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 마운틴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가슴이 뻥 뚫린 사내를 곁에 두고 건져올린 생각들.

 

 

우리는 태어났다, 이 세상에. 무언가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 바로 가족의 법칙이자 세상의 법칙이다.> (184)

 

소설 속의 주인공인 가 사슴을 잡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다.

이 말 가운데 가족의 법칙이라는 말은 그 주인공 나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로 이루어진 가족을 말하는데, 그 가족 안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진리는 가족 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는 이 세상에서도 똑 같이 통용되는 진리다.

 

그 진리는 우리가 입 밖에 내지 않고 살아가지만, 모두 다 공감하는 진리다. 우리는 이 땅에 누군가를, 아니 무엇인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애써 무시하지만, 하루라도 그런 진리를 역행하고 살 수는 없다,

 

이 책은 어찌보면, 그 진리에 대한 웅변이고, 그 진리에 대한 변증과 반증을 엮어가는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시작은 11살짜리 소년인 주인공 가 사람을 죽이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은유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가슴이 뻥 뚫린 사내.> (43)

 

그렇게 가슴을 뻥 뚫리게 한 주체가 바로 이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다음,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이 계곡 얘기가 아니라 네가 저지른 짓 말이다. 피할 길이 없어.>

(118)

 

그런 세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

<내가 서 있는 이 땅은 저 산을 따라 어딘가로 미끄러져 무저갱(無底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우리 네 사람, 그리고 매달린 시체. 나머지는 모두 배경에 불과했다.>(57)

 

살인, 아니 삶에 대한 성찰

 

는 그(밀렵꾼)를 죽인 다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생각이 이 소설의 대부분을 이룬다. 따라서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나, 그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깊고 넓다.

 

그런데 이 소설의 문장이 지나가는 속도를 보자.

현란하다. 마치 가 트럭 짐칸에 타고 가면서 바라보는 숲속의 경치처럼 휙휙 지나간다.

저자는 그런 속도로 의 생각들을 헤집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니 잠깐만 그 흐름을 놓치면 - 트럭 짐칸에서 바라보는 경치처럼 - 벌써 다음 계곡을 지나 산에 이르니, 조심 조심해야 한다.

 

저자는 그런 흐름을 속도감 있게 전달해주고 있는데, 하나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트럭이 달려가는 것을 살펴보자. 지금 는 트럭의 짐칸에 타고 있다.

 

<정찰병인 나는 트럭에서 망을 보았다. 바람에 건조해져 잔뜩 찡그린 눈에 들어오는 생명체라곤, 몇 킬로미터를 오는 동안 새 몇 마리뿐이었다. 새들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흰 줄무늬 날개를 활짝 펼치며 무리를 지어 활강하는 새들, 청어치, 덤불어치 소리가 엔진소리, 타이어 소리보다 훨씬 더 컸다. 이름 모를 작은 갈색 새들도 계속해서 길을 따라왔다. 이따금 맹금류도 한 마리씩 나타났는데.....>(13)

 

다음은 생각의 흐름들이다.

 

<나는 심장을 놓고 옆으로 물러나 한참을 씹은 다음에야 삼켰다. 드디어 내 인생이 시작하는 기분이다. 열한 살.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해가 지면서 그림자도 짙어졌다. 밤은 큰 품으로 세상의 피조물을 모두 하나로 이어주었다.> (192 )

 

어른이 되는 순간을 내면에서 느끼는 장면인데, 그 순간 동시에 현실에서의 시간도 어느덧 밤이 된다. 밤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바로 세상의 피조물을 (어둠 속에서) 모두 하나로 이어주는, 각성의 시간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음은 생각이 튀는 것을 살펴보자. ‘에게 한가지 사물, 사건을 그냥 그 자체로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튄다. 한 가지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튀어간다.

여기에서는 죽은 남자를 끌고 온 것에 대한 생각이 어디로 튀는지 살펴보자.

 

<(죽은 남자)는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했다. 바위 위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살아 있었다. 아버지가 언덕을 질질 끌고 내려온 다음엔 할아버지가 캠프 근처의 풀밭으로 끌고 다녔고, 다시 아버지가 끌고 나와 두 번째로 그를 매달았다. 우리의 삶은 반복한다. 우리뿐 아니라 그전의 누구라도. 예수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끌었다. 십자가는 고통의 양식, 인간 삶의 형식이다. 그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이 땅에서 무거운 짐을 끌고 간다. 이른바 '예수의 수난'. 예수는 우리 스스로를 동정하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243)

 

시체를 끌고간 그 행위가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간 행위로 튀어간다. 그러니 이 책 읽으면서 그 가닥을 잠깐이라도 놓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모르게 된다. 소설 속에서 방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지우고 오로지 타깃만을 남겨둔다

 

그러한 생각의 흐름을 면밀하게 관찰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그래서 끝을 향하여 가는 동안 한시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장과 서스펜스? 물론 이런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지만, 이 소설의 진행을 그대로 사람들의 인생, 삶에 대입해 본다면, 이 소설은 그대로 한편의 인생 기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 바로 가족의 법칙이자 세상의 법칙이다.> (184)

 

 

 

누구를 죽이느냐?

<이번에는 꼭 죽여라. 조준경으로 녀석을 확인하고 가늠자를 가슴에 맞춘 다음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반드시 해야 한다. 아니면 네가 죽어.>(286)

 

그렇게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 ‘가 겨눈 대상은? 방아쇠를 당긴 대상은?

, 여기에서는 말하지 말자.

다만, 이 말은 기록하기로 하자. 책을 덮은 다음에도 여운을 남기는 말이니까...

,

<내 눈은 훈련받은 대로 배경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오로지 타깃만을 남겨둔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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