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를 깨달으셨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 진리에 대한 설명으로서 담마Dhamma[法]를 세우셨습니다. 부처님이 담마를 설하셨고 우리는 그 담마의 도움을 받습니다. 우리가 담마의도움을 받아 나아가면 세상에서 겪는 많은 애로나 미로를 훨씬 더 쉽고 편하게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담마는 부처님이 고해를 살고 있는 우리 중생을 위하여구구절절 대자비심으로 설하신 가르침입니다. - P7

부처님은 무명無이 있어서 제있다고 하行이셨습니다. 이 말씀을 ‘무명 중생이 사는 이 세상은 상카아라이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습니다. 상카아라는 움직임이고 들뜸입니다. 세상만사가 상카아라여서 우리는 끊임없이 들뜨게 됩니다. - P9

담마는 ‘상카아라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 결국상카아라를 진정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 P10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의 세계에 이르는 길을 소소영영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담마입니다. 요컨대 부처님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에 이를 수 있도록상카아라를 가라앉히고 향상을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도록 담마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 P12

나는 오로지 ‘고苦와 고의 멸‘을 말할 뿐이다!

부처님이 하신 이 선언은 ‘이 세상 삶에는 두 길, 고를 낳는 길과 고를 멸하는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고와 고의 멸, 두 가지만 말한다‘고 하시는가? 이 가르침은 사성제四聖에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사성제는 고성제苦聖집성제集聖諦·멸성제滅聖諦·도성제道聖諦입니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고를 낳는 길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고를 멸하는 길입니다. - P13

즉 십이연기의 순관을 따르면 제행은 무명 때문에 있고, 행때문에 윤회 세계가 형성, 전개됩니다. 이것이 사성제표현으로는 집성제입니다. - P14

요컨대 ‘상카아라의 길과 담마의 길, 두 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사바의 길과 지혜의 길, 번뇌의 길과 해탈의 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 중생은 번뇌의 길을 걷습니다. 거기에는 종교, 철학, 이념 등 사바세계의 모든 상카아라가 다 포함됩니다. 머리와 마음이 더 복잡해지고, 더 굳어지고, 더 맹목적이 되면서번뇌의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즉 고苦의 길입니다. 그런데 그 고를 푸는 길이 있습니다. 고의 멸로 향하는길, 바로 담마의 길입니다. - P15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다. 그리고 제법諸法은무아無我이다.

모든 상카아라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모든 것은불변하는 실체가 없습니다. 그 무상한 상카아라가번뇌와 고를 만듭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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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발심자가 팔정도를 공부할 땐 당연히 산냐로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지혜가 갖춰져 있는 상태로 공부를 시작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도 바른 집중도 처음에는 산냐에 의존해서 수행합니다. 그런데 산냐의 특성은 바깥을 향하는것입니다. 산냐는 항상 바깥을 향하고, 바깥을 상상하고, 심지어 바깥을 피안으로 동경하기까지 합니다. 산나는 항상 바깥을 보다 보니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일종의 바깥화이고, 자기소외이지요. - P58

바른 마음챙김이란 사념처四念를 챙기는 것입니다. 사념처는 우리가 바른 마음챙김 할 때 염을 두는염처念處인데,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입니다. 이 사념처는 바른 마음챙김을붙들어 매는 말뚝입니다. - P60

흔히 팔정도를 계·정·혜 삼학에 배대시킵니다. 팔정도의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사유(正思는 혜에, 바른말], 바른 행위業] 바른 생계와 바른 노력[正精進]의 전반부는 계에, 바른 노력의 후반부와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집중은 정에 넣습니다. 그런데 사띠를 보통 정에만 넣는데,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사띠는 지혜를 유발하는 역할을 하며 지혜에 가깝습니다. 사띠를기반으로 하는 정이 아니고서는 혜를 끌어내지 못하기때문입니다. - P61

