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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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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에 소설 두세 편을 읽을까 말까 하다가 최근 3개월간 외국 소설을 10편가량 읽었다. 공교롭게 다 장편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한 번도 읽은 적 없던 대가들(알베르 카뮈, 필립 로스, 무라카미 하루키, 줄리안 반스 등)의 작품이었다. 작품들을 읽으며 느낀 공통점은 처음부터 흥미를 쉽게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0페이지가 넘어가기 전까지 섣불리 작품을 가늠하거나, 인물을 파악할 수 없었다. 읽히지 않아 앞 페이지를 두세 번 더 펼쳐보기 일 수였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긴 터널 끝에 눈부신 빛줄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듯 그 묘한 어지러움에 흥분했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느끼게 될 감동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 터널이 너무 어둡고 길었다.

 

 원래 서문이나 작품 해설을 먼저 읽지 않는 터라 작품을 먼저 펼쳤다. 책에서 처음 만난 러바인이라는 인물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며 읽었다. 하지만 자꾸만 흩어지기 시작하는 이미지들을 주워 모으기에 힘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이 말’을 어떤 인물이 말하고 있는지조차 쫓아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번역의 잘못인지, 원서가 그런 것인지, 인물이 많아서 혹은 인물의 개성이 말에 배여 있지 않아서, 그저 나의 이해력이나 집중도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 읽기 불편했다. 힘들게 <이슬비>를 다 읽어 냈을 때는, 몹시 어려운 시를 읽은 듯한 머리아픔. 그리고 단서들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나름의 해석이 나조차도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어 작품해설을 읽지 않고는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작품해설을 읽고 서문까지 읽어버렸다. 그리고 작품보다 오히려 서문에서 더 매력을 느꼈다. 작품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여전히 읽기는 고역이었다. 단편을 너무 오랜만에 읽어서인지, 장편이 주는 상대적인 친절함이 없어 힘들었다. 다섯 작품 모두 아주 짙은 매력을 가진 인물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을 너무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밀한 통합>의 그로버나 <이슬비>의 러바인 등 인물들은 너무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었고, 가끔은 그 잘난 체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상황은 기꺼이 공감 가능한 일상의 일이지만, 과하게 낯설게 다가오는 문체와 인물들이 끝없이 펼치는 공상은 따라가기 어렵다. 그나마 가장 힘을 풀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로우 랜드>라 할 수 있다. 플랜지와 아내 씬디의 재치있는 대화가 앞부분에 배치되어 작품 안으로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내의 바가지에 못 이겨 밖으로 나온 친구들과 쓰레기 폐기장에서 과거에 대한 허세와 현재의 회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 밖에도 중간 중간 양념을 치는 핀천 특유의 유머가 그나마 책을 끝까지 버티고 읽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이 책은 단편이 주가 되는 단순한 단편집이 아니라, 그의 서문과 함께 읽어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그가 말하는 작품 배경과 작품을 쓸 때 느낀 고뇌와 반성을 엿보며 읽는다면 핀천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그의 작품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책이 될 것이다. 비록 나는 핀천의 다른 작품을 읽지 못했지만, 핀천이 앞서 내놓은『브이』나『중력의 무지개』를 읽은 독자라면 그의 작품을 상호적으로 읽어 또 다른 의미를 도출해낼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책 표지는 짙은 핏빛이다. 마치 토머스 핀천이 소설을 쓰기 위해 흘린 핏자국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묵혀져 바랜듯한 분위기다. 책에 대한 전체적인 감상은 이렇다.『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는 제목은 토머스 핀천 자신을 가리키거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직 이루지 못한 성장을 빗대어 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역시 아직 이 책을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하는 느린 독자이다. 얼마나 더 느리게 읽어야 이 책을 독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언젠가 터널 끝에 빛줄기를 맛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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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2]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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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유를 택하여 불안 속에 살거나, 안정을 택하여 그 풍요를 잃지 않기 위해 구속당하거나. 두 가지 삶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라고 할 수 있지만, 현 사회는 일찍이 그 선택권을 박탈하거나 감히 선택할 수 없도록 개인을 두려움에 장악시켜 약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가장 가중시키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인 부모 혹은 나의 아내 그리고 나의 자식이다.

