늘어나고 그 3분의 1이
소수 반사회 집단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돈이 그렇게 괴상한 형태로 깔려 있다면
아무리 의인이 많고 악이이 적은 사회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해방 시절의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나오는, 폭력의 시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익 청년조직을 처음 조직한 것은 공장 경영자들이었다. 산업 현장에서 직원위원회와 노동조합에 맞서기 위해 룸펜 청년을 모아 폭력조직을 만들었고, 한민당에서 그 이용가치에 착안해 정치폭력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우익 조직이 풍부한 자금력을 발판으로 자라나는
반작용으로 원래는 정치색이 약하던 청년 단체들이 연대와 통합의 추세를 일으켰고, 이들의 조직화와 의식화에
왼쪽이 나서면서 왼쪽의 색깔이 차츰 강해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 글쓴 이의 말에
찬성하면서, 왜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지금까지도 계속 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사그러들지 않는다. 심지어 2016년 10월인
지금까지도 말이다. [해방공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 그 어리석음을 모두 고쳐 완벽한 이상향을 만들 욕심이 내게는 없다. 내가
중시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몰아간 혼란한 상황을 빚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보통
넘게 어리석은 사람들이었고, 더러 사악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악함과
그에 가까운 심한 어리석음, 그것을 집중 반성해서 지금의 세상에서 그와 같은 것을 억누를 수 있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