그럼 어떻게 해야 바른 마음챙김이 적극적 기능을수행하게 될까요? 부처님은 마음챙김 할 때 사념처 중에서도 신념처를 무엇보다 더 자주 더 많이, 항상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신념처를 자꾸 챙기다 보면 습관이 붙고 탄력이 생겨 항상 바른 마음챙김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념처를 챙기다 보면, 수념처-심념처-법념처도 자연스레 이어서 챙겨지게 됩니다. - P62

부처님이 ‘먼저 신념처를 챙기라!‘고 하셨는데, 이신, 까아야kaya는색, 루우빠rupa와 다릅니다. 우리가 산냐로써 인식하는 몸은 색이지 신이라고 하지않습니다. 우리가 몸을 대상으로 마음챙김할 때 안의경계로서 몸을 챙기면 그것은 신이 되고 밖의 경계로서 챙기면 색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색을 챙기는 것은 산냐 놀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은 내육처에, 색은 외육처에 배치되어 있겠지요. - P63

이렇게 안眼 이耳 비鼻·설·신身의 여섯 감각기6관內六處]에 산냐가 작용할 때는 대경이 되는 것은 색色이고, 성聲이고, 향이고, 미味이고, 촉觸이고, 법法이어서 외육처가 됩니다. 좀더 엄밀히 살피면 산냐는대개식, 윈냐아나와 어울려 활동합니다. 그런데 감각기관과 대경의 거리가 멀수록 산냐가 주역을 맡고 가까우면 나아가 주가 된다고 경에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 P64

색, 성, 향, 미, 촉, 이 다섯 가지는 오욕락欲樂의 세계입니다. 왜 오욕락을 탐하고 집착하는 일들이 벌어지느냐? 그것은 바로 안, 이, 비, 설, 신에 산냐가 주역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해탈·열반마저도산냐로 하는 한, 역시 관념적 해탈·열반밖에 안 되므로 중생 차원의 집착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냐놀음을 벗어나야만 한다는 과제가 막중하게제기되는 겁니다. - P65

산냐에 휘둘리게 되면 마음은 야생 코끼리처럼 날뜁니다. 빠빤짜, 희론에 휘둘리게 되는 겁니다. 이런 날뛰는 마음을 붙들어 매기 위해 중국에서는 화두를 들었습니다. 선종에서 ‘화두를 챙겨라.‘라고 하는데, 화두는 중국인 체질에 맞게 변용된 사념처라고 할 수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화두 공부는 마음을 챙기는 공부인 것입니다. 화두를 제대로 들기 위해서는 의심 덩어리인 의단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의심 일념이 되어 산냐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 P66

몸에 대한 마음챙김(念身)이란 내 몸이나 내 몸에서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챙겨서 아는 겁니다. 산냐로 상상하여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관하고, 몸을염하면서 몸에 대한 공부를 지어나가는 겁니다. 이처럼 마음챙김 공부가 펼쳐지는 마당이 바로 몸이 되어야 합니다. - P68

부처님이 수행 방법 중 가장기본으로 삼으신 가르침이 <염신경念身經 KayagatasatiSutta> 27입니다. <염신경>은 산냐로 마음챙김 하는 폐단을 막는 대표적인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시종일관몸을 떠나지 말고 몸을 관찰하는 데서 공부를 지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조차 관념의 대상으로 삼아서 공부를 이루려고 애를쓰지만, 그리되면산냐놀음입니다. 부처님은 추상적관념이나 가치는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걸 추구하는 쪽으로 달려가지 말라고 당부하신 겁니다. - P69

호흡관 수행에는 온갖 깊고, 크고, 넓은 의미가 다포함되어 있습니다. 호흡을 알면 알수록 거기에 따라오는 부대 이익이 굉장히 많습니다. 내 몸을 통제할 힘도 생기고, 그래서 내 느낌이나 마음도 어느 정도 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 P70

호흡관이 몸에 대해 마음챙김을 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있습니다. 호흡은 우리가 항상 하는 것이어서 언제나관할 수 있고, 또 조금만 노력하면 자연스럽게 있는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호흡관은 몸과 마음을통제하고, 몸에서 비롯되는 온갖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효과적인 공부입니다. - P71