 

 난과 핑핑은 타오타오를 위해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간다. 대학에서 위대한 학자를 꿈꾸던 난은 전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노동일을 하며 ‘돈’을 위해 살아간다. 그나마 사전을 놓지 않고, 편집 일을 알아보는 것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하지만 결국 돈이 많이 들어오는 요리사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놓게 된다.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는 그 박탈감과 억울함은 타오타오를 향한 분노로 표출하게 되고, 오히려 이는 타오타오를 개인이 아닌 자신의 꿈을 갉아먹는 족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성공해야 하는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며 아들의 자유를 억압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타오타오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난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재능이 탁월하다. 하지만 난의 현실은 그저 자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요리사일 뿐이다. 누군가에겐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한 성공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난 스스로 자신을 늘 패배자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가 함부로 문단에 뛰어들 수 없었던 이유는, 자신을 패배자라고 만든 성공과 그 아늑한 그늘을 함께 만들고 이제야 한숨을 돌려 쉬고 있는 제 아내 때문이다. 그는 얻은 것이 많은 만큼 잃을 것이 많아졌다. 현실이 덮어버린 이상 속에 정신 착란 증상까지 보이며 힘들어 한다.

 

 난이 그러한 혼란을 극복하게 된 계기는 오히려 풍요를 흔들리게 만든 ‘현실이 주는 불안’이었다. 자신이 문학을 택하지 않아도 결국 현실은 이토록 갑작스레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염두 하지 않고 몰두하게 만든다. 핑핑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다시 모두가 하찮게 여기는 노동에 종사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제 서야 삶은 안정 속에서도 늘 불안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벽한 이분이란 없다. 그렇기에 그가 자유로운 시작(詩作)을 택한다하더라도 곧바로 불안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난은 이미 주위에 타락해버린 예술인들을 보았다. 결국 어떤 삶을 택하느냐가아니라, 달려오는 삶 속에 자신이 어떻게 중심을 잡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중국에 있는 난의 동생 닝은 미국으로 가면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지만, 정작 미국에서 오랜 삶을 보낸 난은 동생의 행보를 반대한다. 세상의 기준은 늘 이방인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중국에서 정부를 반대하는 중국인도, 미국에서 살고 있는 중국인도, 시를 짓는다고 하지만 완벽히 문단에 속하지 못하는 난도 모두 이방인이다. 기준의 세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모두가 이방인이 될 수 있고 그에따라 자유를 박탈당한다. 자유로운 삶이란, 나를 가두는 기준을 박차고 자신만의 국가관과 인생관을 지니며 살아가는 것이다. 난은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노래를 하고 싶으면

분명히 노래를 하라.

 

- 난의 시작노트 <봄> 中 457p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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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벌써 2014년의 반이 지나가고 있다. 정말 바빴던 학기가 마무리 되고, 수많은 과제들도 끝이 보인다. 올해 상반기 만큼 소설을 많이 읽었던 적이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소설을 읽은 만큼 찬찬히 정리할 시간은 부족했다. 급하게 써내린 앞선 리뷰들이 조금은 창피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조금 더 짙어지기를 바라며 5월의 주목 신간.

 

 

 

 1. 서울 ㅣ 손홍규 ㅣ 창비

 

 폐허가 된 서울에 남은 소년의 이야기. 폐허가 일어나는 과정이 아니라, 폐허 속에 남겨진 소년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소설은 그렇게 '재난'이나 '종말'을 넘어선 '종말 이후'의 세계를 우리 눈앞에 불쑥 들이민다. "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도시 서울. 친구는 나에게 서울 한복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무언의 자극이 온다고 한다. 나는 친구에게 자극 뿐 아니라 무기력도 동시에 찾아올거라 말했다. 그렇게 서울은 화려한 만큼 한 개인을 너무도 작게 묻어버린다. 어쨌든, 이 소설 끌린다.

 

 

 2. 소년이 온다 ㅣ 한강 ㅣ 창비

 

 한강의 소설을 한번도 읽어 본 적이 없다. 서점에서 한강의 소설을 선 자리에서 후루룩, 맛보았을 뿐이다. 그 잠깐 동안에도 섬세한 문체 속 강단있는 외침이 끌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뒤로 한강의 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없으면 책을 읽지 않는 나이니), 비로소 다시 한강의 소설을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미루면 안 될 것 같다. 적어도 5월이 많이 흐르기 전에는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읽고 싶다.

