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외부세계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나라. 주기적으로 자연재해가 수십만 인구를 먹어치우는 나라... 

아이티에 관해 저는 세 개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는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리며 엄청난 사탕수수 생산량으로 프랑스에 황금알을 안겨준 섬이었다는 것. 그리고 1804년 세계 역사상 최초, 최후의 흑인노예혁명이 성공한 나라라는 것이지요.   

역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블랙 자코뱅>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흑인 노예들의 투쟁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아이티는 1789년 프랑스 해외무역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부유한 섬이었습니다. 매년 좁고 악취나는 선실 속에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흑인노예들이 실려왔습니다. 살아있는 노예들이 동료의 시체 위에 누워 있었고, 선실 전체가 배설물과 오물로 범벅이 돼 있었습니다. 흑인노예들은 1789년 46만명이 이릅니다. 백인 농장주들의 강간으로 생겨난 흑백 혼혈 물라토들도 꽤 많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농장주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왕당파와 애국파로 분열돼 싸웁니다. 혁명의 대의 같은 신념이 있다기 보다는, 본국의 어떤 세력이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줄지 계산기를 두드렸던 겁니다. 여기에 백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던 물라토들도 각자 분열돼 싸웁니다.  

흑인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는 탁월한 전략가 였습니다(현재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항이 있지요). 그는 백인과 물라토 세력들의 분열을 이용하며 흑인들을 조직화합니다. 마흔살이 넘어 혁명에 뛰어든 루베르튀르는 유일무이한 흑인혁명을 일으키고 독립을 우려한 영국군과 스페인군의 침공도 막아냅니다. 탁월한 혁명가이지요. 루베르튀르는 혁명 와중에 프랑스군에 처형 당했지만, 아이티는 독립을 이뤄냅니다. 아메리카 전 대륙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독립을 쟁취한 나라가 아이티였습니다. 

해방된 식민지들이 대부분 그렇듯, 아이티도 기나긴 군부독재의 터널을 지납니다. 유명한 반체제 인사인 다니엘 아리스티드 신부, 그가 아이티에 관한 제 두번째 기억입니다.  

<가난한 휴머니즘>은 아리스티드가 동포에게 편지글형식으로 쓴 에세이집입니다. 아리스티드는 '아빠개'와 '아기개'로 불린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세 차례 대통령직에 오르지만 모두 (미국이 지원한) 군사쿠데타로 쫓겨났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인물입니다. <가난한 휴머니즘>은 아프리카 망명지에서 쓴 에세이들입니다. 그의 반독재투쟁 동지인 르네 프레발은 아이티 대통령직에 오르고 나서 아리스티드의 입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동지'가 '정적'이 된 것이지요.   

<가난한 휴머니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리스티드의 '균형감각'이었습니다. 그는 아이티의 민주화를 목놓아 외치지만, 서구 체제의 이식이 아닌, 국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티드는 미국과 서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배타적 민족주의자가 아닙니다. 다만,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이는 '시장 자율'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동유럽의 반체제인사들과 비교되는 점입니다). 빈자들의 민주주의. 이것이 아리스티드의 화두입니다. 저는 꽤 현실감각이 있는 이상주의자라고 느꼈어요. 

아이티에 대한 세번째 기억은 2007년 EBS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에서 나온 내용입니다(EIDF는 정말 좋은 행사에요.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녹화해가면서 모든 다큐들을 보았지요. 요즘은 짬이 안나요....)  <시티솔레이의 유령>라는 다큐가 있었습니다. 아이티의 시티솔레이라는 거리는 폭력배들이 지배합니다. 젊은 빈민들로 구성된 폭력배들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더 나은 세상이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총으로 우리를 지킨다' 정도의 생각을 가진 자들입니다. 어쩌면 빈민가 젊은이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탈출의 가능성인지 모르겠습니다(그들은 아마 지진 후의 약탈에도 한몫하고 있을 겁니다). 다큐는 이들과 아리스티드의 관계를 추적합니다. 일종의 '유착'이 있다는 거지요. 빈민 폭력배들과 아리스티드의 관계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그들에게 아리스티드가 유일한 희망이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이티의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빈곤 역시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엔 프랑스, 영국, 미국의 탐욕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고, 청산되지 않는 '식민지 의식'의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불행의 역사를 식민 지배자들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되겠지요.(3세계 독재자들이 주로 하는 짓입니다). 그건 비겁한 태도입니다. 하지만! 아이티를 그저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섬나라, 불쌍한 나라라고만 생각하진 맙시다. 세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세계는 평평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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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ek 2010-01-2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고 도는 세상이지만, 어째 요즘 느끼는 것은 당하는 사람만 계속 당하는 느낌입니다. 에구구...

톨트 2010-01-22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답이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