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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작가, 장르, 국적, 출판사, 판형 등을 따져야하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서재 결혼시키기' 작업에 부합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 책을 에드거 앨런 포의 『우울과 몽상』, 『아서 고든 핌의 모험』과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와 이웃해 꽂아주고 싶다. 그리고 『육식 이야기』를 필두로 베르나르 키리니의 또 다른 소설, 소설집을 위한 공간을 기꺼이 비워두려고 한다. 여기저기서 올해의 책을 꼽는 연말다운 투표가 진행되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단편소설집 정도에 주저 없이 한 표를 행사하고프다.
실험적이고 기괴한, 열정적이면서 광기에 찬, 환상과 우수 어린 단편들을 써왔던 거장들의 풍모가 곳곳에서 묻어나는 것은 베르나르 키리니가 대가들의 후계여서가 아니라, 비밀의 도서관을 마음껏 섭렵한 후 자기만의 방을 그 한켠에 당당히 마련한 존재감을 감출 길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는 이야기를 가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허구의 허구를 가공해내 패러디의 재료에 자신마저 섞어버리곤 하는데,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등장하는 '데레크 하트필드'라는 가공의 작가만큼이나 '피에르 굴드'라는 인물을 소설집의 주요 인물로 여러 번 등장시켜 톡톡한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육식 이야기』에 등장하는 기기묘묘한 환상들은 고딕 소설에서 자주 쓰이는 테마이기도 하지만, 어찌나 매끈하고 세련된 괴변들과 동반하고 있는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홀랑 '그 쪽'으로 넘어가버리는 일이 발생할 것만 같다. 데레크 하트필드가 '불모의 작가'였다면 피에르 굴드는 '공허와 권태'의 반동을 몸소 증명하는 설명하는 것이 극히 까다로운 인물이다. 그는 '기름 유출 사고 전문가 협회'의 간부이며 기름 유출 사건현장을 찾아 거대한 기름띠를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기름 바다'), z를 제외한 알파벳의 사용을 금지한 「잠자는 사내」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데, 이 책은 "Zzzz, zzzz, zzzz……"로 삼백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라나?('기상천외한 피에르 굴드').
철학, 심리학, 언어학, 예술론 등이 거대한 농담을 위한 파티에 초대받은 격이랄까,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유쾌함이 저변에 깔려있는 것을 느낀다. 오렌지 껍질을 갑옷처럼 피부로 삼은 여자와의 잊을 수 없는 하룻밤('밀감')으로 시작해, 독초들의 연구에 매진하다 파리지옥에게 애증을 느끼다 결국 잡아먹히는 이야기('육식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 소설집을 무엇으로 공통 지을지 난감해하다, 결국은 또 피에르 굴드의 '미친 존재감'을 떠올린다. 하루키의 초기작들이 온통 커트 보네커트, 트루먼 카포티, 레이먼드 챈들러, 레이먼드 카버 식 캐릭터와 스토리텔링으로 버무려져 있으면서도 자기존재를 건재할 수 있었듯, 처음 만나게 된 베르나르 키리니의 소설집은 그만의 작품세계를 더욱 엿보고 싶게 만드는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곱씹을수록 무릎을 치고, 종국에는 배를 움켜잡게 될게 분명한 기상천외한 베르나르 키리니의 이야기들은 긴긴 겨울밤에 선명한 색채를 부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피에르 굴드의 끝도 없는 허장성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펼쳐지고 있을 것만 같다. 포와 보르헤스, 에메, 로맹 가리 등의 대가들과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 같은 초면의 작가가 아로새긴 인상을 더없이 유쾌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