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무지 덥고 일하기 싫고 마침 일도 별로 없는 하루였습니다. 일이 없는 날에는 상관의 눈치가 보여서 의자 위에 바늘방석을 깔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지요. 그래서 일 핑계대며 회사에 있는 작은 자료실로 갔는데, 거기서 빛바랜 책 한권을 발견했습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었습니다.
갈피를 넘길 때마다 먼지가 날려서 알레르기성 비염을 자극하는, 낡은 책이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읽었으니까 근 이십년 만에 다시 만났네요. 그땐 뭣도 모르고 광동코뮨이니 의열단이니 떠들고 다니며 혁명가를 동경했었지요. 상관의 눈총이 없는 시원한 자료실에 앉아 오후 내내 책을 었습니다.
좋은 책은 역시 두 번 이상 읽어야 합니다. 다시 읽으니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대목들이 새록새록 눈에 들어옵니다. 예컨대, 이런 것들입니다.
-김산을 비롯해 당시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이 톨스토이에 경도돼 있었습니다. 이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김산이 느낀 톨스토이의 사상은 보편적인 대신, 출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략과 전망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김산에 따르면 조선의 톨스토이 주의자들은 대부분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톨스토이라는 입구로 들어가 테러라는 출구를 찾아 나온 것이지요. 김산 역시 무정부주의에 매력을 느꼈지만 결국은 '공산주의'라는 다른 출구로 나왔습니다. 전쟁 와중에도 그는 늘 톨스토이의 책 한권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김산은 톨스토이가 10월 혁명을 겪었다면 대단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테러리즘과 관련해서, 김산은 조선 출신의 테러리스트들이 중국보다 훨씬 많았다고 말합니다. 중국에 비해 식민화된 조선은, 대중운동(그리고 이것을 이끌 정당이나 조직)의 기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저항의 방법이 테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조선에 테러리스트가 많은 것이 역설적이라고 김산은 말합니다. 조선 민족은 매우 유순하고 정이 많은데, 그런 민족일수록 테러리스트를 많이 배출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아랍과 팔레스타인 민족을 떠올렸습니다(물론 저는 테러를 지지하진 않습니다.김산도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나선 테러에 적대적이었지요.)
-김산은 조선 민족이 동아시아의 다른 민족보다 외국어를 쉽게 습득한다고 말합니다. 당시 국외로 유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견 당연해 보입니다. 김산만 해도 중국어, 일어는 물론이고 영어를 독학으로 습득했고(님 웨일즈는 그가 책으로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발음은 이상했지만 대화를 할수록 놀라울 정도의 표현력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북경 의대에 다니며 독일어를, 모스크바 유학을 준비하며 러시아어를 배웠습니다. 김산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조선 민족이 줏대없이 이리저리 흘러다니기 때문에 외국어를 잘한다고 폄하하며 외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자기 민족을 정당화 했습니다. 하긴 요즘도 우리는 이 '약소국의 기질' 때문에 영어에 목숨을 걸지요.
-1920년대 초반, 도쿄의 조선 유학생 중 1/3은 생활비도 없는 고학생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근성이 있어서 조선 유학생 전체를 지도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 집에 가서 떳떳하게 옷과 가구들을 얻어 왔고 인력거를 끌고 잡역부 일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한국 근대사 연구서들에 많이 등장합니다. 조선의 부유층 유학생들은 고학생들을 '룸펜'이라 불렀고 고학생들은 부유층을 '달걀 껍질'(연약하다는 의미)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고학생들의 르네상스는 관동 대지진으로 끝장 나지요.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에게 호의를 느낀 고학생들의 마음도 바꿔놓았습니다. 일본놈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그들은 민족주의자로 전향했습니다.
-상해에서 활약하던 의열단원(조선의 테러리스트들)을 도와주던 아일랜드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영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아일랜드를 떠올리며 헌신적으로 의열단을 도왔습니다. 실재 조선에서 계획한 폭파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는 안동에 차린 자신의 회사를 이용해 테러리스트들을 탈출시켰습니다. 브라보, 아일랜드!
-나중에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작가, 언론인들이 <아리랑, 그 후의 이야기>라는 책을 냅니다. 그들은 당시 팔순을 넘긴 님 웨일즈의 미국 자택을 찾아가 장시간 대담도 합니다. 님 웨일즈는 그때까지도 아리랑을 잊지 않고, 구성지게 부릅니다. 조선시대 사형수들이 처형장이 있는 고개길을 올라가며 '아리랑'이라는 노래를 지어불렀다고 하는데, 이건 미쳐 몰랐군요. 아리랑의 기원에는 여러가지 다른 속설들이 있는 듯 합니다. 어쨌든, <아리랑>의 후속편을 한국 작가와 언론인들이 쓰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다보니 마침내 퇴근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엣취! 재채기를 하며 책을 덮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