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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밀란 쿤데라의 소설과 만나는 나의 방식은 좀 남다르다. 어떤 소설에게는 첫 눈에 반해버리기도 한다지만 쿤데라의 소설만큼은 늘 두 번째 만남에서 더욱 강한 스파크를 느끼게 되니 말이다. 대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 펴들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웬일인지 참 재미가 없었다. 그와 나는 그저 스치고 지나갈 인연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다시 펴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는 의외로 열광의 기운을 느꼈다. 일요일 하루를 꼬박 그 책에 빠져, 수없이 밑줄을 긋기도 하고 킥킥대기도 하면서 그 자리에서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의 처녀작 <농담>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대학원 시절, 지하철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기에 집어 들었던 이 책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이제서야 다시 꺼내어 든 <농담>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때에 못지않은 흥분과 즐거움을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그 외에 더 읽었던 <정체성>도 덧붙여서 생각해보자면, 쿤데라의 소설에는 늘 오직 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시선이 존재한다. 나는 그 절묘한 시선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미묘함’들을 꼬집어내는 그의 솜씨였다. 사물과 현상의 전면도 아니고 후면도 아닌 바로 이 미묘함 속에서 삶의 진실을 찾아내는 쿤데라의 탁월한 시선이 그의 소설을 독특하고 빛나게 만드는 것이리라.
진지한 공산당과 냉소적인 농담. 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은 발상을 통해 쿤데라는 삶의 어떤 미묘한 지점에서 드러나는 우스꽝스럽고도 서글픈 아이러니들을 재미나게 그려낸다. 경직된 교조주의자들에게 던져진 풍자적인 농담. 그것의 대가는 매우 참혹한 것이다. 그들에겐 어쩌면 때마침 희생양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 농담 한 마디 때문에 루드빅은 당과 학교에서 제명당한 채 정치범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탄광 노동자로 긴 세월을 전락한다. 그는 오랜 세월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의 부담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제마넥이라는, 자신을 당에서 내몬 주동자를 증오한다. 루드빅은 바로 그 증오의 힘으로 가까스로 자신의 내적 균형을 잡고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루드빅과 관련된 다른 인물들, 헬레나, 야로슬라브, 코스트카의 이야기가 각기 독립된 장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이 인물들은 서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얽혀있는데, 마지막 장인 제7장에서야 그들은 한데 어우러진다.
제7장에서 쿤데라가 배경으로 깔아놓은 장치가 마을의 민속축제인 기마행렬이다. 축제가 인물들 간의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내고 화해의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것은 매우 전통적인 문학적 알레고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흥청망청 하나가 되어 즐거워야할 축제가 아닌 무언가 어색한 축제가 펼쳐진다. 축제는 현대화된 시대와 기묘한 부조화를 이루고,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초라하기만 할 뿐이다. 마치 제마넥을 향해 멋지게 복수하려다 엉뚱하게 발을 접질러버린 루드빅의 공허한 운명같다고나 할까. 혹은 루드빅과 제마넥에게 동시에 버림받은 불쌍한 헬레나의 운명같기도 하고. 루드빅은 오로지 복수를 위해 제마넥 아내 헬레나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지만 제마넥은 이미 아내에게서 마음이 떠난지 오래다. 게다가 그에겐 아름답고 젊은 정부까지 있다. 제마넥과 그의 정부를 대면하는 순간 루드빅은 자신의 증오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고 복수조차 실패했음을 알게 된다. 제마넥에겐 헬레나를 유혹한 것이 아무런 치명적인 아픔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원한 악인이어야할 제마넥도 변해버렸다. 또 제마넥의 젊은 정부에겐 루드빅이나 제마넥이나 그다지 변별력을 발견할 수 없는 그저 비슷한 연배의 같은 세대로 인식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린 허망함.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복수에 의해서 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p398-399
이미 억울하게 '살아버렸건만' 복수와 증오마저 무의미함을 알아버린 루드빅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저 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먼 옛날, 농담 때문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 순간, 이미 그의 운명은 끝나버렸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