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뜻밖의 미술관 -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3년 5월
평점 :
이 책은 <명화 거꾸로보기>와 <화가 다시보기> 두 부분으로 나누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 저자는 아무런 의심없이 믿어왔던 것의 배신(?)을 통해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먼저 <명화 거꾸로 보기>는 명화작품을 예시로 들면서 지금껏 알고 있던 우리들의 믿음에 생채기를 내고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라고 이야기해 준다.
고대 조각상은 모두 흰색이라고 알고 있지만 원래의 조각상은 빨강, 노랑등 원색의 화려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세월의 흔적으로 흰색만 남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사람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이 흰색으로만 남은 조각상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대 문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흰색일수록 아름답다>는 근거없는 왜곡된 생각을 만들어 냈다. 이는 식민지 시대 인종주의, 서구 우월주의의 미학적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잘못된 편견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잘 알려주는 예시다.
이 대목에서 문득 드는 생각 하나, 우리나라도 인종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인데 예전부터 백의민족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주입식으로 교육받은 탓도 있지 않을까? 엉뚱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것도 부지불식중에 영향을 끼쳤다면 다음의 것도 생각해 보자. 조선보다 더 먼 과거 고구려나 고려시대의 의상은 무척 화려한 원색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 늘 변화한다. 이러한 것들이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전체를 바라볼 줄 모르고 지엽적이며 국한적으로 제공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환경에서는 잘못된 왜곡이나 편견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분야의 경험과 독서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왜곡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일 것이다.
서양의 중세시대는 종교가 우선시되고 인간의 욕망은 억압받던 암울한 시대가 연상되지만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브뤼헐의 <농가의 혼례식> 그림을 보면 결혼식 날 다 같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며 맥주와 곁들여 즐겁고 활기차기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농민의 춤>이라는 작품에서는 백파이프 연주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는 마을 축제 모습을 볼 수 있다. 남녀가 입을 맞추는가 하면 후대에 삭제되었지만 건초더미 위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도 담겨 있다고 한다. 금욕주의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세속적인 흥겨움과 즐거움은 언제나 있어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밖에 예수의 실제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셈족(유대인)과 시리아인의 모습을 컴퓨터로 합성한 결과 예수는 153cm키에 까무잡잡하고 다부진 몸을 한 평범하고 투박한 젊은이라고 한다. 하지만 서구인들이 상상한 예수의 모습은 표준적이며 잘생긴 백인의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최초의 누드화인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육체적 사랑뿐 아니라 부부의 영원한 유대를 상징하는 그림이지만 사실 나체의 모델은 고급 매춘부였다고 한다. 그림속의 음란한 매춘부의 유혹하는 모습은 16세기 미술사 조르조 바사리가 <정숙한 비너스>로 재정의하면서 수줍고 순수하며 행실이 바른 여인의 모습으로 이미지가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여러 작픔들과 저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보는 관점과 특정인 혹은 집단에 의해 진실이 왜곡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진실이란 무엇일까? 그런 것이 존재하기나 할까? 이런 생각이 든다.
<화가 다시보기>편에서는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당대의 시대배경과 함께 그들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인상깊었던 것은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그린 판타지 그림이다. 대표작인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은 세 폭의 패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에덴동산의 풍요로움으로부터 타락한 모습을 거쳐 지옥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괴기하며 환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화가의 작품은 타락을 경계한 작품이라는 해석이 주를 이루지만 이단적 교파인 아담파의 신도였던 화가가 육체적 쾌락이 죄가 아니라 낙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신념을 묘사한 것이라는 평도 있다. 그림은 지면상의 관계로 작아서 식별이 힘든 부분도 있지만 저자가 설명해주는 내용을 토대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갖 성애에 대한 다양한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어쨌든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
중세시대부터 유럽 왕실은 왜소증을 앓는 난쟁이를 궁중에 두는 전통을 18세기말까지 이어갔다다. 왕족과 귀족들에게 난쟁이는 사유재산으로 희귀한 고대서적이나 그림에 다름 없었다. 그렇기에 당대의 많은 작품들에 나타난 난쟁이의 모습을 묘사한 것들에는 기형적 외모, 광인, 수염난 여성등 희화화 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는 난쟁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존엄한 인격성을 부여했다. 권력욕과 명예욕이 강했던 화가는 당시 화가의 위상이 난쟁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에 그들에게 감정을 깊게 느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분석이 있다. 권력에 대한 강한 욕심이 있으면서 동시에 소외되어 외면받는 사람들에게 따듯한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생경스럽기도 하지만, 다양한 인간의 형태를 보는 듯 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작품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통찰과 지적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진실이라고 단정하기에 앞서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제대로 된 사실을 알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