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를 많이 하면 할수록 감사할 거리가 더 많아지고 불평을많이 하면 할수록 불평할 거리도 더 많아짐을 우리는 자주 경험합니다. 가족과의 불화, 친구 사이에서의 소외감, 원만하지 못한대인관계 등등 여러 문제로 나에게 상담 요청을 해오는 이들의이야길 들으면 아주 평범한 것,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감사하는 노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나는 ‘남이 나에게 해주길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실천하다 보면삶에 탄력이 생기고 감사할 일도 그만큼 많아진다‘는 말을 자주해줍니다. 감사는 나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희망의 시작이고 행복의 시작임을 믿는 마음으로! - P299

하루에 꼭 한번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화해와 용서를 먼저 청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깨어 있게 하소서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인 듯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지혜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을
언젠가는 맞이할
저 자신의 죽음을
오늘도 함께 봉헌하며 비옵니다

-이해인, <마지막 손님이 올 때> 중에서 - P317

마음에 이유 없이 엷은 파동이 인다. 나는 감정의 사치를 잘 수습해야 할 것이다. 온갖 자질구레한 회색빛 근심들. 나는 좀체 그것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작은 채로 만족하십시오. 그러나 이해하는 데는 가장 큰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나에게 건네고 싶은말이다. - P339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훌륭한 기도인 것 같다. ‘인생은 죽음으로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조그마한 많은 무관심한태도 속에서 잃어버린다‘는 말의 뜻을 생각해본다. - P343

남에 대해서 좋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누가 오류를 범했더라도함부로 죄인으로 심판해선 안 된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끌을 보고 자기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미련함. 거짓 없이 밝고 참되고 진실한 수도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P350

‘사람은 바람과 같이 변하기를 잘한다.‘ ‘자기 마음을 잘 배치하고 정돈한 자는 남의 탄복할 행위와 망측한 소행을 살피지 않는다.‘ 사람이 무슨 일에 관심을 가지면 갖는 그만큼 분심이 된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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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업을 짓고 있는 ‘나‘라는 하나의업덩어리, 업체가 있습니다. 이건 주체가 아닙니다. 연기법으로 보면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경향성, 성향일 뿐입니다. 업이 어떤 자극에 대해서 특수한 굴절 과정을 거쳐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 성향이 있다는 겁니다. 그걸 아만으로 ‘내 마음‘이니 ‘내 생각‘이니 하고 표현하고 있는겁니다. ‘여기 분명히 보이고 만져지는 살덩어리, 하나의 정신 육체 단위체가 있으니, 이것이 나다‘라고하는 견해를 불교에서는 유신有見이라 합니다. - P24

‘내가 있다‘는 유신견에 의해 구조적 갈등관계가 끊임없이 형성됩니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세상을 ‘고해‘라 하셨습니다. 구조적이고 원천적인 갈등관계라는 뜻입니다. 고해를연출하는 것은 바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러한 유신견은 우리를 윤회에 묶는 열 가지 족쇄중 첫 번째입니다. 유신견을 벗어나는 것이 바른 견해가 이루어내는 첫번째 성과입니다. - P25

해탈이란 뭔가? 해탈이란 말은 요즘 말로하면 해방, 벗어남입니다. 불교의 목표로 보면 무지로부터 해방되고,탐·진·치貪瞋 삼독심으로부터 해방되고, 열 가지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열 가지 족쇄로부터 다 해방되면 완전한 해방이고, 족쇄 하나라도 벗어나면 그것도 하나의 해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하나 해방해 나가면 되고,
바로 그러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 목표에 대한 바른 견해라 할 수 있습니다. - P26

중생의 모습이 원래 그러합니다.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탐 · 진 · 치업 덩어리가 있는 겁니다. 중생의 삶이란 그 탐 · 진 · 치 성향이 펼쳐지는 연기과정일 뿐입니다. 나 자신을 그렇게 보는 것이 일상에서 바른 견해를 갖추어 실천하는 또 하나의 과정이 되겠습니다. - P29

