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벼르던 책 주문을 드디어 오늘 했다. ^^

Aladdinus 에서 주문한지라, 14권 밖에 안되는데 가격은 217.58 달러나 한다.

권당 8-9000원이면 사는 책을 이곳에서는 15불은 줘야 한다.

대략 1.8배쯤 되는 돈을 더 내고 사야하는 아픔이 .....

게다가 한국에 돌아갈 때, 이 책들을 전부 데리고 간다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대로,

책이란 소장품이 아닌 소모품으로 여기기로 마음 먹으니, 별로 속상하지 않다.

이제 이 책들 기다리는 낙으로 앞으로 며칠 보내겠구나.

도착하는데도 10일에서 2주 정도는 걸린다.

 

이번 콜렉션은 주로 심리학과 인간관계에 관련된 책들이다.

그 어느때보다 독서가 깊고, 진하게, 잘 되고 있어서 기분이 좋은 요즘....

또 다시 촉촉하게 나를 적셔 줄 이 책들이 빨리 왔으면...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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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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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과 만나는 나의 방식은 좀 남다르다. 어떤 소설에게는 첫 눈에 반해버리기도 한다지만 쿤데라의 소설만큼은 늘 두 번째 만남에서 더욱 강한 스파크를 느끼게 되니 말이다. 대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 펴들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웬일인지 참 재미가 없었다. 그와 나는 그저 스치고 지나갈 인연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다시 펴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는 의외로 열광의 기운을 느꼈다. 일요일 하루를 꼬박 그 책에 빠져, 수없이 밑줄을 긋기도 하고 킥킥대기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의 처녀작 <농담>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대학원 시절, 지하철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집어 들었던 이 책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서야 다시 꺼내어 든 <농담>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에 못지않은 흥분과 즐거움을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그 외에 더 읽었던 <정체성>도 덧붙여서 생각해보자면, 쿤데라의 소설에는 늘 오직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시선이 존재한다. 나는 그 절묘한 시선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미묘함’들을 꼬집어내는 그의 솜씨였다. 사물과 현상의 전면도 아니고 후면도 아닌 바로 이 미묘함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아내는 쿤데라의 탁월한 시선이 그의 소설을 독특하고 빛나게 만드는 것이리라.

 
 진지한 공산당과 냉소적인 농담. 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은 발상을 통해 쿤데라는 삶의 어떤 미묘한 지점에서 드러나는 우스꽝스럽고도 서글픈 아이러니들을 재미나게 그려낸다. 경직된 교조주의자들에게 던져진 풍자적인 농담. 그것의 대가는 매우 참혹한 것이다. 그들에겐 어쩌면 때마침 희생양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 농담 한 마디 때문에 루드빅은 당과 학교에서 제명당한 채 정치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탄광 노동자로 긴 세월을 전락한다. 그는 오랜 세월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의 부담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제마넥이라는, 자신을 당에서 내몬 주동자를 증오한다. 루드빅은 바로 그 증오의 힘으로 가까스로 자신의 내적 균형을 잡고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루드빅과 관련된 다른 인물들, 헬레나, 야로슬라브, 코스트카의 이야기가 각기 독립된 장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서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얽혀있는데, 마지막 장인 제7장에서야 그들은 한데 어우러진다.


제7장에서 쿤데라가 배경으로 깔아놓은 장치가 마을의 민속축제인 기마행렬이다. 축제가 인물들 간의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화해의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은 매우 전통적인 문학적 알레고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흥청망청 하나가 되어 즐거워야할 축제가 아닌 무언가 어색한 축제가 펼쳐진다. 축제는 현대화된 시대와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기만 할 뿐이다. 마치 제마넥을 향해 멋지게 복수하려다 엉뚱하게 발을 접질러버린 루드빅의 공허한 운명같다고나 할까. 혹은 루드빅과 제마넥에게 동시에 버림받은 불쌍한 헬레나의 운명같기도 하고. 루드빅은 오로지 복수를 위해 제마넥 아내 헬레나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지만 제마넥은 이미 아내에게서 마음이 떠난지 오래다. 게다가 그에겐 아름답고 젊은 정부까지 있다. 제마넥과 그의 정부를 대면하는 순간 루드빅은 자신의 증오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고 복수조차 실패했음을 알게 된다. 제마넥에겐 헬레나를 유혹한 것이 아무런 치명적인 아픔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원한 악인이어야할 제마넥도 변해버렸다. 또 제마넥의 젊은 정부에겐 루드빅이나 제마넥이나 그다지 변별력을 발견할 수 없는 그저 비슷한 연배의 같은 세대로 인식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허망함.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p398-399