앞서 말했듯이 같은 몸이라도 외처인 루우빠rupa,
색으로서 몸을 보는 게 아니라 내처인 까아야kaya,
신으로서 보니까, 자연히 마음의 방향을 안쪽으로돌리게 되는 것이 호흡관입니다. 호흡관은 안으로 보는 훈련이요,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 되는 겁니다. - P72

이처럼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 마침내는 바깥 경계도 ‘있는 그대로 볼 수있는 능력이 개발됩니다. 욕심이나 기대를 일으키는산냐 놀음을 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이생기면, 바깥으로 뭔가를 찾는 습관이 고쳐집니다. - P72

잘 아시다시피 이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인 바른 견해가 바로 불교에 들어서는 문입니다. 바른 견해만 제대로 얻으면 예류과豫流果가 성취됩니다. 29 바른 견해가 서면 우리 공부가 제대로 궤도에 오른 것입니다. - P74

인류 역사도 크게 보면,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적산냐[想]로부터 ‘나‘라고 하는 개체적 윈냐아나로성장해 왔습니다. 과학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검증하는 데서 보듯이 인류는 산냐에서 윈냐아나로 나아간 겁니다. 산냐에서 윈냐아나로 가긴 했는데, 앞에서 말했듯이 윈냐아나가 극단으로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 인류는 물질 중심적인 과학의 폐단에 직면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의한계에 부딪혀 버렸습니다. - P76

인류가 사람답게 살려면 이 윈냐아나의 극단성과편향성을 일단 중도中道로 바로 잡아서 빤냐 쪽으로나아가야 합니다. 답은 다 나와 있습니다. 윈냐아나가극단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오늘날 크고 작은 온갖 문제에 부딪히게 된 인류는 지혜로운 길을 찾아야겠다고 각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도가 그리운 겁니다. 온갖산냐 놀음으로 치닫는 인류가 참으로 빤냐가 아니고는 달리 살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고 있는것입니다. - P77

공부를 점검하는 기준이 법입니다. 법을 실천하는이 도道입니다. 여러분, 37조품 들어보셨지요? 부처님은 우리가 해탈열반을 할 수 있도록 돕는37조도품을 시설하셨습니다. 37조도품은 사념처四處,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 팔정도입니다. 이처럼 37조품도 팔정도로 마무리됩니다. 요컨대 팔정도를 닦아 법을 실천함으로써 빤냐를 키우고 해탈열반을 이룰 수 있는겁니다. - P78

상과 행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색-수-상-행-식에서도 상 다음에 행이 있는 겁니다. 오온의 순서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러면 식, 윈냐아나는 어떤 역할일까? 제일 끝에 있으면서 색-수-상-행을 떠받치고 연출하는 것, 오취온 차원의 세계를 연출하는 것이 식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은 명쾌합니다. 혜, 빤냐를 개발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 P82

부처님이 해탈열반의 필요성을 말씀하시고 거기에이르는 길로 제시하신 것은 오직 한길, 팔정도뿐입니다. 팔정도는 매뉴얼이 아닙니다. - P88

도라는 것은 길입니다. 길은 가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라고 바른길을 따라 제대로 가야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러지 않으면목적지에 가지 못합니다. 다시말해 결국 산냐가 만들어내는 ‘술術‘을 벗어나 빤냐가 안내해주는 ‘길[道]에들어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팔정도가 그 길, 그 도입니다. - P89

마음이 안으로 방향을 딱 잡으면, 그다음 수념처-심념처-법념처로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테크닉이 아니기 때문에 무리가 없고 억지 노력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은 양심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마음챙김 하는 것입니다. - P92

수행할 때 오로지 정직해야 할 뿐 다른 건 없습니다. 양심에 따라 정직하게 수행을 하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됩니다. 수행의 관건은정직성입니다. 그렇게 팔정도의 길을 걷게 되면 마침내산냐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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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생운동이 민족의 새 역사 창조에 기여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세계대전 이후이며, 그것이 한걸음 더 나아가 반외세 봉건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서 독립운동으로서 그리고 피식민지해방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은, 해방 후의 한국 학생운동사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상당한 차이를 갖는다. 일제하의 학생운동의이념이 민족독립이었다면, 해방 후 학생운동의 이념은 반외세 민족주의및 반독재 민주주의였다.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은 전후 냉전의 산물인분단을 해소하기 위한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운동이다. - P30