바른 견해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기면, 내요구대로 안 한다고 남을 비난하는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습니다. ‘나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저 사람인들자기 마음대로 되겠나? 하물며 그 사람이 내 마음대로 되겠나?‘그러면서 남에게 요구하는 삶이 얼마나어리석은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요구하기를 멈추고 이해하는 입장이 됩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 상대방을 생각하거나 나를 돌아보는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른 견해를 통해지혜가 일어나는 시발입니다. - P30

어떤 문제든 자기 탓임을 진정으로 승복하고 받아들인다면 여러분 얼굴이 훤해지고, 말이 정말 부드러워지고, 눈이 초롱초롱 맑아집니다. 자비의 미소가 얼굴에 퍼질 겁니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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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행동은 무의식적이라 할지언정 반드시 어떤 견해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보면 본능적 행태마저도 업에서 나옵니다.
업은 의도적 행위인데, 어떤 업도 견해 없이 지어지지않습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견해 없이 나오는행동은 없습니다. 그 견해가 나에게도 이롭고 남에게도 이로운 선한 행위 또는 나에게도 해롭고 남에게도해로운 불선한 행위를 결정합니다.  - P16

부처님 가르침인 법은 윤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윤리의 기초는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견해는 법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시작합니다. 법 자체가부처님이 세상을 보시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바른 견해를 먼저 세우고, 하루하루 살면서 그날그날 할 일을정할 때에도 바른 견해에 입각해서 행동을 예정해야합니다. 하루의 삶도 그렇고 인생 전체도 그렇습니다. 견해가 올바른 것이어야 우리가 걸어야 할 팔정도 수행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P17

거듭 말하거니와 부처님이 바른 견해를 팔정도의첫머리에 두신 것은 그만큼 바른 견해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겁니다. 견해가 틀렸는데 그다음 노력이 진행된다면, 오히려 그릇된 견해로 더 중무장하게 되고, 따라서 돌이킬 수 없는 완고한 고집쟁이나 미신쟁이로 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 참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 P19

바른 견해는 선, 즉 향상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해탈· 열반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게 법인데, 열반을 향해서 나아가는 데도움 되는 요소가 선법입니다. 선법을 이해하여그것으로 바른 견해를 갖추려 노력할 때, 팔정도를 바르게 걷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P21

세상 모든 현상이 법인데, 그런 의미에서 ‘나‘라는것도 현상이고 법입니다. <법구경> 제일 게송에 ‘모든법에는 의 mano가 선행한다‘고 나옵니다. 모든 현상에는 의, 즉 마음이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결국 ‘나‘라는 것도 나 자신의이 만들어가는 겁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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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어떤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면 일단 그 변화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상황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현상의 극단적이고 첨예한 모습들만 자꾸 눈에 띄고 머릿속에각인됩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현상이나 현실에 압도당하기마련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요. - P6

하물며 우리가 하고 있는 수행 공부는 더욱 그렇습니다. 몇 십 년을 어디서 수행했다는 것이 중요하지않습니다. 수행 방향을 잘못 잡으면 오히려 안한 것보다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른 견해가 얼마나 중요한것인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바른 견해, 정견正見을 팔정도八正道의 제일 첫머리에 놓으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바른 견해가 없는 수행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과같습니다. 게다가 빠른 속도로 잘못된 길을 달려가면나중에 되돌아오기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지모릅니다. - P7

급할수록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한 걸음 척 물러앉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정말 이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부처님은 무슨 말씀을하셨는가? 부처님 말씀과 내가 생각하는 것이 합치되는가?‘ 두번 세번 돌아보고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게 점검하는 기준은 팔정도입니다. 팔정도의 여덟 항목은 수행의 길에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바른 견해가 공부 방향을 결정합니다. 속도보다방향이 중요합니다. - P8

경에서말하는 정견, 바른 견해에 대한 정의는 한 마디로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사성제四聖諦는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멸성제滅聖諦,도성제道聖諦니다. 그 첫번째인 고성제는 요컨대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일 뿐, 실제는 고苦다.‘라는겁니다.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온갖 현상이 모두 고라는 것이 사성제의 출발입니다. - P9