이미 억울하게 '살아버렸건만' 복수와 증오마저 무의미함을 알아버린 루드빅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저 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먼 옛날, 농담 때문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 순간, 이미 그의 운명은 끝나버렸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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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 문학세계사 / 1992년 11월
평점 :
절판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책이었지만 어쩐지 읽을 수가 없었던 책 <재즈>-토니모리슨-을 읽었다. 최근에는 겉표지도 바뀌고 출판사와 옮긴이도 바뀌어서 새로 나온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1993년도에 문학세계사, 최인자씨가 옮긴 책이다. 나는 조금은 오래 된 이 책의 번역본이 최근 것 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바이올렛이 남편과 바람이 났던 여자애의 장례식을 망쳐놓기까지의 일을 생생한 구어체로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잠깐만, 나는 저 여자를 알고 있어. 저 여자는 레녹스 거리에서 새들의 무리와 함께 살고 있어. 그녀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지. 그는 열여덟 살짜리 소녀와 깊고 절망적인 사랑에 빠졌었어. 그 사랑은 너무나 슬프로 행복한 것이었지. 그는 단지 사랑의 감정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하여 소녀를 총으로 쏘아서 죽여버렸으니까. 소녀의 장례식에 가서 죽은 얼굴에 칼질을 하려고 하다가 그만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저 여자,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교회 밖으로 쫓겨나 버렸지. 그러자 그녀는 눈길을 마구 달려갔던 거야.’

최근 번역된 책에서는 이런 구어체로 번역이 되어있지 않았다. 성공적으로 번역된 소설 첫 머리의 생생한 어조와 충격적인 사건, 겉표지에 실려 있는 미국의 흑인 여자 작가의 사진, 그것도 노벨상을 수상한, 의 기묘한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재즈’라는 ‘진짜 소설’의 첫 느낌을 전해주었다. 이런 종류의 첫 느낌은 흔치않은 종류의 강렬함인데, 최명희의 <혼불>을 처음 접할 때에도 느낀 적이 있다.

 충동적이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애절하고 정감 있게 흐르는 재즈 선율의 이미지와 이 소설의 구조, 내용은 묘한 일체감을 이루어낸다. 재즈를 연주하는 각 악기-피아노랄지, 색소폰, 베이스, 기타 등-의 독주 부분이 소설의 각 장의 화자로 대치된다는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수십 년간 사랑한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절망한 바이올렛의 스토리는 기타 독주, 오직 한 소녀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일곱 번이나 다시 태어나면서 살아왔다고 굳게 믿는 바이올렛의 남편 조의 스토리는 색소폰, 세상과 자신에 대해서 정제되지 못한 충동과 욕망만을 가득 품은 열여덟 살짜리 소녀 도르카스의 스토리는 피아노 연주, 또 주로 방 안에 기거하며 레녹스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추측해내는 숨겨진 화자의 목소리는 은근한 베이스 연주.... 이런 식으로 소설은 한 편의 거대한 재즈를 눈으로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전체적으로 너무나 훌륭하고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다.

처음에 나는 이 소설이 남편의 충격적인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고 그것을 이겨내는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조의 슬프고도 행복한 사랑이 이야기가 1920년대 뉴욕 5번가에서 있던 절망적인 흑인들의 행진에서 울려퍼졌다던 그 북소리처럼 둔중하고 깊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무렵의 흑인들은 남부의 농장에서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다. 농장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도시의 온갖 세태들과 폭발할 듯한 생동감은 소설의 정조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다. 숨겨진 화자도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 도시를 미치도록 사랑한다......클라리넷 연주, 연애, 주먹질, 슬픔에 찬 여인의 목소리. 이런 도시는 나에게 커다란 것을 꿈꾸게 만들며, 삶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 무렵 조와 사랑에 빠지게 된 열여덟의 도르카스는 부모가 불에 타 죽는 등 삶이 견딜 수 없는 것이었고, 솟구치는 사랑의 욕구를 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르카스는 조를 성숙하게 사랑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단지의 그녀의 성향이 은밀하고 내밀한 것들을 좋아한 것이었을 뿐. 도르카스의 이모는 도르카스가 도시의 습성에 물들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결국 그녀는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도시의 재즈 음악은 그녀를 이렇게 달콤하게 유혹했으니 말이다.

