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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2년 10월
평점 :
주인공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가 사랑을 나눈 시간은 고작 4일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후 이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았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서로를 그렸다. 게다가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을 나눴을 때 나이가 각각 45세, 52세였다. 가능한 일일까? 여자 나이 45세에도 이런 열정의 로맨스가 가능하단 말이지? 어찌 보면 꽤나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늙어버린 인생이냐, 나름대로 아직은 젊은 인생이냐를 가르는 주요 잣대중 하나로 로맨스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로 판단하고 있는 내가 아니었던가. 45세에도 로맨스가 가능하단 말이지?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 아닌) 에궁. 생각해보니, 45세가 아닌 55세, 65세면 어떠랴. 누군가에게는 20세에도 로맨스가 불가능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75세에도 로맨스는 가능한 것이리라.
돌이켜보면 중년의 사랑을 이런 종류의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은연중에 로맨틱한 사랑은 젊은이들만의 특권이 되어버렸단 말이지. 삶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한 순간은 내가 여자로서(혹은 남자로서) 가장 아름답게 빛났던 한 순간일텐데, 그런 순간이 중년 이후에 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는가. 문제는 나에게 있어서 엄연한 ‘로맨스’가 남들에게는 배불러서 꼴깝 떠는 치정사건(으, 단어의 어감하고는!)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사회면 신문기자들이 하는 것일 테고, 어쨌든 문학의 영역은 삶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일 뿐 판단을 종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배우자가 있는 여자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그 사랑은 현실의 권태나 고통을 잊는 최면제인지, 아니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진정한 자아와 인생을 깨닫게 해주는 각성제인지는 그 누구도 쉽사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허심탄회한 존재론으로 묶여 있다기 보다는 무의식적인 이해관계로 묶여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기에... 문학은 그저 보여줄 뿐이다.
내친김에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구해 보았다.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은 메릴 스트립과 클리튼 이스트우드. 영화 자체는 잘 만들었다.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들은 이 영화까지 모두 세 편 보았는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미스틱 리버> 등. 모두 괜찮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왜 하필 클리튼 이스트우드가 주연까지 맡았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는 근사하고 멋지게 잘 늙은 배우이긴 하다. 하지만 52세 킨케이드 역을 하기엔 65세 클린트 이스트 우드가 너무나 나이가 들어보였다. 누군가는 젊은 배우들보다 더 섹시했다고 말하기는 했다지만. 흐. 하지만 프란체스카와 킨케이드가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장면은 무척 슬펐다. 왜냐면 그 둘이 죽는 날까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약 없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은 너무나 끔찍한 형벌인 것이다. 으으, 아아.
이렇게 상식적인 선을 넘어서면서까지 사랑을 감행하는 이들의 영혼이 근본적으로 순수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그 어떤 것들보다 바로 이 ‘사랑’을 믿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이‘사랑’이란 것을 믿다니, 얼마나 어리석고도 또 순수한가. 'Too much love will kill you...'라는 경고의 노랫말도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순수한 영혼들은 늘 그렇듯 삶의 기쁨과 고통을 극단적으로 느껴낼 수 밖에 없는 운명들인 것이다. 그들은 보다 생생한 지상의 삶에 선 존재들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