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장 

<공무도하>를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김훈의 문장이 미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말하지 못합니다. 김훈의 문장이 힘을 가지는 이유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훈은 주어를 생략하지 않습니다. 주술관계는 그에게 포기할 수 없는 원칙과도 같습니다. 김훈은 대명사를 싫어합니다. 그, 그녀, 그것의 사용을 그는 강박적으로 피합니다. 김훈은 고유명사를 좋아합니다. 김훈은 사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부릅니다. 그는 '청소기'라는 말보다는 'LG3500호 전동 청소기'라는 말을 좋아할 것 같습니다.  

김훈은 직유나 은유를 싫어합니다. 특히 직유는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의 문장에서 '죽은 자식의 불알같이 덜렁거리는 전등'같은 비유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김훈은 부사를 아낍니다. 김훈은 명사에 집착합니다. 이것이 김훈의 문장이 힘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에는 우리가 미문의 특징으로 여기는 거품같은 화려함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문장을 쓰려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는 풍부한 비유와 비문이 가져다 주는 효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과 주관을 다루는 걸 포기합니다. 그는 육하의 원칙으로 포획할 수 없는 세상을 육하의 원칙으로 말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가망없는 전투입니다.  

2. 세상의 껍데기 

<공무도하>의 도입부 읽을 때, 저는 굉장한 걸작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 했습니다. 저는 당대의 문제에 개입하는 김훈을 처음으로 만나고 싶었습다. <공무도하>의 결말을 읽을 때, 저는 실망하고 말았습니다. 당대의 문제를 다룬 <공무도하>는 김훈의 역사소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루한 인간 세상의 아귀다툼. 운명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실존. 김훈은 여기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김훈은 세상의 껍데기만을 핥습니다. 그는 세상의 속살 속으로 한발자국도 내딛지 않습니다. 그 비루한 아귀다툼의 핵심, 인간들의 분노와 탐욕과 저항을 그는 외면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초기에 역사소설들을 쓸 수밖에 없었을 지 모릅니다. 동시대인들의 의식에서 멀리 떨어진 역사 속에서, 그는 자신의 '객관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김훈의 문장과 보수주의가 이미 예비한 태도일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문제를 다룰 때(기자인 자신의 투쟁과 패배를 이야기할 때)에도 이런 태도를 지킨다면, 저는 김훈이 실패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김훈은 당대에 관한 소설을 또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김훈은 세상의 껍데기를 뚫고 들어가, 그 깊은 속살을 만져야 합니다. 소설가 김훈은 기자처럼 팩트만을 나열해서는 안됩니다. 저의 착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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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2012-04-0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훈의 광팬이었으나 "내 젊은 날의 숲"을 읽고 갸우뚱했었고, 뒤늦게 "공무도하"를 접하며 안타까웠습니다. 님의 평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