 

 

 

 

 

 3. 미국의 목가 1,2 ㅣ 필립 로스 ㅣ문학동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고 한동안 조그만 우울증에 시달렸다. <에브리맨>을 읽기 전 겪었던, 죽음의 단상 그리고 <에브리맨>을 읽고 난 뒤 보고 듣게 되는 죽음의 목소리 들이 책과 엮어져 자꾸만 나를 권태의 침잠으로 몰고 갔다. 솔직히 <미국의 목가> 역시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에, 읽기가 조금은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필립 로스의 작품이 주는 그 치밀한 기록 아래 닿게 되는 삶의 진실은 결코 피할 수 없고 피해서는 안되기에 이 책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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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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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로니카가 일기장을 주지 않는다. 대신 수수께끼 같은 일부분의 기록만 보낸다. 에이드리언답게 복잡한 사유가 논리적인 형태로 기술된 메모다. 일기는 책임의 연쇄 고리를 배분하려는 타이밍에서 끊긴다. 토니는 뒤의 말을 추측하며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지만 금세 그만둔다. 자신이 그 가정 속에 들어가 책임을 배분 받아야 하는 이유와 그 가정으로 바뀌게 될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말한다. 여전히 감을 못 잡는군. 그녀는 만취된 구역질로 갈겨놓은 편지를 던져준다. 토니는 낯 뜨겁고 치기어린 저주의 향연에 사과의 메일을 보내지만, 답장은 같다. 좀처럼 이해를 하지 못하네. 그녀는 토니에게 정신이 불편한 사람 하나를 보여준다. 그제 서야 토니는 그 저주가 단순한 모욕에 그치지 않았음을 감 잡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진심어린 죄책감과 함께 사과를 하지만 베로니카는 말한다. 여전히 감을 못 잡는 군. 토니는 뒤늦게 펍에서 진실을 듣게 된다. 그리고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의 가정으로 바뀌어야 할 비극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책임이 있고 혼란이 있었다.

 

  그들의 역사를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들 주위에 어떤 수많은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개인(베로니카와 토니)이 상정하는 한 개인(에이드리언)의 역사는 한정되고 치우친 시야로 수집된 자료에 의해 조립된다. 협소한 자료를 통한 해석은 중요치 않은 원인의 몫을 왜곡하거나 부풀어내기 쉽다. 100개의 원인이 있으나 눈에 띄는 것이 5개라면, 그리고 그 중에 그토록 증오하는 ‘토니의 저주’가 포함되었다면 과녁은 그쪽을 향해 쏠리는 것이다. 또한, 토니 역시 책임분배의 첫 번째 가정으로 자신이 지명된 글귀를 받음으로써, 책임의 사슬 속에 박힌 커다란 이니셜을 읽어낸다. 토니의 죄의식은 베로니카의 의도와 불충분한 자료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사라가 남긴 편지는 오히려 토니를 위로하고 있으며, 사라가 전하고자 했던 일기장 역시 의도가 같을 거란 ‘예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에이드리언과 사라는 논리적이지 못한 운명 아래 쓸데없는 죄책감을 가지게 될 토니를 우려해 네 책임은 아주 미미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삭제된 일기에서 그는 이런 식의 가정을 펼치지 않았을까.

 

  만약 토니가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S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S를 만난 것이 토니 때문인가. 그 행위에 토니의 조언만이 크게 작용한 것인가. 아니다. 나를 시험하듯 사라와 같은 자리에 나를 내버려 둔 V가 있었고, 윤리적인 선을 넘은 내가 있었다. 책임의 정확한 배분이란 없다. 롭슨을 떠올려보자. 여자는 임신을 했고, 그는 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증언이 없기에 그 역사에 원인과 결과는 확증할 수 없다. 진실은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나는 이 일의 당사자이며, 이것만큼은 확증할 수 있다. b가 태어난 것은 토니와 아무 관련이 없다. 나의 이 말과 V가 그를 증오하는 것은 공정한 분석이라기보다 각자의 사고방식의 반영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나의 역사에 토니를 악인으로 집어넣어 그의 역사를 망가트려놓는다면 거부할 것이다.

 

