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 문학세계사 / 1992년 11월
평점 :
절판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책이었지만 어쩐지 읽을 수가 없었던 책 <재즈>-토니모리슨-을 읽었다. 최근에는 겉표지도 바뀌고 출판사와 옮긴이도 바뀌어서 새로 나온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1993년도에 문학세계사, 최인자씨가 옮긴 책이다. 나는 조금은 오래 된 이 책의 번역본이 최근 것 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았다. 그것은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바이올렛이 남편과 바람이 났던 여자애의 장례식을 망쳐놓기까지의 일을 생생한 구어체로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잠깐만, 나는 저 여자를 알고 있어. 저 여자는 레녹스 거리에서 새들의 무리와 함께 살고 있어. 그녀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지. 그는 열여덟 살짜리 소녀와 깊고 절망적인 사랑에 빠졌었어. 그 사랑은 너무나 슬프로 행복한 것이었지. 그는 단지 사랑의 감정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하여 소녀를 총으로 쏘아서 죽여버렸으니까. 소녀의 장례식에 가서 죽은 얼굴에 칼질을 하려고 하다가 그만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저 여자, 바이올렛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교회 밖으로 쫓겨나 버렸지. 그러자 그녀는 눈길을 마구 달려갔던 거야.’

최근 번역된 책에서는 이런 구어체로 번역이 되어있지 않았다. 성공적으로 번역된 소설 첫 머리의 생생한 어조와 충격적인 사건, 겉표지에 실려 있는 미국의 흑인 여자 작가의 사진, 그것도 노벨상을 수상한, 의 기묘한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재즈’라는 ‘진짜 소설’의 첫 느낌을 전해주었다. 이런 종류의 첫 느낌은 흔치않은 종류의 강렬함인데, 최명희의 <혼불>을 처음 접할 때에도 느낀 적이 있다.

 충동적이고 자유분방하면서도 애절하고 정감 있게 흐르는 재즈 선율의 이미지와 이 소설의 구조, 내용은 묘한 일체감을 이루어낸다. 재즈를 연주하는 각 악기-피아노랄지, 색소폰, 베이스, 기타 등-의 독주 부분이 소설의 각 장의 화자로 대치된다는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수십 년간 사랑한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절망한 바이올렛의 스토리는 기타 독주, 오직 한 소녀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이 일곱 번이나 다시 태어나면서 살아왔다고 굳게 믿는 바이올렛의 남편 조의 스토리는 색소폰, 세상과 자신에 대해서 정제되지 못한 충동과 욕망만을 가득 품은 열여덟 살짜리 소녀 도르카스의 스토리는 피아노 연주, 또 주로 방 안에 기거하며 레녹스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추측해내는 숨겨진 화자의 목소리는 은근한 베이스 연주.... 이런 식으로 소설은 한 편의 거대한 재즈를 눈으로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전체적으로 너무나 훌륭하고 완벽한 구성을 보여준다.

처음에 나는 이 소설이 남편의 충격적인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고 그것을 이겨내는 바이올렛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조의 슬프고도 행복한 사랑이 이야기가 1920년대 뉴욕 5번가에서 있던 절망적인 흑인들의 행진에서 울려퍼졌다던 그 북소리처럼 둔중하고 깊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무렵의 흑인들은 남부의 농장에서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었다. 농장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도시의 온갖 세태들과 폭발할 듯한 생동감은 소설의 정조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다. 숨겨진 화자도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이 도시를 미치도록 사랑한다......클라리넷 연주, 연애, 주먹질, 슬픔에 찬 여인의 목소리. 이런 도시는 나에게 커다란 것을 꿈꾸게 만들며, 삶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 무렵 조와 사랑에 빠지게 된 열여덟의 도르카스는 부모가 불에 타 죽는 등 삶이 견딜 수 없는 것이었고, 솟구치는 사랑의 욕구를 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르카스는 조를 성숙하게 사랑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단지의 그녀의 성향이 은밀하고 내밀한 것들을 좋아한 것이었을 뿐. 도르카스의 이모는 도르카스가 도시의 습성에 물들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결국 그녀는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도시의 재즈 음악은 그녀를 이렇게 달콤하게 유혹했으니 말이다.

‘이리 와요, 이리 와서 나쁜 일 좀 해 봐요.’

음악에 취한 열여덟 살 소녀가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나쁜 일이란 무엇이었을까. 자기보다 나이가 30살쯤 많은 젠틀하지만 절망적인 한 남자와의 사랑에 빠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은 도르카스가 죽고 그녀의 장례식을 망쳐놓은 바이올렛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먼 과거로 시간을 되돌리다가 다시 장례식 이후로 시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삶의 흔적들을  반추하고 조망해낸다. 특히, 부모에게서 버려져 이름의 성(姓)을 알지 못했던 조가 자신의 성을 흔적 즉, 트레이스(trace)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50년간 예의바르고 무난하게 살아온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먼 옛날의 어떤 흔적이 그를 삶의 덤불 속으로 뛰어들게 했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당신이 부자가 되든, 여전히 가난하든, 건강을 망치게 되든, 오래 살든간에 당신은 결국 항상 맨 처음 시작했던 그곳에서 끝을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놓쳐버린 오직 하나의 것, 젊은 시절의 사랑에 대한 굶주림 속에서 말이다.’

젊은 시절의 사랑, 그 무모한 열정과 충동은 도시에 가득 찬 삶의 열기와 같은 종류의 질감을 지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옥상에서 하늘을 향해 불어대는 흑인 남자의 색소폰 소리가 들려오는 1920년대 할렘, 레녹스 거리의 절망스럽고도 행복한 흔적일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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