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제 나름대로 폭력에 관한 주제의 책들로 리스트를 만들어 보려 한 적이 있습니다. '학살'은 중요한 카테고리 중 하나였지요.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만 몇권은 읽었습니다(여기엔 국내에 출간된 관련 서적들이 너무 빈약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론서적보다는 주로 생존자의 체험기 위주로 읽어보려 했습니다.  현대사의 모든 문제가 그렇겠지만 특히 학살을 논할 때는 생존자나 목격자의 체험과 기억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제일 중요한 학살은 홀로코스트겠지요. 서경식 교수의 글과 책으로 많이 소개된 프리모 레비의 책들은 거의 읽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이것이 인간인가>를 첫손에 꼽을 수 있겠죠.  

 이 책을 덮고 10분동안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이 압권이더군요. 아우슈비츠가 '호황'을 누릴 때 보다는 나치가 내팽개쳐놓고 떠난 수용소 건물에서 남은 환자들이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정말 눈물겨웠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수용소 관리 매커니즘입니다. 미셸 푸코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인데요, 수용소에서 나치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감시자'로, 권력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들은 형별을 가하거나 처형할 때만 나타납니다. 수용소를 일상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자들은 유대인 부역자들이었어요.  

레비는 냉전이 마지막 맹위를 떨치고 있던 1987년 자살합니다. 이 돌연한 자살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나왔죠. 학살을 경험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악몽을 되새김질 하게 됩니다. 레비는 결국 역사에 희망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아닐까요?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로고 테라피 이론을 아아슈비츠 학살에 역으로 적용해 봅니다. 빅터 프랭클도 생존자였지요.

누가 가장 오래 살아남는가? 이 문제를 프랭클은 꼼꼼히 따지고 드는데요, 결국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고 간직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게 요지입니다.  

한가지 궁금증이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와 빅터 프랭클은 만난 적이 없을까요? 둘다 아우슈비츠에 있었지만, 그곳이야 워낙 방대하고 고립된 수용소들로 이루어져서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뒤에라도 만나지 않았을까, 왜 기록이 없을까 궁금합니다. 물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는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긴 하지만, 같은 유럽의 울타리인데요... 

엘리 위젤의 기념비적인 저작 <나이트>는 특히 '교수대에 매달린 하나님'이란 장이 압권입니다. 교수대에 매달려 죽지 못하고 꺽꺽대는 소년 앞에서, 위젤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지요(참고로, 교수대에선 목뼈가 단번에 부러지지 않으면 쉽게 죽지 못합니다. 몸무게가 가벼운 소년이 불리합니다). 그 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서는 숱하게 나와 있지요.  

그 다음은 보스니아 내전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보스니아에서 '유럽의 종말'을 볼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지요. 홀로코스트를 통해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한 유럽은 보스니아 내전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유고 내전에 관한 책들은 출간이 상당히 지지부진해요. 홀로코스트야 워낙 유명하고, 유대인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20세기 후반에 가장 중요한 사건인 보스니아 학살은 그렇지 못합니다.  

보스니아 학살에선 오히려 조 사코의 만화가 읽어볼 만 합니다. 비쉐그라드라는 작은 도시에선 밤마다 세르비아 민병대의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세르비아계 지역 주민들이 민병대에 섞여 있었죠. 그 지역의 작은 다리에서(그곳이 '드리나 강의 다리'와 연관이 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민병대는 밤마다 보스니아계 무슬림을 죽여 다리 아래 버렸습니다.  

그들은 총을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칼로 목을 따서 버리는 걸 훨씬 즐겼지요. 복수의 쾌감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싶어했으니까요. 왜 그랬을까요. 티토 시절까지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계는 잘 지냈습니다. 그들은 서로 치즈를 나눠먹고 축구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민족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섞여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정육점을 하는 마르코가, 잡화점을 하는 이반이, 자기 집에서 놀던 이웃 아이나 아주머니나 친구의 목을 따서 강 아래로 버린 겁니다. 왜 그랬을 까요? 저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추천사를 쓴 이 만화 뒷장엔 흥미로운 관련 서적들이 소개되는 데요, 한권도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원서로 읽어야 하는데, 당최 엄두가 나질 않네요.   

