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공지영이 실제로 사형수들을 만나보고 수감원을 방문하는 등의 취재과정을 거쳐서 쓰여진 소설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오만을 떨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진정한 선인도 악인도 없듯이, 오히려 그들이 어떤 비극적인 상황이 만들어낸 우연한 희생자들이라면? 그저, 너무나 운이 없어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가난했으며, 자기가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는 폭력적 환경이 그들을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언젠가 읽은 버트란트 러셀의 ‘인간이 선해지기는 어려워도 타락하기는 매우 쉽다.’는 말대로 어쩌면 그들은 단지 인내심이나 의지력이 지나치게 부족했던 그저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휴머니즘적이고 낭만적일 수도 있다. 언젠가 충격 속에 읽었던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라는 무시무시한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연쇄 살인범들을 떠올려보면 이런 식의 접근이 얼마나 대책 없는 동정심인가를 금방 깨닫게 된다.

나는 솔직히 인간의 기질이나 근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쪽이고 따라서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한 인간이 어느 순간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바람직한 인간이 되리라는 희망은 품지 않는다. 그런 기대를 하는 것 자체를 너무나 소박하다 못해 어리석게까지 여기는 다소 위악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위악도 작년쯤 조금은 누그러졌는데, 그래도 얘들은 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른은 변할 수 없다는 쪽을 고수하는 편이다. 그래서 휴머니즘이라는 어찌 보면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둔탁한 방향으로 문제의 해결점을 좁혀가는 작가의 방식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사형수 정윤수의 인생 스토리 역시 너무나 뻔하고 진부했다. 가정폭력, 동생에 대한 사랑,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음, 가난, 그리고 살인누명. 엄밀히 말하면 정윤수는 전혀 악한 인간이 아니다. 그저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이왕지사 휴머니즘으로 죄인을 용서하고 포용하자는 의도가 있었다면, 그 죄인을 좀 더 확실하고 악랄하게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엄연한 범죄자이자 사형수인 그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듯한 인상을 숨길 수 없었다. ‘십자가 위의 예수 얼굴은 놀랍게도 윤수를 닮아 있었다.’ 라는 부분에서 극에 달한다. 이것은 조폭 영화가 조폭들을 근사한 인격을 지닌 매력적인 쾌걸남으로 묘사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쩌면 수작이 빤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이 책이 좋다. 여자 주인공인 유정이 자신도 모르게 점점 윤수와 모니카 고모에게 동화되어 조금씩 세상과 화해를 해나가듯 나 역시 작가의 진부하고 투박한 휴머니즘 전략에 슬슬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뻔하지만, 또 한번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결론, 결국은 ‘사랑’이다. 윤수의 마지막 말처럼 ‘그냥 사랑했으면 됐을 일’인 것이다. 이런 종류의 투박하지만, 그래도 부정할 수는 없는, 따뜻한 귀결을 이끌어내는 힘은 법에도, 정치에도, 사회 정책에도 없다. 바로 문학의 서사적 힘에만 존재한다. 변덕스럽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꼴도 보기 싫은 어두운 면모를 아무런 가치 판단 없이 끌어안으며, 그 안에 꿈틀거리는 또 하나의 비전, 바로 삶의 진정성을 이끌어내는 험한 짓(?)을 바로 문학이 하지 않으면 어느 누가 할 수 있을까. 문학은 절망한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화해의 메신저인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소설이 진부하다고 투박하다고 욕하지 말지어다. 적어도 그녀는 문학을 통해 세상과 화해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것도 같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안의 위악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기, 그녀처럼 세상과 인간에 대해 따뜻한 포용의 눈을 가질 수 있는 그 날을 기대한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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