‘이리 와요, 이리 와서 나쁜 일 좀 해 봐요.’

음악에 취한 열여덟 살 소녀가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나쁜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자기보다 나이가 30살쯤 많은 젠틀하지만 절망적인 한 남자와의 사랑에 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도르카스가 죽고 그녀의 장례식을 망쳐놓은 바이올렛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먼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다가 다시 장례식 이후로 시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삶의 흔적들을  반추하고 조망해낸다. 특히, 부모에게서 버려져 이름의 성(姓)을 알지 못했던 조가 자신의 성을 흔적 즉, 트레이스(trace)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50년간 예의바르고 무난하게 살아온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먼 옛날의 어떤 흔적이 그를 삶의 덤불 속으로 뛰어들게 했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당신이 부자가 되든, 여전히 가난하든, 건강을 망치게 되든, 오래 살든간에 당신은 결국 항상 맨 처음 시작했던 그곳에서 끝을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놓쳐버린 오직 하나의 것, 젊은 시절의 사랑에 대한 굶주림 속에서 말이다.’

젊은 시절의 사랑, 그 무모한 열정과 충동은 도시에 가득 찬 삶의 열기와 같은 종류의 질감을 지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옥상에서 하늘을 향해 불어대는 흑인 남자의 색소폰 소리가 들려오는 1920년대 할렘, 레녹스 거리의 절망스럽고도 행복한 흔적일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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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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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공지영이 실제로 사형수들을 만나보고 수감원을 방문하는 등의 취재과정을 거쳐서 쓰여진 소설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오만을 떨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진정한 선인도 악인도 없듯이, 오히려 그들이 어떤 비극적인 상황이 만들어낸 우연한 희생자들이라면? 그저, 너무나 운이 없어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가난했으며, 자기가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는 폭력적 환경이 그들을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언젠가 읽은 버트란트 러셀의 ‘인간이 선해지기는 어려워도 타락하기는 매우 쉽다.’는 말대로 어쩌면 그들은 단지 인내심이나 의지력이 지나치게 부족했던 그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휴머니즘적이고 낭만적일 수도 있다. 언젠가 충격 속에 읽었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라는 무시무시한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연쇄 살인범들을 떠올려보면 이런 식의 접근이 얼마나 대책 없는 동정심인가를 금방 깨닫게 된다.