유고 내전에 대해선 영화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그르바비차> <웰컴 투 사라예보> <헌팅 파티> <율리시즈의 시선> 등입니다.  소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도 약간 지루하지만읽어볼 만 해요.  

이 소설은 봉쇄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소설가가 생존자들을 꼼꼼히 취재했다고 하는 군요. 첼리스트나 여자 저격수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물을 나르기 위해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한 사내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습니다. 수도가 나오지 않아서 사내는 양조장까지 물통을 들고 갑니다. 그런데 언덕 밖에 세르비아 민병대의 저격수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물을 길러 가는 건 죽음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총알이 언제 어디서 자신에게 날아올 지 모르니까요. 길을 건너는 건 공포 그 자체 입니다. 건널목은 엄폐물이 없는 대로에 있으니까요. 수시로 목표물을 알 수 없는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 상상이 가질 않을 겁니다.  

이 외에도 매체에만 소개된 밀렌코 예르코비치의 자전적 소설 <사라예보의 말보로>를 읽고 싶은데, 당최 출간이 되질 않습니다.  

르완다 내전은 홀로코스트를 제외하면 20세기 가장 참혹한 학살로 기억됩니다. 숫자도 숫자지만 무차별적으로 이웃을 죽이는 며칠 동안의 핏빛 살육이 끔찍하지요.  

임마꿀레의 체험기 <내 이름은 임마꿀레>에서 우리는 르완다 학살의 진수를 볼 수 있지요. 르완다 학살은 너무 '완벽해서' 생존자가 많지 않아요.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투치족 친구를 집에 숨겨주면서 낮에는 다른 투치족들을 '사냥'하는 한 후투족의 이야기 입니다. 친구에게는 "곧 진정될테니 숨어 있어라"고 안심시키면서 낮에는 다른 후투족과 어울려 칼로 투치족의 목을 수없이 베었죠. 이 친구의 의식은 분리돼 있는 겁니다. '친구'는 인간으로 보았지만, 친구가 아닌 다른 투치족은 '바퀴벌레'로 본 거지요. 인간의 의식은 이렇게 조종될 수도 있습니다.  

또 한가지, 르완다는 자식을 낳으면 성을 물려주지 않는다는 군요. 아버지나 어머니의 성도 다 다릅니다. 좋은 의미의 단어들을 골라 성을 지어준답니다. 멋진 관습이지요? 

르완다와 관련해서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호텔 르완다>가 대표적이겠군요.  르완다 학살과 관련해서는 '식민지 의식'이 중요합니다. 오랫동안 식민지배를 받은 민족의 의식이 어떻게 일그러져 가는 지를 르완다는 제대로 보여주죠.  

식민지 의식과 관련해서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책에 대해선 "폭력이 우리를 정화하리라"식의 폭력 해방운동만 부각돼 있는데요, 파농이 정신과 의사였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파농은 알제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복무하면서 식민지인들의 병든 마음을 숱하게 목격합니다. 식민지의 억압받는 의식은 정당한 폭력으로 치료될 수 있다고 파농은 본 겁니다. 책 뒤에 붙은 환자들의 증례들을 파농은 "불필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실은 이책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폭력해방투쟁의 의미는 퇴색해지만 식민지 의식은 남아 있는 현재에서 그렇지요.   

