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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80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지음, 이현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1월
평점 :
[① 유쾌하고 즐거움. 또는 그런 느낌 ② 감성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이란 사전적 의미를 지닌 ‘쾌락’이란 명사는 밝은 이미지보다 어두운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단어다. 이 단어를 성적인 개념과 결합시켜서 극단적인 한계 상황에 노출시켰을 때는 사디즘을 연상시키기도 하니 ‘부적절’한 단계를 넘어서 ‘부정적’이라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하나의 단어를 오랜 시간 곱씹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이탈리아 유미주의 문학의 기수로 지칭되는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소설 《쾌락(2016.01.15. 을유문화사)》을 읽기 시작하면서 명사 ‘쾌락’을 대하는 나의 입장을 정리하였단 의미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 저장소에 명사 ‘쾌락’은 과거, 현재에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쾌락》을 읽은 후 나에게 불편하고 부적절하며 부정적이기만 했던 단어 ‘쾌락’은 조금 다른 의미로 저장되었다. ‘쾌락’을 ‘허망하다’ 또는 ‘허무하다’라는 형용사로 풀이하고 싶다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쾌락》은 주인공 ‘안드레아 스페렐리피에스키 두젠타’ 백작이 ‘엘레나 무티’를 만났을 때부터 ‘마리아 페레스 이 카프데빌라’와 이별하기까지의 시간을 그린 소설이다. 안드레아가 엘레나와 헤어지고 마리아와 만나게 되기까지 안드레아에게 여러 명의 여인이 있었으나 모두 삭제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안드레아의 삶에 영향을 준 여인은 엘레나와 엘레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마리아가 유일하니 말이다. 여기서 잠깐, 마리아가 엘레나를 떠올리게 만든 건 사실이나 두 여인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엘레나는 관능적이고 도발적이며 화려하지만, 마리아는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깊고 지적이고 정신적인 여인이고 우울함이 묻어나는 셸리의 시를 좋아한다.(p.486)
작가는 불건전한 자질(p.53)이란 문구로 안드레아를 쾌락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당연한 듯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엘레나와의 만남에서 안드레아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육체적 탐욕을 만끽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엘레나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안드레아를 떠나고, 안드레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쾌락과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랑을 쫓으며 불안한 삶을 지속한다. 그러던 중 안드레아는 엘레나와 정반대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 마리아를 만나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소설을 읽을 때 가끔 다른 작품의 주인공이 떠오를 때가 있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쾌락》을 읽으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떠올랐다. 눈앞에 있는 진정한 사랑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물이라면 스칼렛 오하라를 따라올 자가 없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사이에서 무엇이 진정한 사랑이며 사랑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지에 관해서는 정해진 답이 없겠으나, 안드레아는 엘레나와의 잘못된 만남에서 비롯된 진실성과 도덕성을 놓치고 본능에만 충실한 사랑(이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에 열중한 탓에 진정한 사랑을 놓치고 마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쾌락》은 주인공 안드레아가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가 비극을 맞이하는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보다 살아있는 묘사, 화려한 문장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19세기 귀족사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했는지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안드레아는 부친이 그에게 전해 준 좌우명을 한시도 잊어선 안될 일이었다.
예술 작품을 만들듯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야 한다. 지적인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우월함은 모두 여기 있다.(p.52)
어떻게 해서라도, 가령 쾌락의 순간에도 자유를 완전히 지켜야 한다. 지적인 인간의 규범은 이러하다.(p.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