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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여, 춤추지 말라 - 해학과 풍자의 인문학
이인환 지음 / 도어즈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사람들아,
칭찬에 춤추지
말라
그리고 책 제목은
<고래여,
춤추지
말라>
인데,
물론
고래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고래를 춤추게 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고래를
춤추게 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
아시는 독자도
있겠지만,
처세술이
자기계발이라는 가면 속에 숨어든 후에 별별 희한한 일이 많이 일어났는데,
고래를
춤추게 할 수 있다는 책들이 등장한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바로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칭찬해주면 잠재력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그런 풍조를 한바탕
웃어주는 글이 있다.
이
책의 첫 글은 그래서 <고래여,
춤추지
말라>이다.
고래여,
춤추지
말라
왜
그럴까?
왜
고래에게 춤추지 말라는 것일까?
저자는 고래의 모습을 수족관에서
찾지 않는다.
고래를
<장자>로부터
끌어낸다.
바로
그게 시점의 변화이다.
고래,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수조관에서 하는 고래 쇼지만,
고래의
위치를 거기에서 찾는 게 아니라,
장자가
말한 북명(北溟)에서
찾는다.
수족관과
북명!
장자가
말한 북명은 곧 상상속의 큰 바다를 말하는 것이니,
수족관을
생각하는 보통의 생각과는 처음부터 차원이 다른 것이다.
먼저 바다가 얼마나 큰가를 장자의
북명에서 찾은 저자는 그래서 그렇게 큰 바다에 살아야 할 고래를 독자들에게 각인시켜준다.
수족관의
고래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북명 같은 넓은 바다에서
살아가야 할 고래를 수족관에 가둬놓고,
칭찬이라는
인위적 방법으로 춤추게 하면?
무엇이
그리 좋을까?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춤추는
고래를 보면서 좋아했었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칭찬’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여겨,
육아의
영역에서부터 처세술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써먹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물론 그것도 가능은
하겠지,
칭찬의
약발이 먹히기도 하겠지.
그러나
저자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고래를
가두어 놓고 춤을 추게 하는 목적은 훈육이나 교육과는 크게 다르다.
고래가
아니라 그 춤을 구경하는 사람이 중심이다.
(중략)
고래에게
고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춤을 추게 하는 것이 칭찬이라면,
그리하여
그에서 발생하는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칭찬은 범죄에 해당하는 사기에 다름 아니다.>(
22-23쪽)
사람들아,
칭찬에 춤추지
말라
그러니,
고래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저자의 말은 실상 고래에게 들으라는 말이 아니다.
칭찬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
또
인정욕구를 이용하여 자기 계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런 말에 혹하여 자기 계발에 목매고 있는 이 땅의 불쌍한 사람들에게,
서점의
자기계발 코너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그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거든,
이런
말은 어떤가?
<고래가
춤을 춤으로써 입는 피해는,
육체적으로는
등지느러미가 굽는 장애를 얻고 정신적으로는 대양을 잃고 속박과 억압에 시달린다.
이에
반해 얻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먹이인 비린내 나는 고기 몇 마리에 불과하다.>
(23쪽)
속이 시원한
말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도처에 해학과 풍자가 넘쳐난다.
비린내 나는 생선 몇 조각을 먹기 위하여 입에 발린 칭찬에 목을 매고 있는 이 현실을 파헤치는 글인 것이다
더하여
더하여 그의 글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의
생각이 흐르는 데로 흘러간다.
<부끄러움을
가르쳐 드립니다>라는
글에서는 사하라 사막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생택쥐베리로,
어린왕자로
그리고는 맹자로 튀어간다.
그리고는
술로.......
그러니,
그의
글은 예측불허다.
글의
제목만 보고 아,
이런
말이겠구나,
하는
식으로 지레짐작하면 글 읽는 재미를 망친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좌충우돌하면서 길을 떠나는 그의 글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읽어보는 재미가 넘치는 독서,
이
책이면 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