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중 첫 번째는 『초전법륜경』이다. 이경을 통해 부처님께서는 쾌락은 무상하고, 고행은 무익하므로 정견(正見) 등의 팔정도(八正道)를 기본으로 수행하며 고락중도樂中道)를 강조하셨다. 두 번째는 「무아상경』으로, 부처님께서는고통 받는 자는 주체가 없다는 것을 오온무아(五蘊無我)를 통해 설파하셨다. 다섯 비구 등 제자들은 이 두 가지 초기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다. - P24
화엄의 『십지경』에서는 보살 제6지에서 인무아‘와 법무아를통달하고, 보살 제10지에서 부처님의 유훈인 전법을 완성하는 것으로 나온다. 혹자는 아라한이 되었으면 모든 해야 할 일을 마친것인데 전법이라는 실천이 왜 아라한의 필수 조건이냐고 반문할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아라한이라면 자(慈). 비(悲)·희(喜)·사(捨)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하며, 그때야 비로소 대승의 아라한이라고할수 있다. 『금강경』과 『십지경』에서도 모두 이 부분을 강조하고있다. - P25
그렇다면 대승반야부에서 말하는 법무아法無我)와 법(法空)은 이러한 상식에 해당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중관학파에서 다루는 법은 무집착의 법[無爲法]을 다루기 때문이고, 그 무위법은 열반의 다른 이름이며, 아비담마에서는 무위(無의 진제(眞諦) 또는 해탈이라 칭하는 것이다. 법무아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상에 대한무집착을 말하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는 대상과 인식 주체가 적멸에 든 상태이므로 [인식된] 대상에 대한 탐(貪)·진(眞)·치(癡)의 소멸을 말한다.
그러므로 『구사론』에서 말하는 법의 자성(sabhava)은 현상계[有爲法]의 자성을 뜻하고, 중관사상에서 말하는 무자성은 절대계[無爲法], 열반계의 관점에서 법의 무자성을 의미한다. 둘이 서로다른 차원과 관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 - P27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고락중도의 선정과 외도들이 주장하는 선정은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불교의 선정은 정견(正見)이란 지혜 위에 계의 실천을 통해 이루는 것이지만, 외도의 선정은 단순히 마음을 한곳에 응집하여 이루는 것이기때문이다.
평온한 선정 상태에서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사물을 있는그대로 보면 삶이 고통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을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병은 괴로운 것이다. - P36
생로병사의 괴로움, 인간관계의 괴로움, 마음의 괴로움,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인간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것인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든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물리학의 법칙을 떠올리게 한다. - P43
괴로움의 원인은 물리적 원인과 심리적 원인으로 분류할 수있고, 심리적 원인은 다시 물리적 원인을 일으킨다. 심리적 원인의 기본 토대는 사랑과 미움이다. 사랑해선 안 될 대상을 사랑하고 미워해선 안 될 대상을 미워하는 것, 이것이 괴로움의 심리적원인으로 작용한다. 미워해선 안 될 대상을 미워하는 이유는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한(恨), 혹은 스트레스 때문이고, 사랑해선 안될대상을 사랑하는 이유는 근원적 외로움으로 인한 욕망, 愛) 때문이다. 잠재되어 있는 사랑과 미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집착해선 안될 대상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다. - P44
마음의 대상들은 모두 여러 가지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것들은 찰나의 멈춤도 없이 항상 변해간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대상의 속성이 변하는 것이라면, 이에 반해 집착의속성은 그 대상이 항상 같은 상태를 유지하길 원한다.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집착이 있는 한 인간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제행개고(諸行皆苦)이다.
집착은 모든 행위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인간은 집착 때문에행위를 하고 집착 때문에 노력을 한다. 몸을 편하게 하고 지키려는 욕망,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 자신만의 견해와 신념을 지키려는 욕망, 타인에게 존중받으려는 욕망 등이 모두 집착때문에 생기는 행위와 노력이다. - P46
그러므로 ‘나‘라는 믿음은 가상의 실재이다. 오직 인간의 개념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은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인 색(色)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들인 식(識), 느낌들인 수(受), 이것들을 생각하는 상(想), 그리고 그것들을 잡아당기거나 밀어내는 욕망들인 행(行), 그것들에 의지해서 발생하고변화하는 물질들인 색(色), 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끊임없이 상속하고 생성해 나가는 유(有)의 과정들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정체이고 실재이고 실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무아라고 하는 것은 색 • 수상 • 행 • 식의 상속외에 또 다른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나라고 하는 믿음은 선풍기가 작동할 때 다섯 날개가 마치 원처럼 잘못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법무아 오온개공(諸法無我五蘊自性皆空)‘이다.
다시 말해 경험하는 오온(五蘊)이 바로 나이고, 오온 외에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온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는 않는데 경험을 하는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경험적 실재가 꼭 존재론적 실재라고 할 수 있는가이다. - P49
해탈은 해탈하는 자, 즉 진아(眞我)와 그 진아에 결박된 몸을전제로 하고, 몸을 해탈의 장애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몸을 벗어난 사후에 얻게 된다. 그에 반해 열반은 탐(貪)·진(鎭)·치() 삼독(三毒)의 숲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하며, 생전에도 얻을 수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열반은 불교적 개념이고 해탈은 힌두교적 개념이다. 그러나 해탈은 후기 불교 역사에서 열반과 같은의미로 사용되었다. - P52
그러므로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자타불이(自他不二)를 이해해야만 한다. 실제로 나와남이 하나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인과를 주고받는 과정에서남에게 베푸는 행위가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오고, 남에게 나쁘게한 행위도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준다. 이런 연기적 인과의 이치 속에서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을 볼 때,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과 타인에게서일어나는 색 · 수상 · 행 ·식에 연민을 느끼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이 생겨나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관계로부터의 해탈이다.
