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 3 -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 해방일기 3
김기협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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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를 잘못 낀 우리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그럼 그 첫 단추는 어디일까? 광복 이후 군정기일까? 구한 말 조선의 무능 그리고 이를 잡아챈 일제 식민지일까? 임진왜란과 병자왜란 이후 가져가야 할 변화의 흐름을 움켜쥐고 기득권의 살 길만을 찾은 그 시절부터일까?

외세, 지배세력, 불운함 그 어떤 것도 무시할 내용은 아니다. 그럼 우리만 그래왔을까? 그렇게 단정할만한 건 아니지만, 우리에게 역사를 낙담할 만큼 맥빠지게 만드는 일이 지속해서 있어왔음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그 속에서 통일 정권을 수립하려는 쪽과 어떻게든 정권을 먼저 쥐고 단독 정권을 수립하려는 세력으로 갈라지고 이 배후에는 외세로서 미군정이, 소련이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가 3권의 내용이다.

 

이 책을 보면서, 그동안 갖고 있었던 김구 선생이란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은 바뀌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이승만을 보는 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고 싶을 마음이 아직까지 한번도 안생기는 것도 놀랍다. 둘은 한살 차이인데,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참으로 달랐다. [(1946) 1 21일 임시정부가 추진해온 비상정치의 주비위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위원회 합류와 함께 비상국민회의로 방향을 바꾸면서 임정 요인 중 좌파로 불리는 비주류 인사 몇이 탈퇴를 선언했다. 비상국민회의가 좌익 참여에 연연하지 않고 우익 통합에 주력할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비상국민회의는 임정까지 분열시키며 우익 중심으로 결성되어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했다.]

 