1930년대에 성행하던 학생운동의 주요 패턴은 동맹휴학이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의 신간회가 1931년 5월 5일 해체되자 학생운동은 자연히사상운동 중심으로 바뀌고, 투쟁방법에서도 동맹휴학을 버리고 비밀결사를 형성했다. - P36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제강점기 말의 학생운동은 한마디로 반제운동이었고 피압박민족해방운동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운동은 자연히 사상적 훈련과정을 포괄하였다. 일제는 조선 학생운동이 사상운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자 1936년 1월 31일, 총독부 학생 취체역 전문관을 각도 경찰부에 배치해 탄압과 체포와 투옥을 강행했다.
해방직후 학생운동은 학병으로 끌려갔다온 학생들과 비밀결사에 가담해 투옥된 학생, 사상범 사건으로 투옥된 학생들 등에 의해 식민지하반제투쟁 경험과 무장된 이론이 만발함에 따라 활기를 띠었다. 해방직후의 학생운동이나 청년운동이 더욱 격렬하게 불붙은 것은 단순히 해방직후의 혼란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말의 학생운동의 지난한 실천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역랑의 계승 발전이라는 운동사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P38

분단 이후 이 땅에 일관해온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학생운동은 1945년 8월 15일 바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의미는이 땅에 분단 이후 독재가 온존할 수 있는 ‘안보논리‘를 제공했다. 분단직후 미군정의 3년간 학생운동의 이념이 분단 이후 지금까지 반외세민족주의 및 반독재 민주주의로서 이어져온 가장 중요한 배경도 1945년 8월 15일 바로 그날의 실체에 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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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산냐나 윈냐아나를 넘어서는 높은 지혜로서, 경험을 통해서 확인되고 증명된 지혜인 아빈나라는 개념을 제시하십니다. 아냐는 한문으로 ‘승지智, 증지‘라고 번역하는데, 아빈나는 수승한 지혜인만큼 신통력을 나타내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아함경》번역에서 쓴 증지는 ‘증명된 지혜, 증명하는 지혜, 증명해내는 지혜‘라는 뜻입니다. - P39

그 다음에 안냐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상지無上
‘라고 하고, 더없이 높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을 설하신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에 보면, 다섯 비구 중에 꼰단냐Kondariña[憍陳如]라는 분이 있었지요.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니까, 꼰단냐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사라진다고 깨닫습니다. 부처님은 꼰단냐가 최상의지혜로 안 것을 알아보시고 ‘안냐아씨 단뇨Annasi Kondanno‘라고 합니다. 무상지의 차원, 아라한의 차원에서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 P40

 부처가 깨닫는 소식이 삼마아삼보디이고, 수행자가 부처님 말씀에 귀의해서 마침내 아라한이 될때 얻는 지혜가 안냐afina 입니다. 범부들이 향상하여궁극적으로 갈 수 있는 최상의 지혜가 안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목표는 안냐입니다. - P42

요는 깨달음이란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으신 경지를말합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교법에 의존하여 나아가는 목표는 아라한이고, 아라한의 지혜는 안냐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안나는 ‘최상의 지혜, 구경지‘라는 뜻으로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안냐는 낮은 차원의 지혜인 산냐로 하는 알음알이 차원을 완전히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이루는 완전한 앎이라는 뜻 입니다. - P42

이런 말들이 쓰이는 까닭은 산냐 차원을 넘어빤냐, 아빈냐, 빠린냐, 안냐에 이르기까지 지혜를 끊임없이 계속 성장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산냐, 윈냐아나, 빤냐는 다발이나 묶음을 뜻하는 온蘊 khandha으로 상온想, 식온蘊, 혜온慧蘊이라고 언급되기도 하지요. 이 셋은 그만큼 범위가 넓어 각기 특수 범주를 구성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때의빤냐는 산냐와 윈냐아나를 넘어서는 밝은 지智의 전全영역을 포괄하는 용어로 이해하고 그런 뜻에서 우리는 지금 지혜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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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인간이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구성되어 있고, 이으로오온은 집착 때문에 오취온五 되고, 오취온 때문蘊이에 인간은 고존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오온에머물지 않고 오취온이 되어버리면, 인간은 고해를사는 존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컨대 집착을 멸한아라한은 오온인데 반해 범부는 오취온인 것입니다. - P10