그다음 멸성제는 ‘바르게 노력하면 집성제에서 드러난 연기의 과정이 멈추어진다. 고가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를 멸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선언에서부터 불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도성제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에 의해서 누구든지 고를 멸하고 해탈 · 열반의 경지를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정리하면 바른 견해는 사성제를 바로 아는 것이고, 이사성제가 실로 바른 견해를 뿌리내리게 하는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 P10

사성제에서 드러난 부처님의 인간관은 무엇이며, 바른 견해로 바라본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처님의 인간관은 사람은 누구나해탈 · 열반을 향해 향상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 P12

고苦가 멸한 상태는 곧 열반입니다. 부처님은 열반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려고 그토록 애쓰셨던 것입니다. 한편 바른 견해는 첫째, 열반은 어떤 언어로도표현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둘째, 열반이 나 자신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예외 없이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을 과거부터 무한히 걸어왔고, 지금도 걷는 중이고, 앞으로도그 길을 걸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바른 견해가 우리 삶에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 P13

요컨대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고집 · 멸·도苦集사성제를 알고 이를 살아가는 데서 그 특성이 발휘되어야 합니다. 그 깨달음이 없으면 올바른 삶이 될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를 알고, 고의 멸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임을 올바로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사람의 값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바른 견해, 정견을 갖춤으로써 사람의 기본을 세우도록 부단히 노력하지않을 수 없습니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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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첫 번째는 『초전법륜경』이다. 이경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쾌락은 무상하고, 고행은 무익하므로 정견(正見) 등의 팔정도(八正道)를 기본으로 수행하며 고락중도樂中道)를 강조하셨다. 두 번째는 「무아상경』으로, 부처님께서는고통 받는 자는 주체가 없다는 것을 오온무아(五蘊無我)를 통해 설파하셨다. 다섯 비구 등 제자들은 이 두 가지 초기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 - P24

화엄의 『십지경』에서는 보살 제6지에서 인무아‘와 법무아를통달하고, 보살 제10지에서 부처님의 유훈인 전법을 완성하는 것으로 나온다. 혹자는 아라한이 되었으면 모든 해야 할 일을 마친것인데 전법이라는 실천이 왜 아라한의 필수 조건이냐고 반문할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아라한이라면 자(慈). 비(悲)·희(喜)·사(捨)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때야 비로소 대승의 아라한이라고할수 있다. 『금강경』과 『십지경』에서도 모두 이 부분을 강조하고있다. - P25

그렇다면 대승반야부에서 말하는 법무아法無我)와 법(法空)은 이러한 상식에 해당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중관학파에서 다루는 법은 무집착의 법[無爲法]을 다루기 때문이고, 그 무위법은 열반의 다른 이름이며, 아비담마에서는 무위(無의 진제(眞諦) 또는 해탈이라 칭하는 것이다. 법무아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상에 대한무집착을 말하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는 대상과 인식 주체가 적멸에 든 상태이므로 [인식된] 대상에 대한 탐(貪)·진(眞)·치(癡)의 소멸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사론』에서 말하는 법의 자성(sabhava)은 현상계[有爲法]의 자성을 뜻하고, 중관사상에서 말하는 무자성은 절대계[無爲法], 열반계의 관점에서 법의 무자성을 의미한다. 둘이 서로다른 차원과 관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 P27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고락중도의 선정과 외도들이 주장하는 선정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불교의 선정은 정견(正見)이란 지혜 위에 계의 실천을 통해 이루는 것이지만, 외도의 선정은 단순히 마음을 한곳에 응집하여 이루는 것이기때문이다.