일제시대 일본군의 학살과 관련해선 노다 마사아키 <전쟁과 인간>을 꼭 읽어봐야 합니다. 이 책은 정말 탁월한 명저이지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가해자인 일본군의 의식입니다. 이들은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해요. 나치 군인이나 세르비아 군인도 가해자로서 다양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렇지 않아요. 왜 일까요? 어릴 때부터 군국주의 의식으로 완벽하게 사육당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일본 군인들은 이제 다른 의식을 갖게 됩니다(중국이 일본군 잔당에게 행한 엄청나게 치밀한 '세뇌전략'은 그 자체로 연구대상입니다). 그들은 일본에 돌아온 뒤 친구들의 태도를 보고 놀랍니다. 친구들은 과거를 아예 잊어버립니다. 가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기억하지 못해요. 어떤 학살이 있었는지 자신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정말로 끔찍한 의식 상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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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11-26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보면 독일의 과거사 청산작업을 그다지 높게 보지 않더군요.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원인 중의 하나도 그런 독일을 보고 절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톨트 2009-11-2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레비의 자살에 관해서는 다른 많은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로버트 제이 리프턴은 레비의 자살이 미래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미래를 창출할 유일한 길이 자살하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실제로 레비는 <익사한자와 구조된 자>에서 지구상의 인간들을 모두 쓸어버릴 만한 핵폭탄이 비축돼 있는데 우리는 역사의 반복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한탄합니다. 레비는 현대 기술문명이 아우슈비츠의 반복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버트 허시가 쓴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에 레비의 죽음에 대한 간략한 분석이 있습니다. 냉전기 유럽사회에서 핵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심각한 외상을 남겼는지는 한번 페이퍼로 남겨볼 가치가 있겠네요.

쿠자누스 2011-07-05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로코스트, 유고 내전에 관해 위에 소개된 책은 숭자의 프로파간다를 대변하는 책입니다.

톨트 2011-07-19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객관적인' 책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떤 역사적 사실을, 어떤 참담하고 말하기 민감한 사실을, 이처럼 조심스런 방식으로, 이처럼 효과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요?  인물들의 머리통을 꿰뚫어 본 듯이 그려내는 소설은, 최소한 사실을 다룰 때는 불구의 것이라고 귄터 그라스는 말합니다. 귄터 그라스는 게걸음으로 사건의 주변을 천천히 걸어가며 사건의 전모를 밝힙니다. 중요한 것은, 귄터 그라스는 3인칭이나 타인의 시점 뒤에 숨어서 재판관처럼 역사를 판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귄터 그라스는 1인칭을 등장시킵니다. 1인칭으로 후대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귄터 그라스는 과거의 사실에 접근해갑니다. '나에게 그 역사는 무엇이었는가'를 1인칭의 입으로 말하게 합니다. 

 이와 비교되는 것이 미국의 뉴리얼리즘, 특히 그 시조처럼 여겨지는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입니다. 카포티는 철저히 3인칭 뒤에 숨어서 모든 사건을 객관적으로 종합하고 판단합니다. 그것은 정교하긴 하지만, 최소한 팩트를 다루는 바닥에선, 약간 위선적이지요. (이건 또 좀 과도한 매도이긴 하지만, 최소한 제게는) 뉴리얼리즘은 정교하게 짜여진 위선입니다. 노먼 메일러는 심지어 작가 자신을 3인칭으로 등장시킵니다. 객관적으로 보이고 싶은 강박이지요.   

<게걸음으로 가다>가 절판돼서 정말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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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있습니다. 여자는 남편과 함께 은행에서 일합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긴 8월의 오후, 여자는 신세계 백화점 앞의 육교 계단을 느릿느릿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삼십대의 비대한 남자가 여자의 팔꿈치 근처를 움켜쥐었습니다. "조용히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손목을 힘주어 잡았습니다. 여자는 손목을 빼내기를 단념하고 남자를 따라갑니다. 남자는 회현동 골목 속의 여관으로 들어갑니다. "자, 그만 울어. 경찰에 가서 강간당했다고 고발해도 돼. 당신의 팔뚝이 몹시 미끄러워 보이더군. 내 손 속에 넣고 만지고 싶었어." 남자는 말합니다.  

그날 이후 여자는 명동의 밤거리를 막차시간이 끊기기 전까지 돌아다닙니다. 남자들은 댁이 어디십니까, 라든가 어디 가서 커피라도, 라며 여자를 유혹합니다. 여자는 그럴 때면 고개를 숙이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망설이다가 어떤 두려움을 느끼며 돌아섭니다. 여자가 원하는 것은 남자의 억센 손아귀 입니다. 이유를 묻지 않고,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여자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결단입니다. '다른 곳'은 더 나은 곳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곳'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두려워 합니다. 여자는 비겁한 남자들을 뒤로 하고 막차를 탑니다.