  베로니카는 이 의견을 거부했을 것이다. 이 일기장으로 인해 토니가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이 끔찍해 일기장을 불태웠다. 토니는 분명 책임이 있어. 개똥같은 철학으로 네가 멋대로 면죄부를 줄 일이 아니야. 그러나 따지고 보면,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을 만나지 않았다면’의 가정이 토니의 가정보다 먼저다. 그녀는 토니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모든 비극으로부터 회피하려 한 것이 아닐까. 추측 컨데, 애초부터 토니의 편지는 에이드리언과 사라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을지 모른다. 토니가 서술한 에이드리언은 친구가 분에 못 이겨 휘갈긴 편지에 적힌 ‘어머니를 만나보도록 해’라는 조언을 곧이곧대로 따를 만큼 순종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무엇도 확실치 않다. 불충분한 자료와 부정확한 기억만이 가득한 이 책에서 모든 예감은 틀릴 수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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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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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훌쩍 넘어 키가 자라도, 발목을 훤히 드러낸 교복 바짓단에 몸을 떨고 마는 열여덟의 아이들은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에 서 있다. 합격과 불합격, 사회에 제대로 진입하느냐 낙오되느냐의 경계에 시험당하는 시기다. 화장을 하고 술을 마셔대는 성인, 스무 살의 나이가 되어서도 다르지 않다. 경계선 위의 아이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독한 불안은 우정의 그룹 안에서 해소되곤 한다. 그 속에서 균형 있게 자신의 자리를 버티고자 노력하며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팽팽한 균형을 위해 아이들은 또 다른 경계, 진실과 거짓 사이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룹의 기준에 맞게 자신을 제단 하고, 스스로 제 마음속 진실을 가두고 지키는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쓰쿠루의 무리가 내세운 첫 번째 규칙은 ‘사랑 금지’였다. 그들은 본능적인 감정 앞에 모두 거짓말을 해야 했다. 둘이 아닌 다섯의 조화를 위해, 쓰쿠루 역시 시로와 구로를 이성(異性)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구속마저 기쁠 만큼 쓰쿠루는 운명처럼 모인 다섯의 그룹을 사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내세운 두 번째 규칙은, ‘쓰쿠루 금지’였다. 시로의 거짓말은 그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진실이 되었다. 시로를 지켜야한다는 이유 저편에는 나고야에 남은 무리 속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한다는 이기심이 있었다. 냉정하고 언제나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다자키 쓰쿠루(430p)니까, 무리의 따뜻함에 안주하며 나고야에 남은 약해빠진 우리 넷보다는 잘 버텨낼 거라는 자기 합리화로 쓰쿠루는 영문도 모른 채 박탈당한다.  

 

 나고야를 오가던 쓰쿠루와 달리 예민한 시로는 완벽했던 5각이 4각으로, 4각에서 또다시 5각으로 변형되는 과정의 균열을 바로 곁에서 느꼈다. 그리고 쓰쿠루가 도쿄로 떠났을 때 느낀 공허에 자신도 몰랐던 ‘사랑’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곧 그룹의 죽음이었다.   모래성처럼 푸석거리기 시작한 그룹이 규칙을 깨버린 자신 때문에 완전히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결국 시로는 역으로 진실을 아예 뒤엎는 망상에 빠졌다. 그리고 영원한 ‘쓰쿠루 금지’를 몸소 해냈다. 어쩌면 자신의 모든 불안정을 지켜내려 했던 시로의 마지막 발악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쓰쿠루는 쿨하게 버텨낼 수 없었다. 색채 없는 이름조차 외로워하며, 떳떳한 일원으로 머물고 싶어 하던 쓰쿠루다. 그는 큰 충격 속에 사건의 진실과 자신의 마음까지 꽁꽁 가둬버렸다. 트라우마는 그를 진실에 아예 등을 돌린 파수꾼으로 만들었다. 하이다 마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나자 꿈속의 무의식까지 끌고 와 자책하는 동안 트라우마는 더욱 짙어졌다. 그 후 10년 간 진심 없는 가벼운 만남만 지속한다. 그는 칼날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수록, 이별 뒤에 쏟아져 나올 피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 미리 두려워했다.  

 

 기억은 달라져도, 역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 간 절교가 제 탓이 아니었다는 ‘진실’을 알게 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색채를 믿지 못한다. 쓰쿠루의 역사는 이미 망가져 버렸다. 그들이 감추고자 했던 진실, 그리고 거짓으로 끌어안은 무리는 결국 쓰쿠루와 시로 그리고 운명 같던 다섯의 무리마저 지키지 못했다.  

 

 경계선 위의 파수꾼은 그렇게 각자의 어른이 되었다. 나고야에 머물며 세상에 거짓 아부를 던지거나, 도자기를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며 각자의 삶에 따라 경계선을 넘어섰다. 그때, 그들이 시로를 믿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 했다면 그들의 세상은 더 좋게 변했을까. 관계 속 진실과 거짓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만큼, 결과 역시 쉬이 예측하기 어렵다. 어쩌면 세상은 손톱 아니면 발톱을 뽑아야하는 나쁜 패만 가득할지 모른다. 패를 고를 수 있는 자유, 경계선 위에서 발을 뻗는 의지 그 정도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경계선 위에서 손톱을 뽑을 것이다. 선택의 상처도 새 살도 내 눈과 가까운 곳에서 피하지 않고 돌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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