나는 솔직히 인간의 기질이나 근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쪽이고 따라서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한 인간이 어느 순간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이 되리라는 희망은 품지 않는다. 그런 기대를 하는 것 자체를 너무나 소박하다 못해 어리석게까지 여기는 다소 위악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위악도 작년쯤 조금은 누그러졌는데, 그래도 얘들은 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른은 변할 수 없다는 쪽을 고수하는 편이다. 그래서 휴머니즘이라는 어찌 보면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둔탁한 방향으로 문제의 해결점을 좁혀가는 작가의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사형수 정윤수의 인생 스토리 역시 너무나 뻔하고 진부했다. 가정폭력, 동생에 대한 사랑,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음, 가난, 그리고 살인누명. 엄밀히 말하면 정윤수는 전혀 악한 인간이 아니다. 그저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이왕지사 휴머니즘으로 죄인을 용서하고 포용하자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 죄인을 좀 더 확실하고 악랄하게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엄연한 범죄자이자 사형수인 그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듯한 인상을 숨길 수 없었다. ‘십자가 위의 예수 얼굴은 놀랍게도 윤수를 닮아 있었다.’ 라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이것은 조폭 영화가 조폭들을 근사한 인격을 지닌 매력적인 쾌걸남으로 묘사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수작이 빤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책이 좋다. 여자 주인공인 유정이 자신도 모르게 점점 윤수와 모니카 고모에게 동화되어 조금씩 세상과 화해를 해나가듯 나 역시 작가의 진부하고 투박한 휴머니즘 전략에 슬슬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뻔하지만, 또 한번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결론, 결국은 ‘사랑’이다. 윤수의 마지막 말처럼 ‘그냥 사랑했으면 됐을 일’인 것이다. 이런 종류의 투박하지만, 그래도 부정할 수는 없는, 따뜻한 귀결을 이끌어내는 힘은 법에도, 정치에도, 사회 정책에도 없다. 바로 문학의 서사적 힘에만 존재한다. 변덕스럽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꼴도 보기 싫은 어두운 면모를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끌어안으며, 그 안에 꿈틀거리는 또 하나의 비전, 바로 삶의 진정성을 이끌어내는 험한 짓(?)을 바로 문학이 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할 수 있을까. 문학은 절망한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화해의 메신저인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소설이 진부하다고 투박하다고 욕하지 말지어다. 적어도 그녀는 문학을 통해 세상과 화해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것도 같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안의 위악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기, 그녀처럼 세상과 인간에 대해 따뜻한 포용의 눈을 가질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한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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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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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가 사랑을 나눈 시간은 고작 4일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후 이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서로를 그렸다. 게다가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을 나눴을 때 나이가 각각 45세, 52세였다. 가능한 일일까? 여자 나이 45세에도 이런 열정의 로맨스가 가능하단 말이지? 어찌 보면 꽤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늙어버린 인생이냐, 나름대로 아직은 젊은 인생이냐를 가르는 주요 잣대중 하나로 로맨스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로 판단하고 있는 내가 아니었던가. 45세에도 로맨스가 가능하단 말이지?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 아닌) 에궁. 생각해보니, 45세가 아닌 55세, 65세면 어떠랴. 누군가에게는 20세에도 로맨스가 불가능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75세에도 로맨스는 가능한 것이리라.
 
 돌이켜보면 중년의 사랑을 이런 종류의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은연중에 로맨틱한 사랑은 젊은이들만의 특권이 되어버렸단 말이지. 삶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한 순간은 내가 여자로서(혹은 남자로서) 가장 아름답게 빛났던 한 순간일텐데, 그런 순간이 중년 이후에 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는가.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엄연한 ‘로맨스’가 남들에게는 배불러서 꼴깝 떠는 치정사건(으, 단어의 어감하고는!)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사회면 신문기자들이 하는 것일 테고, 어쨌든 문학의 영역은 삶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일 뿐 판단을 종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배우자가 있는 여자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그 사랑은 현실의 권태나 고통을 잊는 최면제인지, 아니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진정한 자아와 인생을 깨닫게 해주는 각성제인지는 그 누구도 쉽사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허심탄회한 존재론으로 묶여 있다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이해관계로 묶여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기에... 문학은 그저 보여줄 뿐이다.
 
내친김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구해 보았다.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은 메릴 스트립과 클리튼 이스트우드. 영화 자체는 잘 만들었다.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들은 이 영화까지 모두 세 편 보았는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미스틱 리버> 등. 모두 괜찮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왜 하필 클리튼 이스트우드가 주연까지 맡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는 근사하고 멋지게 잘 늙은 배우이긴 하다. 하지만 52세 킨케이드 역을 하기엔 65세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너무나 나이가 들어보였다. 누군가는 젊은 배우들보다 더 섹시했다고 말하기는 했다지만. 흐. 하지만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가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장면은 무척 슬펐다. 왜냐면 그 둘이 죽는 날까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약 없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은 너무나 끔찍한 형벌인 것이다. 으으, 아아.

이렇게 상식적인 선을 넘어서면서까지 사랑을 감행하는 이들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순수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그 어떤 것들보다 바로 이 ‘사랑’을 믿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이‘사랑’이란 것을 믿다니, 얼마나 어리석고도 또 순수한가. 'Too much love will kill you...'라는 경고의 노랫말도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순수한 영혼들은 늘 그렇듯 삶의 기쁨과 고통을 극단적으로 느껴낼 수 밖에 없는 운명들인 것이다. 그들은 보다 생생한 지상의 삶에 선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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