남편은 여자와 같은 은행의 사무직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는 직장을 그만 두거나 옮겨야 합니다. 직장에서 여자는 부부 관계를 숨겼습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박 선생님' '미스 리'라고 불렀습니다. 여자는 이제 그 모든 짓이 역겨운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탈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밤거리에서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들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들은 아침이 되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여자가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속임수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여자는 자기의 손목을 억세게 움켜쥘 남자를 찾아 오늘도 밤거리를 걷습니다. 누군가 말을 겁니다. "집이 어디세요? 커피라도 한잔.." 

김승옥이 1969년 발표한 단편 <야행>의 줄거리입니다. 여자는 왜 이런 뒤틀린 욕망을 갖게 되었을까요? 저는 양우당에서 1980년에 나온 '오늘의 한국문학 33인선' 전집을 가보처럼 모셔놓고 있습니다(헌책방에서 사 모았는데 33권 중 두 권이 빠져 있습니다). 이 전집의 부록이 재미있는데요, 작가들이 직접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는 글을 묶었습니다. 김승옥은 편집자와의 인터뷰로 글을 대체했습니다.  

김승옥은 인터뷰에서 1960년대를 '피난민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50년대가 아니라 60년대인 이유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유교적인 질서가 완전히 파괴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김승옥이 본 피난민들은 생존을 위해 윤리나 가치를 도외시해 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60년대의 젊은이들은, 사람들이 신뢰감을 가지고 성장해 오다가 어느순간 서로를 불신하게 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의 청년작가들에게 고향의 상실은 심각한 상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고향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라고 여겼습니다. 김승옥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마치 작은 배를 타고 방향도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바다에 나가서 어디로 갈 지도 모르는데 결국은 내가 젓는 방향을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막연하게 까마득하게 보이기도 하고, 허술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야행>의 여자는 이 피난민의 시대에서 탈출을 꿈꿉니다. 그런데 여자는 어쩌다가 "무모하고 비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인" 욕구를 갖게 된 걸까요? 그런 욕구가 있더라도 대부분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데, 어쩌다 밤거리를 돌아다니게 된 걸까요? 앞서 얘기한 줄거리에서 한가지 빠뜨린 것이 있습니다. 여자는 그해 8월 여름휴가를 계획과 다른 엉뚱한 곳에서 보냅니다. 이런 저런 계획들으 하나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결국은 '의무감에서' 고향의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김승옥은 여자의 휴가를 아주 짧고 퉁명스럽게 표현합니다.  

"모녀는, 첫날은 오랜만의 상봉에 기쁨으로 들떠서 지냈다. 다음날엔, 어머니 특유의 나무랄 수 없는 잔소리가 시작됐으며, 그 다음날엔 딸 특유의 신경질이 되살아났고, 마지막으로 모녀는 한바탕 크게 싸웠다. 다음날 새벽, 딸이 버스 정류소로 가기 전에 모녀는 어느새 슬그머니 화해를 하고 있었으며... 그뿐이었다. 그 여자의 휴가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곤."  

여자는 고향에 돌아가고 나서야 자신이 고향을 상실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고향은 이제 영원히 자신의 고향이 아니며, 의례적인 만남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자는 고향으로부터 뚝 떨어져나와서 남편의 세계에, 팽창하는 남자들의 세계에, 베트남전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젊은이들을 내보내는 아버지들의 세계에, 그들의 무모하고 희극적인 연극에, 갇혀 있습니다. 여자는 어머니를, 고향을, 모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여자의 뒤틀린 욕구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자는 남자의 억센 손아귀를 찾아 밤거리를 걷습니다. 최근들어 여자의 욕구는 비틀거립니다. 여자는 이제 해방이 아니더라도, 구원이 아니더라도 사내의 손에 이끌려 갈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마치 창년들처럼, 기도해야 할 것이 별로 없음에도 미사에 참석하는 신도들처럼, 그렇게... 여자는 그런 자신이 두렵습니다. 여자는 언젠가는 아무 남자의 손이나 잡고 여관에 들어갔다가 다음날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구원이 아니면 타락이라도... 그것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라도... 여자는 밤거리를 계속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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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11-2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소설 중에서 대체로 '무진기행'이나 '서울 1964년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야행'도 부위기가 독특해서 좋더라구요.거기 나오는 여자 헌팅하던 남자들은 지금은 70세가 넘은 노인이 되어 있겠지요?

