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스토리
위주에서 벗어나 인식의 지평을 넓혀라
특이한
책이다.
우선 이 책의 저자가
특이하다.
저자
이력이 특이하다.
출판사의 도서 소개에 등장하는
저자의 이력은 이렇다.
<우파니(UPANI)
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이다.
스무
살 무렵부터 음악을 하며 살다가 스물일곱 살에 가톨릭 교리신학원 교리교육과를 졸업했다.
선교사
자격을 얻었지만,
그
뒤 20여
년 동안 한 사람에게도 예수를 전하지 않았고 2008년에
의식이 달라진 뒤 일상을 정리했다.>
그 다음에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
또한 평범하지 않다.
출판사 소개글에서는 이런 말로 그의
집필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성경과
A4용지만
들고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다니며 이 책을 집필했다.>
그러니 이책에 옮겨진 그의 생각은
남의 말을 옮긴 것이 아니라,
저자의
독창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남의 생각과 글을 마치 자기 것처럼 훔치는 사람이 많고 많아,
어떤
생각이 과연 누구 것인지 알기 어려워진 세상인데,
이러한
독창적인 저자의 생각이 반갑기만 하다.
이 책의 주요
요점.
저자는 먼저 이런 전제로
시작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제대로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성경이해가
어렵다는 것은 비단 비신자 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성경에 많은 은유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은유를 벗겨내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많은 은유가 들어가게 된 것은 “예수
당신께서 권력압제라는 시대의 한계 속에 민중의 지적 수준을 고려해 말씀을 그리 담았기 때문이다.”(풀로로그
2쪽)
그런 은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기본 생각은
그것이다.
그렇게
잘 못된 해석을 만들어 내는 장막을 걷어내자는 것이다.
그런 저자의 의견에 찬성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알 수 있기에 그렇다.
문자에
매달려,
이상한
해석에 빠져 성경을 오도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한
폐해를 익히 알고 있기에 저자의 이런 시도가 반갑고,
신선한
것이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을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건처럼 받아들이게끔 스토리로만 주입하게 시킨다든지,
더
쉽게 전하겠다고 자구적 해석으로 애니메이션처럼 술술 풀어낸다면 성경을 읽는 목적을 잃어 버리게 된다,>(48쪽)
바로 이렇게 스토리로 성경 이야기를
만들어 전해질 때에 스토리는 성경의 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되기에,
저자가
제목을 그렇게 잡은 것이다.
“스토리
없는..”
노아의 방주같은 이야기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릇된 정보로 세상사물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셈이 되어, 결국은 이상한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그릇된
세계관을 정립하고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
이 사건에 관한 책의 기록을 다
옮길 필요는 없으리라.
다음과
같은 저자의 생각은 어떤가?
<아브라함이
사실적 인물인지는 사실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성경
기록이 사실이 아니라면,
아브라함
같은 인류가 당시 수만,
수십만명
존재했다고 가정하면 틀림 없으리라.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면 아브라함은 당시 인류 지도급 인사의 대명사와 다르지 않게 되는 셈이다.>
(56-57쪽)
그렇게 성경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성경의 기본 의미가 다가오고,
더
나아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
원하는
바에 한걸음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이렇게까지 말을 하고
있다,
<구약의
선지자와 예언자의 목소리 또한 지구적 해석을 넘어야 진정 들을 수 있기에 이스라엘의 정책도 구약의 자구적 해석을 뛰어 넘어설 때나 바뀔 수 있을
것이다.>(풀로로그
네 번째 쪽)
이 책에서 아쉬운
점,
몇 가지
<서기
140-150년경,
사도
바울의 후계자인 마르키온이 개인의 자격으로 바울서신 10여개와
루카 복음서 가운데 일부만을 ‘정경’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30쪽)
이 글에서 마르키온을 소개하면서
‘바울의
후계자’라
한 것은 잘 못된 것이다.
마르키온은
바울의 후계자가 아니다.
단지
그는 바울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을뿐이다.
그 다음에 생경한 조어를 사용하는 것, 무슨 일인지?
<‘은유를
벗겨내지 않은 말’은
받아들인 사람을 센서화 시킨다.>(풀로로그
둘째 쪽)
이 문장에서
‘센서화
시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이 말은 다시 또
등장한다.
< ~~
하고
성경을 읽으며 인식해 버린다면 해석의 문은 닫히고 엉뚱한 문이 열리면서.
세뇌되고
센서화된 길을 열게 된다.>(46쪽)
‘센서화’라는
말은 영어의 ‘센서(sensor)’에
우리말 '화(化)‘을
결합한 말 같은데,
무슨
말인지?
센서(sensor)라는
단어는 ‘소리,
빛,
온도,
압력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자’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니
문맥을 살펴볼 때에 ‘어떤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어떤 식으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의미 같은데,
이
말이 그런 식으로 쓰여도 괜찮은지 잘 모르겠다.
성경,
스토리 위주의 벗어나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로
그러한 것과는 별개로 이 책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천편일률적으로 성경을 읽어오던 것을 지양하고 이제 스토리를 빼버린 채,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이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저자의 노력은 이 책의
4장
<성경에서
건져 올린 지혜>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니
저자는 그러한 발언,
주장만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가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처럼 우리도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가면서,
이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야 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