평온한 선정 상태에서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사물을 있는그대로 보면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을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병은 괴로운 것이다. - P36

생로병사의 괴로움, 인간관계의 괴로움, 마음의 괴로움,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것인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물리학의 법칙을 떠올리게 한다. - P43

괴로움의 원인은 물리적 원인과 심리적 원인으로 분류할 수있고, 심리적 원인은 다시 물리적 원인을 일으킨다. 심리적 원인의 기본 토대는 사랑과 미움이다. 사랑해선 안 될 대상을 사랑하고 미워해선 안 될 대상을 미워하는 것, 이것이 괴로움의 심리적원인으로 작용한다. 미워해선 안 될 대상을 미워하는 이유는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한(恨), 혹은 스트레스 때문이고, 사랑해선 안될대상을 사랑하는 이유는 근원적 외로움으로 인한 욕망,
愛) 때문이다. 잠재되어 있는 사랑과 미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집착해선 안될 대상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다. - P44

마음의 대상들은 모두 여러 가지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것들은 찰나의 멈춤도 없이 항상 변해간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대상의 속성이 변하는 것이라면, 이에 반해 집착의속성은 그 대상이 항상 같은 상태를 유지하길 원한다.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집착이 있는 한 인간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제행개고(諸行皆苦)이다.

집착은 모든 행위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인간은 집착 때문에행위를 하고 집착 때문에 노력을 한다. 몸을 편하게 하고 지키려는 욕망,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 자신만의 견해와 신념을 지키려는 욕망, 타인에게 존중받으려는 욕망 등이 모두 집착때문에 생기는 행위와 노력이다. - P46

그러므로 ‘나‘라는 믿음은 가상의 실재이다. 오직 인간의 개념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은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인 색(色)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들인 식(識), 느낌들인 수(受), 이것들을 생각하는 상(想), 그리고 그것들을 잡아당기거나 밀어내는 욕망들인 행(行), 그것들에 의지해서 발생하고변화하는 물질들인 색(色), 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끊임없이 상속하고 생성해 나가는 유(有)의 과정들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정체이고 실재이고 실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무아라고 하는 것은 색 • 수상 • 행 • 식의 상속외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나라고 하는 믿음은 선풍기가 작동할 때 다섯 날개가 마치 원처럼 잘못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법무아 오온개공(諸法無我五蘊自性皆空)‘이다.

다시 말해 경험하는 오온(五蘊)이 바로 나이고, 오온 외에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온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는 않는데 경험을 하는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경험적 실재가 꼭 존재론적 실재라고 할 수 있는가이다. - P49

해탈은 해탈하는 자, 즉 진아(眞我)와 그 진아에 결박된 몸을전제로 하고, 몸을 해탈의 장애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몸을 벗어난 사후에 얻게 된다. 그에 반해 열반은 탐(貪)·진(鎭)·치() 삼독(三毒)의 숲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하며, 생전에도 얻을 수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열반은 불교적 개념이고 해탈은 힌두교적 개념이다. 그러나 해탈은 후기 불교 역사에서 열반과 같은의미로 사용되었다. - P52

그러므로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이해해야만 한다. 실제로 나와남이 하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인과를 주고받는 과정에서남에게 베푸는 행위가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오고, 남에게 나쁘게한 행위도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준다. 이런 연기적 인과의 이치 속에서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을 볼 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과 타인에게서일어나는 색 · 수상 · 행 ·식에 연민을 느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이 생겨나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관계로부터의 해탈이다.

마음의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은 욕망(의지)으로부터의 해탈, 생각(지성)으로부터의 해탈, 느낌(감성)으로부터의 해탈 등 세 가지심리적 상태로부터의 해탈을 말한다. - P55

요즘 같은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는 오욕락(五樂)을 만족시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아름다운 대상을 소유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향기로운 냄새에취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부드러운 감촉의 옷을 입고, 이 다섯가지 욕망의 결정체인 성욕을 만족시키는 삶, 이러한 삶을 위해밤낮으로 일하고 애쓰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최상의 삶으로 여긴다. 만약 이들이 도덕적이고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 오욕락을 추구한다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오히려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외롭고 병들게 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오욕락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오욕락이 나의 정신적인 행복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반하는 것이라면 오욕락은 반드시 다스려야할 불행의 씨앗이 아닐까? - P59