톨트 2009-11-21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렇네요. 할머니들한테 구박받고 있겠죠.
 

 

비가 추적추적 내리네요. 회사에서 커피를 한 잔 하고 잔비를 맞으며 담배를 피우고(우리 회사에선 옥상에서만 흡연이 허용됩니다) 다시 내려왔습니다. 오전에 할 일을 오후로 미루고 서재에서 놀고 있습니다.  

어제밤엔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읽었습니다. 알라딘 블로거 베스트셀러로 꼽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교사가 반의 아이들에게 딸이 살해당했으며, 살인자가 그 반의 학생이라는 것을 고배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장마다 각기 다른 시점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혀가는 형식이더군요. 일본 장르소설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형식이지요. 책은 분량도 적고 전개도 빨라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반전과 트릭도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일본 서점대상'이라는 뭔가 대단할 것 같은 상 이름에 걸맞지 않은 수준이었습니다. 

 책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웠던 것은 아이의 병적인 의식, 뒤틀린 의식이었습니다. 서구 미스터리 소설에서 병적인 의식은 철처하게 분석과 수사와 단죄의 대상으로 드러납니다. 무시무시한 '타자'이지요. 하지만 일본소설에서, 특히 여성작가들의 소설에서는 병적인 의식과 정상의식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누구나의 의식 속에 잠재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특히 아이의, 혹은 성장하지 못한 어른의 독백 속에서 드러납니다.  

왜 이런 뒤틀린 의식을 아이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걸까요? 소설 속에서 슈야라는 아이가 재미있습니다. 그 아이는 뛰어난 두뇌로 범죄를 기획하는데요, 그 이유는 엄마를 찾기 위해서 였어요. 어머니가 '아버지 때문에' 자신을 버렸고, 자신이 충격적인 일을 벌이면 어머니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지요. 

나오키란 아이의 어머니는 '이상주의자'로 그려집니다. 아이를 어떤 틀에 맞춰 양육하려고 하는 어머니지요. 나오키는 늘 어머니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에게 실망합니다. 전 그 아이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부터 '내가 부족해서 엄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듯 느껴졌어요. 그 아이도 엄마를 잃어버렸던 거지요. 그래서 아이는 나중에 어머니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릅니다.  

왜 아이들이 이런 생각을 갖는 걸까요?  <고백>에서 아버지는 어디에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주 희미하게 회사에서 밤늦게 들어왔다거나 헌신적인 교사라거나, 로 그려질 뿐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언급하지 않거나, 언급하기 싫어합니다. 즉, 아버지는 은폐됩니다. 어떤 억압으로, 아이들 마음 깊숙히 은폐됩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세계가 엄마를 망쳐놓거나 엄마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때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아버지 뿐 아니라, 세상으로 상징되는 약육강식의 위압적인 질서 아닐까요?  

아이들은 세상이 엄마를 빼앗아 갔으므로, 엄마만이 만들 수 있는 자신의 자아마저 뺏긴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없는데, '자기'가 하는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소설에서 트릭으로 활용되는 '만14세 이하 어린이는 살인을 해도 기소되지 않는다'는 법은 자아가 없는 아이들, 무슨짓을 해도 괜찮은 아이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이들은 아주 끔찍한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칭얼대고 있는 겁니다.

 

아이의 뒤틀린 의식과 관련해서 역시 여성 스릴러 작가인 기리노 나쓰오는 이런 문제를 좀더 확장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소설 속에서 여주인공은 어릴 때부터 여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죠.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는 아주 위압적이거나 무책임한 인물로 실체 없이 그려지고 있어요. 즉, 은폐되고 있죠. <아웃>은 일본의 한 명문 사립고등학교의 경쟁과, 그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아이들의 뒤틀린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 세상, 명예와 권력과 돈을 위한 경쟁의 세상에서, 아이들은 엄마를 향해 칭얼대죠. 한결같이.  