식민지 이후 한국의 경제는 일제의 발전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수탈의 주체가 사라진, 광복을 맞은 이후 한국의 경제는 무언가 바로 나아지는 부분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자질이 떨어지는 미군이 군정을 담당하게 된 것이 원인의 하나고, 또 하나는 식민 체제에 참여함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저 그악한 무리의 이기심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인 토지개혁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한다. [조선에서는 43 8월 이래 식량배급제가 실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들어선 지 한달이 안된 10 5일에 미곡의 자유시장화를 선언했다. 작황이 좋아서 시장 상황을 낙관한 것이라 하는데,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경솔한 조치였다. 미곡 시장이 투기화되고 도시민들은 겨우내 식량 부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미소군 대표회담에서 소련군 측의 미군 측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 이북 지역으로의 쌀 반출을 보는 태도였다. 당시 일본의 식량난은 끔찍한 상황이었고 쌀값이 금값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점령군이 해결할 문제이며 한국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소련군의 입장이었을 것이고, 한민족 입장에서도 타당한 관점이었다. 그런데 이 일기에 소개한 정도의 정황을 놓고 볼 때 미군정이 대일 쌀 밀수출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소련군 휘하 대표들이 가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식민지배의 모순이 가장 심각하고도 광범하게 나타난 것이 해방 당시의 토지소유관계였다. 시장 원리에 맡겨둘 수 없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 이전에,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익을 자처하는 정당들, 심지어 한민당까지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의 필요였다…”(안재홍)는 지금 조선의 상황을 60년 전 일본 상황과 비슷하게 봅니다. 영세농민을 살려줄 토지개혁이 절실하고, 또 한편으로 급속한 산업 진흥이 필요한 상황이죠. 메이지시대 일본에서는 영주와 대지주가 땅을 내놓는 대신 국채를 받아 산업자본가로 역할을 바꿨습니다. 조선의 지주들이 그런 변신을 꾀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이 와중에, 북한은 북한대로 자기 갈 길을 가려고 한다. 참고로 46년 북한의 회의에 이미 김일성의 사진이 스탈린 옆에 걸려있는 모습, 그리고 그 밑에 소련군과 더불어 김원봉, 그 옆에 앉은 젊은 김일성의 사진을 보면서 글쓴 이 뿐만 아니라 나도 꽤 놀라웠다. [북한 단독 정권의 출발점이 되기는 했어도 임시인위의 설립이 분단 건국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해방 후 반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 북한에서느 인민의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개혁 추진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다음 달 시행되어 놀라운 성과를 거둔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노동법령과 남녀평등법의 제정,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 제반 민주개혁을 책임질 정권의 존재가 필요한 단계에 와 있었다. 임시인위는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정권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이 책(3)까지의 내용을 보면 미군에 의한 남한의 지배는 미국이 중시하는 합리성의 측면에서 보면 많이 떨어져보인다. [미군이 한국인을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경찰 운영 방침이었고, 한국인들에게도 가장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었다…식민지 말기 전 조선의 경찰력은 2만 명이었는데 1946 10월까지 남한 경찰력은 2 5천명이었다. 남한만 놓고 보자면 갑절로 늘어난 것이다미군정 하의 남한은 식민지 시대보다 더 많은 경찰력이 필요한 곳이 되어 있었다…"영어 마디나 한다고" 미군정 밑에서 득세한 장택상. 그가 남긴 수많은 일화들을 훑어보면 그가 왜 정신과 이사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군정청은 행정 인력이 넉넉지 못할 뿐 아니라 기강도 잘 잡혀있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인 재산 관리 방침마저 오락가락하니, 의지와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재산 확보를 위해 온갖 재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북의 토지개혁 실시에 임해 일본인 소유 농지라도 농민들에게 방매하겠다고 나섰지만, 주택과 산업체도 함께 방매할 방침을 내놓음으로써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일본의 패망으로 대다수 공장의 경영에 공백이 생겼는데, 직원과 공원들의 운영위원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경영을 넘겨받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조직이 경영을 맡는 경우 효율성에는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물건을 마구 빼내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 자율운동을 공산주의 성향으로 보아 군사력과 경찰력으로 탄압하고 경영진을 임명했다. 갑자기 큰 책임과 권한을 맡은 경영자들 중에 책임을 등지고 권한을 남용하는 풍조가 널리 일어났는데, 가장 뚜렷한 사례가 물자횡령이었다한국과 일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에 임시과도정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한국이 두 나라에 분할 점령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인민의 개혁 욕구가 점령군 사령부에도 상당히 원활하게 수용된 반면, 한국에서는 이념의 색안경을 피할 수 없었다. 패전의 피해를 일본보다도 오히려 해방된 조선이 더 많이 짊어지기 시작한 것이다충성은 충과 성이 합쳐지는 것이다. 충은 타인을 맞는 진정성이고, 성은 자신을 맞이하는 진정성이다. 임명권자를 향한 맹목 충성은 진정성이 없는 충성이다. 자기 이익 챙기는 길을 분식하기 위해 이용하는 충성이다. 이 진정성 없는 충성이 대한민국 권력을 둘러싼 또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이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새 국가 건설을 위해 학문의 역할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재홍은 민족주의가 혼란을 극복하는 열쇠라 생각하고 강력한 민족주의 지도력의 출현을 바랐다. 그래서 임정 추대를 일관되게 주정해왔다. 임정의 지도력이 무너진 이제 한독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국민당을 갖다 바친 그는 천금을 주고 천리마의 뼈를 사는 심정이었을까? …북쪽에서는 백남운, 홍명희, 김두봉 등 학술의 조직 운동에 주동 인물이 국가 건설에서도 주동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이 조직 운동이 1949년 말 설립된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를 거쳐 과학원 설립으로 이어지면서 학술 연구와 교육이 국가 기능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반면 남쪽에서는 학술 조직 운동이 국가 건설 과정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그 결과 학술원이 상징으로서 의미만을 가진, 국가 기능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한국이 진정한 독립국가로 바로 서기 위해 조성된 미소독립위원회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사실에 있어서 두 나라 모두 점령을 의무가 아니라 권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단독 점령을 못하는 것이 피차 아쉬웠고, 상대방에게 단독 점령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할 점령이 된 것이었다. 조선은 두 나라가 서로 챙기고 싶어 하는 전리품의 하나였다해방 조선의 미소공위는 소련의 국제주의와 미국의 국가주의가 부딪히는 현장이었다. 소련 측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의 미소 협력체제가 미소공위에서 지켜지도록 애쓰는 반면 미국 측은 회담이 결렬되어도 괜찮다는 배짱으로 소련 측 양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 6일 남한 단독정부 추진설이 처음으로 언론에 나타났다…한국인의 장래를 결정하는 회담(미소공위)에 한국인이 주체로 참여하지 못한 것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기구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소공위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과도정부 수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아직 임시과도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단계에서는 협의 상대라는 명목으로 한국인의 정당과 단체들을 회담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옵저버 자격의 참여일 것이다국가 간 회담으로 공동위원회를 만든다면 중국과 영국도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은 점령을 통해 한국과 관련된 특수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고, 한국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 주도하는 입장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영국의 양해를 얻어 국가 간 회담이 아닌 두 점령군의 회담을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조선임시정부 수립 같은 정치와 포괄된 목적을 위해서라면 군대 차원의 회담이라는 것이 어색하다. 회담의 목적과 회담의 주체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미소공위가 갖는 근본과 구조의 약점이었다. 미소공위 구조의 또 하나의 약점은 다자 간 회담이 아니라 양자 간 회담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다자 간 회담이라면 이견이 일어나더라도 조정하는 방법을 다각화해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양자 간 회담에서 양측의 입장이 어긋나면 직접 절충하는 외길밖에 없다. 1차 미소공위가 두달 도 안되어 무기 정회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이 약점이 작용했다.]

 

물론 당시의 혼란스러운 좌우 충돌 속에 비판과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사회혁명의 담당자는 무산계급일 수 밖에 없는가? 백남운은 삼일운동 이전 유산계급은 민족 혁명의 배후 세력과 물적 기초를 이루었지만, 삼일운동 이후 유산계급은 일제의 호부정책으로 인하여 특권을 갖게끔 운영되어, 소부분은 반일제 혁명을 내포하여 왔고 대부분은 일제와 결탁 또는 동맹을 결성하였다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유산계급은 사회 혁명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부르주아지가 담당하였던 역사 혁명성을 갖지 못하고, 프랑스와는 달리 봉건 세력의 대표자인 지주와 시민의 대표자인 자본가가 대립하지 않고 동맹하는 까닭에 현상 유지의 보수화된 성격을 그 속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느낀 바를 저자의 글을 빌어 정리해본다. [한국의 지식층은 한편으로 반공 독재정권의 억압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의 비역사 성향을 받아왔다. 그렇게 수십 년을 지낸 결과, 미국 보다도 더 비역사 성형을 띤 사회가 되어버린 것 같다. 해방 공간을 탐색하는 해방일기 작업을 벌이면서 절실하게 느낀다. 반공 독재정권의 공식 관점이 가진 극심한 편향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대항하는 관점에서도 또 다른 편향성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점에서 '좌우익의 극단파'만이 과거사를 맞는 열정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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