"먼저 오욕락이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판단해야만 한다. 이를 택법각지(擇覺)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안되는지를 알려면, 나는 어떠한 오욕락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만 하는데, 이것이 염각지(支)다. 오욕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인식과 잘못된 인생관을 가진 경우가 많다. 즉,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바로 사견(見)이다. - P60

행위가 업이 되려면 세 가지 심리적 요소가 뒤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악행을 악업이라고 정의를 내리려면 먼저 미리 계획된의도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미리 계획되고, 그 행위가 악인지를 아는 앞想]이 있고, 분노나 악의와 함께 행위하는 것이 바로 악업이다. 남에게 악한 말을 할 때, 충동적으로 남의 안 좋은 것을 말하는 것과 미리 계획하고 의도적으로 이간질하는 것, 이 두가지는 결과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두 가지 중 후자를 이라고 한다. - P65

해탈이 수행의 완성이라면, 윤회의 원인은 업이다. 수행은 신(身),구(ㅁ)의 삼업(三業)을 다스리는 것이다.

불자라면 최소한 정견과 정사를 통해 어떠한 삶이 불행한 삶이고 어떠한 삶이 행복한 삶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행한삶으로 이끄는 마음의 그릇된 프로그램을 교정해서(諸惡莫作) 행복한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衆善奉行) 나아가서 그 행복을 마음의평화로 승화해야 한다(自淨其義). 이것이 불교에서 바라본 심리적정화의 단계이다. - P66

감성적 번뇌는 잠재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다. 이들 감성의 결과가 마음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대상에 대한 탐착]과 분노가 생겨난다. 싫어하는 감정에 충실하면 기가 빠져 무기력해지고[昏沈] 좋아하는 감정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고[擧1, 혼란에 빠지게 한다[疑] 이 다섯 가지 감정의번뇌 다스리는 것을 선정행(禪定行)이라 하고, 이것이 정를정진(正精進)의 시작이다. 인간의 의식 혹은 기억 속에 있는 탐욕과 분노를 정화하는 것이 바로 정정진이다. - P69

일상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개념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사띠(sati)‘라고 한다. 사는 ‘바라봄‘ ‘깨어있음‘·‘알아차림‘ ‘마음챙김‘·‘바른 억넘‘ ‘각성‘ 등으로 다양하게W번역된다. 필자는 이후 ‘사‘로 통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사띠라는 단어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P72

그렇다면 나의 무엇을 알아차려야 하는가? 나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한다. 왜냐하면 작용 속에서만 ‘나의 존재‘가 파악되기때문이다. 몸의 대상은 느낌이고, 마음의 대상은 개념과 생각想] 욕구 작용[行] 등의 법(法)이다. 다시 말해 나를 안다는것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을 안다는 것이고, 신·수·심·법을 안다는 것은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나를 알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의 대상은 신·수·심·법 또는 오온(나)이다. - P73

나의 실체를 분명히 앎으로써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나‘는 몸과 그 대상인 느낌, 마음과 그 대상인 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항상 인연 따라 변화한다. 그 변화하는 것에 대해 고정된 집착을 가지면 고통이 생겨나고, 그것들에 자성(性)이 없음을 알면 나와 법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보면 더 이상 집착할 내가 없음을 알게 되어 유신견(見)을 버리고 수다원이 되거나 보살 초지를 성취한다. - P75

사띠는 일반적으로 ‘호흡의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한다. 호흡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호흡이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하는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서 노닐지만 호흡은 오직 현재에만 머문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해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실재이기때문에, 현재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못한다. 마음이 현재에 머무를 때 나의 실체를 경험하여 깨닫고,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번뇌는 마음을 타고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호흡과 몸에 대한 느낌은 오직 현재이기 때문에 호흡의 알아차림을 통해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막아낸다. 이렇게 해서 이미 일어난 근심이나 걱정, 앞으로 일어날 근심이나 걱정 등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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