인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면이 무엇이겠습니까. 지혜와 자비의 두 특성이 있어 인간이 뭇 생류生類와 구분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특성이 오온 안에 갈무리되어야 오온이 비로소 인간에 대한 설명이되겠지요. 따라서 부처님이 수와 상을 별도로 세우신이유는 인간 존재를 지혜와 자비의 측면에서 파악하신 것이라 보고 싶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향상의 결과물인 만큼 이 향상을 좌우하는 열쇠이자 관건이 수와상이라고 보신 겁니다. 요는 인간이 향상하거나 퇴보하는 것은 수와 상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 P12

인간이 동물보다 발달한 부분이 뇌인 바, 우리가 항용좌뇌우뇌를 거론하지 않습니까. 그때 좌뇌는 주로 이성, 우뇌는 감성과연관된다고 하는데, 이 말은 좌뇌는 상想, 우뇌는 수와 연관된다는 뜻이 되겠지요. 인간의 향상과 퇴보를좌우하는 것이 이성과 감성의 작용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면 수와 상은 인간의 발전과 퇴보의 관건이라고 보겠습니다. 이처럼 오온이 향상 분상의 인간을 파악한 것일진대 수와 상은 오온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기능이라 하겠습니다. - P13

부처님이 ‘인간은 오온‘이라고 하신 말씀을 산냐 중심으로 이해하면, 인간은 헛것보는 존재라는 겁니다. 헛것을 보고, 헛것을 만드느라고 몸과 마음이 그토록 바쁘고 고달프고 분주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오온이라는 말에는 그런 인간 이해가 담겨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상 놀음‘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 P16

그럼 산냐란 무엇일까? 산냐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가 어려운 만큼 산냐를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금강경>에 산냐를 가리키는 말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 수자상이 있습니다. 사족이 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산냐를 한문으로번역할 때 ‘생각 상자로 쓰는데, 구마라습鳩摩羅什Kumārajiva(344~413)의 《금강경> 번역에는 ‘마음 심‘ 받침을 빼고, ‘서로 상相‘자로 썼습니다. 이건 또 왜 그랬을까요? - P18

우리가 무엇을 알 때, 사실 ‘있는 그대로 알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아기는 탁자 위의 물건이그릇인지 뭔지 모르지요. 그러다가 ‘이건 그릇이야‘라는 말을 듣고 ‘그릇‘이라는 말을 배우고 그리고 사용하게 됩니다. 이렇듯 중생은 누구나 무얼 알고 인식할때, 자기 깜냥껏 배운 대로 겪은 대로 과거의 경험을총동원해서 아는 겁니다. 이는 달리 보면 산냐는 ‘이름‘으로 아는 것입니다. 실제 내용이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게 아니라 기억된 이름을 통해 아는 겁니다. - P23

다시 다른 측면에서 산냐를 봅시다. 경에 보면 십이연기에 육처六處가 나옵니다. 육처에는 육내처가 있고육외처가 있습니다.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는 육내처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은 육외처입니다. 이 육처는 ‘상과 식이 노는 마당‘이어서 십이연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큽니다. - P25

다시 말해 육외처, 즉 어떤 세계dhatu를 바깥 경계로인식하는 것이 상, 산냐입니다. 바깥 경계란 내가 아닌, ‘나‘와 상대가 되는 어떤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 세계는 ‘나‘와 다른 것으로 ‘나‘와 합일되는 일은 없이 바깥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게 참 중요한 이야기가 될것 같습니다. 산냐는 어디까지나 바깥 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무엇을 바깥에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이를 객관적 대상체로 굳혀 놓는 작용, 이것이 산냐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저기에 그릇이라 불리는 것이하나 있다‘는 것을 알지요. 어디까지나 대상을 ‘나‘와는 다른 객체로서 아는 것, 그렇게 아는 것이 산냐입니다. - P26