마음의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은 욕망(의지)으로부터의 해탈, 생각(지성)으로부터의 해탈, 느낌(감성)으로부터의 해탈 등 세 가지심리적 상태로부터의 해탈을 말한다. - P55
요즘 같은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는 오욕락(五樂)을 만족시키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아름다운 대상을 소유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향기로운 냄새에취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부드러운 감촉의 옷을 입고, 이 다섯가지 욕망의 결정체인 성욕을 만족시키는 삶, 이러한 삶을 위해밤낮으로 일하고 애쓰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최상의 삶으로 여긴다. 만약 이들이 도덕적이고 남을 해치지 않으면서 오욕락을 추구한다면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오히려 나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외롭고 병들게 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오욕락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오욕락이 나의 정신적인 행복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반하는 것이라면 오욕락은 반드시 다스려야할 불행의 씨앗이 아닐까? - P59
"먼저 오욕락이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판단해야만 한다. 이를 택법각지(擇覺)라 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안되는지를 알려면, 나는 어떠한 오욕락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만 하는데, 이것이 염각지(支)다. 오욕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인식과 잘못된 인생관을 가진 경우가 많다. 즉,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바로 사견(見)이다. - P60
행위가 업이 되려면 세 가지 심리적 요소가 뒤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악행을 악업이라고 정의를 내리려면 먼저 미리 계획된의도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미리 계획되고, 그 행위가 악인지를 아는 앞想]이 있고, 분노나 악의와 함께 행위하는 것이 바로 악업이다. 남에게 악한 말을 할 때, 충동적으로 남의 안 좋은 것을 말하는 것과 미리 계획하고 의도적으로 이간질하는 것, 이 두가지는 결과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두 가지 중 후자를 이라고 한다. - P65
해탈이 수행의 완성이라면, 윤회의 원인은 업이다. 수행은 신(身),구(ㅁ)의 삼업(三業)을 다스리는 것이다.
불자라면 최소한 정견과 정사를 통해 어떠한 삶이 불행한 삶이고 어떠한 삶이 행복한 삶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불행한삶으로 이끄는 마음의 그릇된 프로그램을 교정해서(諸惡莫作) 행복한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衆善奉行) 나아가서 그 행복을 마음의평화로 승화해야 한다(自淨其義). 이것이 불교에서 바라본 심리적정화의 단계이다. - P66
감성적 번뇌는 잠재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다. 이들 감성의 결과가 마음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대상에 대한 탐착]과 분노가 생겨난다. 싫어하는 감정에 충실하면 기가 빠져 무기력해지고[昏沈] 좋아하는 감정은 사람을 들뜨게 만들고[擧1, 혼란에 빠지게 한다[疑] 이 다섯 가지 감정의번뇌 다스리는 것을 선정행(禪定行)이라 하고, 이것이 정를정진(正精進)의 시작이다. 인간의 의식 혹은 기억 속에 있는 탐욕과 분노를 정화하는 것이 바로 정정진이다. - P69
일상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개념적 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사띠(sati)‘라고 한다. 사는 ‘바라봄‘ ‘깨어있음‘·‘알아차림‘ ‘마음챙김‘·‘바른 억넘‘ ‘각성‘ 등으로 다양하게W번역된다. 필자는 이후 ‘사‘로 통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사띠라는 단어에는 복합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P72
그렇다면 나의 무엇을 알아차려야 하는가? 나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한다. 왜냐하면 작용 속에서만 ‘나의 존재‘가 파악되기때문이다. 몸의 대상은 느낌이고, 마음의 대상은 개념과 생각想] 욕구 작용[行] 등의 법(法)이다. 다시 말해 나를 안다는것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을 안다는 것이고, 신·수·심·법을 안다는 것은 오온(五蘊)으로 구성된 나를 알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의 대상은 신·수·심·법 또는 오온(나)이다. - P73
나의 실체를 분명히 앎으로써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나‘는 몸과 그 대상인 느낌, 마음과 그 대상인 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항상 인연 따라 변화한다. 그 변화하는 것에 대해 고정된 집착을 가지면 고통이 생겨나고, 그것들에 자성(性)이 없음을 알면 나와 법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보면 더 이상 집착할 내가 없음을 알게 되어 유신견(見)을 버리고 수다원이 되거나 보살 초지를 성취한다. - P75
사띠는 일반적으로 ‘호흡의 알아차림‘으로부터 시작한다. 호흡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는 호흡이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하는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늘 과거나 미래에서 노닐지만 호흡은 오직 현재에만 머문다.
그렇다면 왜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해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개념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실재이기때문에, 현재에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나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못한다. 마음이 현재에 머무를 때 나의 실체를 경험하여 깨닫고,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모든 번뇌는 마음을 타고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호흡과 몸에 대한 느낌은 오직 현재이기 때문에 호흡의 알아차림을 통해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막아낸다. 이렇게 해서 이미 일어난 근심이나 걱정, 앞으로 일어날 근심이나 걱정 등을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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