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제 나름대로 폭력에 관한 주제의 책들로 리스트를 만들어 보려 한 적이 있습니다. '학살'은 중요한 카테고리 중 하나였지요. 흐지부지 되고 말았지만 몇권은 읽었습니다(여기엔 국내에 출간된 관련 서적들이 너무 빈약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론서적보다는 주로 생존자의 체험기 위주로 읽어보려 했습니다.  현대사의 모든 문제가 그렇겠지만 특히 학살을 논할 때는 생존자나 목격자의 체험과 기억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제일 중요한 학살은 홀로코스트겠지요. 서경식 교수의 글과 책으로 많이 소개된 프리모 레비의 책들은 거의 읽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이것이 인간인가>를 첫손에 꼽을 수 있겠죠.  

 이 책을 덮고 10분동안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이 압권이더군요. 아우슈비츠가 '호황'을 누릴 때 보다는 나치가 내팽개쳐놓고 떠난 수용소 건물에서 남은 환자들이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정말 눈물겨웠습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수용소 관리 매커니즘입니다. 미셸 푸코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인데요, 수용소에서 나치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감시자'로, 권력으로만 존재합니다. 그들은 형별을 가하거나 처형할 때만 나타납니다. 수용소를 일상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자들은 유대인 부역자들이었어요.  

레비는 냉전이 마지막 맹위를 떨치고 있던 1987년 자살합니다. 이 돌연한 자살에 대해선 여러 분석이 나왔죠. 학살을 경험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악몽을 되새김질 하게 됩니다. 레비는 결국 역사에 희망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아닐까요?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로고 테라피 이론을 아아슈비츠 학살에 역으로 적용해 봅니다. 빅터 프랭클도 생존자였지요.

누가 가장 오래 살아남는가? 이 문제를 프랭클은 꼼꼼히 따지고 드는데요, 결국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고 간직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게 요지입니다.  

한가지 궁금증이 있습니다. 프리모 레비와 빅터 프랭클은 만난 적이 없을까요? 둘다 아우슈비츠에 있었지만, 그곳이야 워낙 방대하고 고립된 수용소들로 이루어져서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뒤에라도 만나지 않았을까, 왜 기록이 없을까 궁금합니다. 물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는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긴 하지만, 같은 유럽의 울타리인데요... 

엘리 위젤의 기념비적인 저작 <나이트>는 특히 '교수대에 매달린 하나님'이란 장이 압권입니다. 교수대에 매달려 죽지 못하고 꺽꺽대는 소년 앞에서, 위젤은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지요(참고로, 교수대에선 목뼈가 단번에 부러지지 않으면 쉽게 죽지 못합니다. 몸무게가 가벼운 소년이 불리합니다). 그 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서는 숱하게 나와 있지요.  

그 다음은 보스니아 내전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보스니아에서 '유럽의 종말'을 볼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지요. 홀로코스트를 통해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한 유럽은 보스니아 내전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유고 내전에 관한 책들은 출간이 상당히 지지부진해요. 홀로코스트야 워낙 유명하고, 유대인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20세기 후반에 가장 중요한 사건인 보스니아 학살은 그렇지 못합니다.  

보스니아 학살에선 오히려 조 사코의 만화가 읽어볼 만 합니다. 비쉐그라드라는 작은 도시에선 밤마다 세르비아 민병대의 학살이 자행됐습니다. 세르비아계 지역 주민들이 민병대에 섞여 있었죠. 그 지역의 작은 다리에서(그곳이 '드리나 강의 다리'와 연관이 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민병대는 밤마다 보스니아계 무슬림을 죽여 다리 아래 버렸습니다.  

그들은 총을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칼로 목을 따서 버리는 걸 훨씬 즐겼지요. 복수의 쾌감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싶어했으니까요. 왜 그랬을까요. 티토 시절까지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계는 잘 지냈습니다. 그들은 서로 치즈를 나눠먹고 축구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민족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섞여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정육점을 하는 마르코가, 잡화점을 하는 이반이, 자기 집에서 놀던 이웃 아이나 아주머니나 친구의 목을 따서 강 아래로 버린 겁니다. 왜 그랬을 까요? 저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추천사를 쓴 이 만화 뒷장엔 흥미로운 관련 서적들이 소개되는 데요, 한권도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원서로 읽어야 하는데, 당최 엄두가 나질 않네요.   

유고 내전에 대해선 영화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겠군요. <그르바비차> <웰컴 투 사라예보> <헌팅 파티> <율리시즈의 시선> 등입니다.  소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도 약간 지루하지만읽어볼 만 해요.  

