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께서는 위빳사나를 설하실 때 21개의 관찰 모두는 똑같이 아라한과를얻을 수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붓다의 설명은 간단하다. 정말로 간단해서 이 설명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붓다께서 가르치신 내용의 전체상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간단한 가르침에 대하여 오해하기가아주 쉽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서문에서부터 사마타와 위빳사나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여러 경을 인용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같은 여러 경에 따르면 붓다께서는 괴로움을 완전히 종식(sammādukkhass-antam) 시키려면 수행자가 직접 체험한 지혜를 통해 사성제 모두를 꿰뚫어야 한다는 것이다. - P72
마찬가지로 앞에서 인용한 경들에 따르면 붓다께서 설하시는 괴로움의소멸(dukkha-khaya)은 통찰지로 오온을 알고, 철저하게 알아서 포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안과 밖의 감각토대들을 통찰해서 알고 철저하게 알아 포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모두를 통찰하고 철저하게 알고 제거하지 않는 한 괴로움의 파괴는 불가능하다는것이다. 번뇌를 소멸(asavanamkhayam) 하려면 오온과 그것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모두를 알고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좀 더 확대해석을 하면사념처 모두를 관찰할 때만이 불사는 실현된다(amatam sacchikatamhoti)는 의미이다. - P73
수행자가 물질을(rupe abhinivisati), 근본물질(bhuta-rupaica)과 파생물질(upāda-rupanca)을 관찰하고는 무상 등으로 주관한다. 그런데 오로지 물질만을식별하는 것으로는 도가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도 역시 보아야만 한다(arupampidatthabbam-eva). 그러므로 이것이 대상인 물질을 만드는 일어난 정신(idamuppannam artupanti), 느낌(vedanam), 인식(saññam), 상카라들(sarikhare) 그리고 알음알이들 (vinnananca)이라고 정의하고는 그것들을 무상 등으로 본다. 물질을 식별할 때 정신도 식별한다. 반복하면 둘 가운데 하나를 식별하는 동안 도가일어난다. 이와 같이 식별을 하면 일어난 현상들이 무엇이든 모든 것은 소멸하는현상에 불과하다(yamkiñ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Chamman‘ti), 마찬가지로 오온으로부터 나올 때에는(벗어날 때, emerge from)한번에 나온다 (ekappa-harena paicahi khandhehi vutthati). 청정도론에는 무상으로써만 상카라들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苦)과 무아로도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비록 도(道)는 이것들 가운데 하나를 수관할 때 일어날지라도말이다. - P75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해야 하고 이 마음 때문에 마음에서 만들어진물질의 일어남을 보아야 한다. 이것에 대한 내용이 있는 몸에 대한 관찰(kayanupassanā)에 해당하는 사위의(四威儀, iriyapathā)의 장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붓다께서는 오로지 위빳사나만을 설하고 계신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1] 걸어가면서 ‘걷고 있다.‘고 꿰뚫어 알고(gacchanto và ‘gacchāmiti pajānāti)[2] 서있으면서 서 있다. 고 꿰뚫어 알며(thito và ‘thitomhiti pajānāti) [3] 앉아 있으면서 ‘앉아 있다.‘고 꿰뚫어 알고(nisinno vã ‘nisinnomhi‘ti pajānāti) [4] 누워있으면서 ‘누워있다.‘고 꿰뚫어 안다. (sayāno vā ‘sayānomhīti pajānāti) [5]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 - P76
비구가 자신의 자세를 통해 몸을 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걷고 있을때 우리는 걷는다는 것을 안다. 심지어 동물들도 걷고 있다는 것을 알것이다. 그렇다면 다리를 들어 올려 앞으로, 그리고 내려놓는 것 등을아는 것이 통찰지(vipassana-fñana) 인가? 몸에서 현상들의 일어남과 현상들의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인가? 어떤 이가 오로지 자신의 발의 움직임만을 알고 자신의 몸의 움직임만을 안다고 하자. 이런 경우라면 통찰지는 없다. 개념만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현상(법)들의 일어남과 현상들의 사라짐을 통찰지를 가지고 몸의 각 자세에서 관찰하려면 궁극적 실재를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사대요소 명상을 해야 한다. 오로지 그때에야 수행자는 궁극적 실재들이 한 장소에서 일어나서는 그 장소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P77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그것들의 일어남 그리고 그것들은 왜 일어나는지, 그것들의 사라짐 그리고 그것들은 왜 사라지는지 알아야만 한다. 오로지 그때가 되어서야 수행자는 자세(사위의)를 철저하게 알 수 있고, 그때에만 사위의에 대한 위빳사나를 닦을 수 있다. 앞으로, 뒤로, 앞을봄, 돌아 봄 등과 같은 다양한 몸의 동작을 식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위빳사나에서 말하는 식별(sampajañña)이라는 의미이다. - P78
통찰지를 얻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관찰하려면 정신과 물질, 모든 사념처를 관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경우라도 괴로움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인 오취온(五蘊)을 꿰뚫지 못할 것이다. - P79
다음은 미래에 그러한 오염(번뇌)들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아라한이되는 것), 미래에 남김없이 오온이 소멸하는 현상반열반을 식별해야하는데 이렇게 하려면 미래의 물질만이 아니라 미래의 알음알이 느낌그리고 법들도 관찰해야 한다. - P80
그렇다면 느낌에 대하여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여러 종류의 느낌, 그것들의 일어남과 소멸을 꿰뚫어 아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소멸로 이르게 하는 수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느낌은 어 - P81
경에서 붓다께서는 여섯 종류의 느낌은 여섯 가지 감각접촉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셨다. 다른 경에서는 여섯 가지 감각접촉은 안의 여섯 토대(눈, 귀, 코 등), 이에 상응하는 밖의 여섯 토대(형상, 소리, 냄새 등) 그리고이들에 상응하는 여섯 알음알이 (안식, 이식, 비식 등)의 만남(화합) 때문에 감각접촉이 일어난다고 하셨다. - P84
마찬가지로 느낌과 함께 일어나는 알음알이도 관찰해야 한다. 눈, 귀, 코, 혀, 몸 그리고 마노의 알음알이를 관찰하는 것은 마음(알음알이)에 대한 관찰이다. 안의 토대와 밖의 토대 그리고 해당되는 알음알이가만나는 것을 보아야만 감각섭촉의 일어남을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감각접촉의 일어남 때문에 느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설명한 것처럼 감각접촉과 느낌만을 관찰할 수 없다. 여섯 가지 알음알이와함께 일어나는 나머지 마음부수들도 관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섯 무더기들 모두를 관찰하지 못할 것이다. - P85
대념처경의 모든 장에서 설하시는 붓다의 아주 간략한 위빳사나에 대한말씀은 모든 오온, 모든 사념처를 관찰하여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무아라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몸에서 몸을, 느낌에서 느낌을, 마음에서 마음을 그리고 법에서 법을 알고 보려면 각각의현상(법)들을 정의하고 식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삼매가 필요하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대념처경 네 가지 몸의 관찰의 장과 법에 대한 관찰의 첫 번째 장에서 사마타를 가르치신다. 비록 사념처에 대한 붓다의 설명이 문헌에 따라 다를지라도 그 의미는 궁극적으로 동일하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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