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노동자의 주체성을 농락한다. 자신을대신해 내세울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 언제나 가혹하다. 그런데 그것은 명백한 위법이나 합법도 아닌, 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법의 틈새를 이용한 ‘편법‘이다. 인턴이라는 정체불명의 직함을 부여하고서는 무임금으로 사람을부리고, 언제든지 해고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조차 보장하지않아도, 기업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에 더해 국가 정부는 기업을 위한법안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 현장의 주체가아닌 대리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매장의 학교의 주인처럼 일하라‘는 수사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이것은 정말이지 파렴치한 역설이다. 노동자의 주체성을 강탈하는 동시에 그 빈자리에 ‘주체‘라는 환상을 덧 입히는 것이다. 그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가 된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열정 착취‘보다도 한 단계 진화한 방식이다. 노력뿐 아니라 행복과 만족까지도 강요하는 것이기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영혼 착취‘라고 규정하고 싶다.
갑과 마주하려는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들이다. 그들은 한 걸음 물러서거나 밀려난 을에게 "너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이면서도,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로 굳게 믿는다. 자신들이 괴물이 되었음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노는주변의 을이 아닌 저 너머의 갑을 향해야 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닿아야 한다. 모두가 돌아서서 갑과 마주하고, 대리사회의 괴물과 싸워나가야 한다.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내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분노는 주변의 을이 아닌 저 너머의 갑을 향해야 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닿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을은 계속해서 동원되고 희생될 것이다.
우리는 갑의 자리에서 별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던지곤 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헛기침이나하품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말조심‘은 을이 아니라 오히려 갑이 더 해야 하는 것이었다. 글을 쓸 때 쉽표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을 할 때도 그렇게 조심을 해야겠다. 의미 없는 단어로, 몸짓으로, 타인을 불편하게 하지 말아야겠다.
현실이 가혹하고 절박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진 일상의 판타지가 강요된다. 처음에는 그것이 공감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이제는 저마다에게 외로움을 주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분노를 토로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아마도 곧 노래와 음식을 넘어 또 다른 대리만족을 주는 무언가가 새롭게 등장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 다시 열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리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개인들은 다시다양한 방식으로 분노할 것이다. 다만 그 분노가 개인을 향한 혐오가되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어서는 더욱 안 된다. 익숙한 공간에까지 이미 침투한 대리사회의 괴물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어야 한다.그렇게 강요된 환각에서 깨어나 온전한 나로서/우리로서 ‘즐겁게‘ 싸워나가야 한다.그러면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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