이 소설은 봉쇄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소설가가 생존자들을 꼼꼼히 취재했다고 하는 군요. 첼리스트나 여자 저격수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물을 나르기 위해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한 사내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습니다. 수도가 나오지 않아서 사내는 양조장까지 물통을 들고 갑니다. 그런데 언덕 밖에 세르비아 민병대의 저격수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물을 길러 가는 건 죽음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총알이 언제 어디서 자신에게 날아올 지 모르니까요. 길을 건너는 건 공포 그 자체 입니다. 건널목은 엄폐물이 없는 대로에 있으니까요. 수시로 목표물을 알 수 없는 총알이 날아오는 상황, 상상이 가질 않을 겁니다.  

이 외에도 매체에만 소개된 밀렌코 예르코비치의 자전적 소설 <사라예보의 말보로>를 읽고 싶은데, 당최 출간이 되질 않습니다.  

르완다 내전은 홀로코스트를 제외하면 20세기 가장 참혹한 학살로 기억됩니다. 숫자도 숫자지만 무차별적으로 이웃을 죽이는 며칠 동안의 핏빛 살육이 끔찍하지요.  

임마꿀레의 체험기 <내 이름은 임마꿀레>에서 우리는 르완다 학살의 진수를 볼 수 있지요. 르완다 학살은 너무 '완벽해서' 생존자가 많지 않아요.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투치족 친구를 집에 숨겨주면서 낮에는 다른 투치족들을 '사냥'하는 한 후투족의 이야기 입니다. 친구에게는 "곧 진정될테니 숨어 있어라"고 안심시키면서 낮에는 다른 후투족과 어울려 칼로 투치족의 목을 수없이 베었죠. 이 친구의 의식은 분리돼 있는 겁니다. '친구'는 인간으로 보았지만, 친구가 아닌 다른 투치족은 '바퀴벌레'로 본 거지요. 인간의 의식은 이렇게 조종될 수도 있습니다.  

또 한가지, 르완다는 자식을 낳으면 성을 물려주지 않는다는 군요. 아버지나 어머니의 성도 다 다릅니다. 좋은 의미의 단어들을 골라 성을 지어준답니다. 멋진 관습이지요? 

르완다와 관련해서는 영화들이 많습니다. <호텔 르완다>가 대표적이겠군요.  르완다 학살과 관련해서는 '식민지 의식'이 중요합니다. 오랫동안 식민지배를 받은 민족의 의식이 어떻게 일그러져 가는 지를 르완다는 제대로 보여주죠.  

식민지 의식과 관련해서는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책에 대해선 "폭력이 우리를 정화하리라"식의 폭력 해방운동만 부각돼 있는데요, 파농이 정신과 의사였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파농은 알제리에서 정신과 의사로 복무하면서 식민지인들의 병든 마음을 숱하게 목격합니다. 식민지의 억압받는 의식은 정당한 폭력으로 치료될 수 있다고 파농은 본 겁니다. 책 뒤에 붙은 환자들의 증례들을 파농은 "불필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실은 이책의 정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폭력해방투쟁의 의미는 퇴색해지만 식민지 의식은 남아 있는 현재에서 그렇지요.   

일제시대 일본군의 학살과 관련해선 노다 마사아키 <전쟁과 인간>을 꼭 읽어봐야 합니다. 이 책은 정말 탁월한 명저이지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가해자인 일본군의 의식입니다. 이들은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해요. 나치 군인이나 세르비아 군인도 가해자로서 다양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렇지 않아요. 왜 일까요? 어릴 때부터 군국주의 의식으로 완벽하게 사육당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일본 군인들은 이제 다른 의식을 갖게 됩니다(중국이 일본군 잔당에게 행한 엄청나게 치밀한 '세뇌전략'은 그 자체로 연구대상입니다). 그들은 일본에 돌아온 뒤 친구들의 태도를 보고 놀랍니다. 친구들은 과거를 아예 잊어버립니다. 가장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기억하지 못해요. 어떤 학살이 있었는지 자신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정말로 끔찍한 의식 상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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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11-26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경식<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보면 독일의 과거사 청산작업을 그다지 높게 보지 않더군요.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원인 중의 하나도 그런 독일을 보고 절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톨트 2009-11-2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레비의 자살에 관해서는 다른 많은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로버트 제이 리프턴은 레비의 자살이 미래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고 분석합니다. "절망을 경험한 사람은 미래를 창출할 유일한 길이 자살하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실제로 레비는 <익사한자와 구조된 자>에서 지구상의 인간들을 모두 쓸어버릴 만한 핵폭탄이 비축돼 있는데 우리는 역사의 반복을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한탄합니다. 레비는 현대 기술문명이 아우슈비츠의 반복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버트 허시가 쓴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에 레비의 죽음에 대한 간략한 분석이 있습니다. 냉전기 유럽사회에서 핵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심각한 외상을 남겼는지는 한번 페이퍼로 남겨볼 가치가 있겠네요.

쿠자누스 2011-07-05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로코스트, 유고 내전에 관해 위에 소개된 책은 숭자의 프로파간다를 대변하는 책입니다.

톨트 2011-07-19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객관적인' 책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