문제는 <아웃>의 아이들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커서도 계속 뒤틀린 의식을 안고 살아갑니다. 멀쩡한 직장을 다니면서 밤에는 매춘을 하는 식입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미야베 미유키보다 뒤틀린 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냅니다. 미미여사는 뒤틀린 의식을 분석이나 처벌의 대상으로 다루지요.  

이렇게 쓰고 보니 이젠 서재의 문패를 '책 엉뚱하게 읽기'로 바꿔야 하는 생각까지 드네요. 여러분은 혹시 <고백>을 이렇게 읽지 않으셨나요? 저만의 과장된 생각일까요? 확신이 들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전 이렇게 읽었어요. 뒤틀린 의식의 문제와 관련해서 김승옥의 재미있는 소설이 한편 떠오르는 군요. 나중에 써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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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ng 2009-11-1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무서워서 책을 읽을 수가 없겠습니다. 특히 다자이 오사무까지 언급하시니 저에겐 이 소설이 점점 더 아득해지네요.

톨트 2009-11-1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자이 오사무 부분은 뺐습니다. 원래 비약이었어요. 소설은 그렇게 무섭지 않답니다^^

Seong 2009-11-17 10:17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한번 도전해볼만한 작품이네요. 기회 있을 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yesyesyes 2010-06-25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기리노 나쓰오의 <그로테스크>랑 헷갈리신 것 아닌가요.

톨트 2010-07-07 14:39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에 들어왔는데 댓글이 있어서 놀랐습니다. 맞습니다. <그로테스크>와 헷갈렸네요.
 

 

1. 문장 

<공무도하>를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김훈의 문장이 미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말하지 못합니다. 김훈의 문장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훈은 주어를 생략하지 않습니다. 주술관계는 그에게 포기할 수 없는 원칙과도 같습니다. 김훈은 대명사를 싫어합니다. 그, 그녀, 그것의 사용을 그는 강박적으로 피합니다. 김훈은 고유명사를 좋아합니다. 김훈은 사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부릅니다. 그는 '청소기'라는 말보다는 'LG3500호 전동 청소기'라는 말을 좋아할 것 같습니다.  

김훈은 직유나 은유를 싫어합니다. 특히 직유는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의 문장에서 '죽은 자식의 불알같이 덜렁거리는 전등'같은 비유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김훈은 부사를 아낍니다. 김훈은 명사에 집착합니다. 이것이 김훈의 문장이 힘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에는 우리가 미문의 특징으로 여기는 거품같은 화려함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문장을 쓰려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는 풍부한 비유와 비문이 가져다 주는 효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과 주관을 다루는 걸 포기합니다. 그는 육하의 원칙으로 포획할 수 없는 세상을 육하의 원칙으로 말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가망없는 전투입니다.  

2. 세상의 껍데기 

<공무도하>의 도입부 읽을 때, 저는 굉장한 걸작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 했습니다. 저는 당대의 문제에 개입하는 김훈을 처음으로 만나고 싶었습다. <공무도하>의 결말을 읽을 때, 저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당대의 문제를 다룬 <공무도하>는 김훈의 역사소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루한 인간 세상의 아귀다툼. 운명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실존. 김훈은 여기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김훈은 세상의 껍데기만을 핥습니다. 그는 세상의 속살 속으로 한발자국도 내딛지 않습니다. 그 비루한 아귀다툼의 핵심, 인간들의 분노와 탐욕과 저항을 그는 외면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초기에 역사소설들을 쓸 수밖에 없었을 지 모릅니다. 동시대인들의 의식에서 멀리 떨어진 역사 속에서, 그는 자신의 '객관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김훈의 문장과 보수주의가 이미 예비한 태도일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문제를 다룰 때(기자인 자신의 투쟁과 패배를 이야기할 때)에도 이런 태도를 지킨다면, 저는 김훈이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훈은 당대에 관한 소설을 또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김훈은 세상의 껍데기를 뚫고 들어가, 그 깊은 속살을 만져야 합니다. 소설가 김훈은 기자처럼 팩트만을 나열해서는 안됩니다. 저의 착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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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2012-04-0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훈의 광팬이었으나 "내 젊은 날의 숲"을 읽고 갸우뚱했었고, 뒤늦게 "공무도하"를 접하며 안타까웠습니다. 님의 평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