마침 논서들에 산냐와 윈냐아나와 빤냐를 대비하여 설명하는 적절한 비유가 나옵니다. ‘산냐는 어린애요, 윈냐아나는 나이 든 마을 사람이요, 빤냐는 숙련된 전문가다."라고. 인간은 산냐 단계에서 윈냐아나 단계로 성숙해 나아갑니다. 윈냐아나는 개개인이대상을 인식하는 것, 즉 개체적인 인식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공통으로 아는 것은 산냐이고, ‘내‘가 개별적으로 아는 것은 윈냐아나이지요. - P27

여러분, 산냐의 한자어 ‘상자가 들어간 단어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감상感想, 추상追想, 추상推想환상幻想, 회상回想, 공상想, 망상妄想, 몽상夢想, 상상 등 거의 모두가 다 자기 취향대로 헛것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종교‘라든가 ‘과학‘이라든가 무엇이든 어떤 명칭을 붙이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우리는 상, 산냐에 의해 또 헛것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 P29

요는 헛것이 있어서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을 통해 자기가 헛것을 만들어서 보는 겁니다. 부처님은 인간이 무명에 덮여 헛것이나 만드는 그런 멍텅구리 짓을한다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하신 겁니다. 그리고는 인간의 가장 심각한 병통인 산냐라는 극단 취향의 놀음을벗어나도록 중도, 즉 팔정도 시설하셨습니다. - P29

우리는 색수상행식 오온가합五蘊假合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그중에 상이 오온 한가운데있어서 오온이 각각 작용할 때 상이 그것들과 일일이결합되어 함께 기능합니다. 가령 수, 행, 식은 거의 언제나 수와 상, 행과 상, 식과 상으로 짝이되어 함께 작동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는 말입니다. 오온이 그렇게상 중심으로 시설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놀음을좀체 그칠 수가 없습니다. 정신 똑똑히 차리지 않으면상 놀음, 그 짓을 자꾸 되풀이하게끔 되어있습니다. - P31

어떤 주제가 잡혀야 하지요. 그게 ‘위따까‘이고, 그걸 붙잡고 계속 조사 숙고하는 것, 즉 생각을 늘리고 진행하는 게 ‘위짜아라‘인 셈입니다. 그래서 위따까 위짜아라는 ‘생각 과정‘ 입니다. - P33

결국 한 생 내내 잠시도 쉬지 않고 꿈속에서까지도구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구행의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람 허울을 쓰고 살면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인가요? 신身·구미·심心으로 끝없는 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현상을 빠빤짜라고 부른다는 말입니다." - P34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속에서 구행을 하다가 마는가 하면, 그걸 입 밖으로 내서 구업을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행行과 업은 다릅니다. 입밖에 내어서의도적으로 말을 할 때는 구업이 됩니다. 한번 뱉은 말은 나와 남에게 전달돼 버려서 회수불능이니까 구업의 영향력은 결정적입니다. 그러나 구업이든 구행이든산냐 놀음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신·구·심心 삼행三行이나 신·구□·의 삼업三業이나 그 모두가 다름 아닌 산냐 놀음이요, 빠빤짜인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다가 갑니다. - P35

그런데 산냐 놀음에서 헤어나려 할 때 우리는 십중팔구 한계에 부딪히게 됩니다.그 이유는 산냐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일부 대승 경전에서 보듯이 산냐를 넘어 그 이상의 지혜에 대해서는 더 깊이 구체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반야(智慧)‘라는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려 일반화해 버립니다. 따라서 산냐를 극복하는 일도 지혜를 증장시키는 일도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길은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에서 정이 나오고 정에서 혜慧가 나온다‘고가닥을 분명히 잡아주신 겁니다. 여기서 정이란 팔정도의 마지막 항목인 바른 집중, 정정을 말합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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