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역사적 사실을, 어떤 참담하고 말하기 민감한 사실을, 이처럼 조심스런 방식으로, 이처럼 효과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요? 인물들의 머리통을 꿰뚫어 본 듯이 그려내는 소설은, 최소한 사실을 다룰 때는 불구의 것이라고 귄터 그라스는 말합니다. 귄터 그라스는 게걸음으로 사건의 주변을 천천히 걸어가며 사건의 전모를 밝힙니다. 중요한 것은, 귄터 그라스는 3인칭이나 타인의 시점 뒤에 숨어서 재판관처럼 역사를 판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귄터 그라스는 1인칭을 등장시킵니다. 1인칭으로 후대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귄터 그라스는 과거의 사실에 접근해갑니다. '나에게 그 역사는 무엇이었는가'를 1인칭의 입으로 말하게 합니다.
이와 비교되는 것이 미국의 뉴리얼리즘, 특히 그 시조처럼 여겨지는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입니다. 카포티는 철저히 3인칭 뒤에 숨어서 모든 사건을 객관적으로 종합하고 판단합니다. 그것은 정교하긴 하지만, 최소한 팩트를 다루는 바닥에선, 약간 위선적이지요. (이건 또 좀 과도한 매도이긴 하지만, 최소한 제게는) 뉴리얼리즘은 정교하게 짜여진 위선입니다. 노먼 메일러는 심지어 작가 자신을 3인칭으로 등장시킵니다. 객관적으로 보이고 싶은 강박이지요.
<게걸음으로 가다>가 절판돼서 정말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