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뻥 뚫린 사내를 곁에 두고 건져올린
생각들.
우리는
태어났다,
이
세상에.
무언가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
바로
가족의 법칙이자 세상의 법칙이다.>
(184쪽)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나’가
사슴을 잡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다.
이 말 가운데 가족의 법칙이라는
말은 그 주인공 나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로 이루어진 가족을 말하는데,
그
가족 안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진리는 가족 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는 이 세상에서도 똑 같이 통용되는 진리다.
그 진리는 우리가 입 밖에 내지
않고 살아가지만,
모두
다 공감하는 진리다.
우리는
이 땅에 누군가를,
아니
무엇인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애써 무시하지만,
하루라도
그런 진리를 역행하고 살 수는 없다,
이 책은
어찌보면,
그
진리에 대한 웅변이고,
그
진리에 대한 변증과 반증을 엮어가는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시작은 11살짜리
소년인 주인공 ‘나’가
사람을 죽이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은유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가슴이
뻥 뚫린 사내.>
(43쪽)
그렇게 가슴을 뻥 뚫리게 한 주체가
바로 ‘나’이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다음,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이
계곡 얘기가 아니라 네가 저지른 짓 말이다.
피할
길이 없어.>
(118쪽)
그런 세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
<내가
서 있는 이 땅은 저 산을 따라 어딘가로 미끄러져 무저갱(無底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우리
네 사람,
그리고
매달린 시체.
나머지는
모두 배경에 불과했다.>(57쪽)
살인,
아니 삶에 대한
성찰
‘나’는
그(밀렵꾼)를
죽인 다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생각이 이 소설의 대부분을 이룬다.
따라서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나,
그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깊고 넓다.
그런데 이 소설의 문장이 지나가는
속도를 보자.
현란하다.
마치
‘나’가
트럭 짐칸에 타고 가면서 바라보는 숲속의 경치처럼 휙휙 지나간다.
저자는 그런 속도로
‘나’의
생각들을 헤집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니
잠깐만 그 흐름을 놓치면 -
트럭
짐칸에서 바라보는 경치처럼 -
벌써
다음 계곡을 지나 산에 이르니,
조심
조심해야 한다.
저자는 그런 흐름을 속도감 있게
전달해주고 있는데,
하나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트럭이 달려가는 것을
살펴보자.
지금
‘나’는
트럭의 짐칸에 타고 있다.
<정찰병인
나는 트럭에서 망을 보았다.
바람에
건조해져 잔뜩 찡그린 눈에 들어오는 생명체라곤,
몇
킬로미터를 오는 동안 새 몇 마리뿐이었다.
새들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흰
줄무늬 날개를 활짝 펼치며 무리를 지어 활강하는 새들,
청어치,
덤불어치
소리가 엔진소리,
타이어
소리보다 훨씬 더 컸다.
이름
모를 작은 갈색 새들도 계속해서 길을 따라왔다.
이따금
맹금류도 한 마리씩 나타났는데.....>(13쪽)
다음은 생각의
흐름들이다.
<나는
심장을 놓고 옆으로 물러나 한참을 씹은 다음에야 삼켰다.
드디어
내 인생이 시작하는 기분이다.
열한
살.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해가
지면서 그림자도 짙어졌다.
밤은
큰 품으로 세상의 피조물을 모두 하나로 이어주었다.>
(192 쪽)
어른이 되는 순간을 내면에서 느끼는
장면인데,
그
순간 동시에 현실에서의 시간도 어느덧 밤이 된다.
밤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바로
세상의 피조물을 (어둠
속에서)
모두
하나로 이어주는,
각성의
시간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음은 생각이 튀는 것을
살펴보자.
‘나’에게
한가지 사물,
사건을
그냥 그 자체로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튄다.
한
가지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튀어간다.
여기에서는 죽은 남자를 끌고 온
것에 대한 생각이 어디로 튀는지 살펴보자.
<그(죽은
남자)는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했다.
바위
위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살아 있었다.
아버지가
언덕을 질질 끌고 내려온 다음엔 할아버지가 캠프 근처의 풀밭으로 끌고 다녔고,
다시
아버지가 끌고 나와 두 번째로 그를 매달았다.
우리의
삶은 반복한다.
우리뿐
아니라 그전의 누구라도.
예수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끌었다.
십자가는
고통의 양식,
인간
삶의 형식이다.
그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이 땅에서 무거운 짐을 끌고 간다.
이른바
'예수의
수난'.
예수는
우리 스스로를 동정하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243쪽)
시체를 끌고간 그 행위가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간 행위로 튀어간다.
그러니
이 책 읽으면서 그 가닥을 잠깐이라도 놓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모르게 된다.
소설
속에서 방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지우고 오로지 타깃만을
남겨둔다
그러한 생각의 흐름을 면밀하게
관찰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그래서 끝을 향하여 가는 동안 한시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장과
서스펜스?
물론
이런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지만,
이
소설의 진행을 그대로 사람들의 인생,
삶에
대입해 본다면,
이
소설은 그대로 한편의 인생 기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
바로
가족의 법칙이자 세상의 법칙이다.>
(184쪽)
누구를
죽이느냐?
<이번에는
꼭 죽여라.
조준경으로
녀석을 확인하고 가늠자를 가슴에 맞춘 다음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반드시
해야 한다.
아니면
네가 죽어.>(286쪽)
그렇게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
‘나’가
겨눈 대상은?
방아쇠를
당긴 대상은?
아,
여기에서는
말하지 말자.
다만,
이
말은 기록하기로 하자.
책을
덮은 다음에도 여운을 남기는 말이니까...
,
<내
눈은 훈련받은 대로 배경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오로지 타깃만을 남겨둔다.>(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