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황경신의 한뼘노트
황경신 글, 이인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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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이 책을 읽었다.

 

저자는 친절하지 않다.

 

저자는 친절하지 않다. ? 독자인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이것저것 의아한 대목을 만났는데...

 

첫째는, 글의 분류.

목차(차례)를 보면 글의 제목만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 글들을 어떻게 분류를 해야 하는지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약간의 힌트가 있다. 그림이다. 그 구분되는 부분이 그림이다. 그림이 많이 있다. 그 것으로 글의 내용이 달라진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 차례를 보니, ! 이미 분류가 되어 있다. 글의 제목이 네 칼럼으로 나뉘어 배열되어 있다. 그 하나 하나가 다른 스타일의 글이다.

이런 깨달음(?)이 오히려 이 책을 읽는 재미를 주게 된다는 것, 저자는 알고 있을까?

 

둘째는, 알 듯 모를듯한 타이틀. 

그렇게 읽다가 앞으로 돌아온 김에 다시 표지까지 돌아와 보았다.

그랬더니 이런 글이 눈에 뜨인다. 책의 제목 위에 이런 글이 보인다.

<71 True Stories & Innocent lies>

그러니까 ‘71개의 진실된 이야기 그리고 순진한 거짓!’

 

그런 타이틀이 달린 책이다어떤 의미일까?

거기에 대하여 저자는 일언반구 하지 않으니 별수 없이 책 속으로 들어가 찾아볼 수밖에. 그러니 저자는 불친절하지 않은가?

 

수많은 감동이 보인다.- “이거다!”

 

그렇게 의아함으로 시작한 책이지만, 도처에서 이거다라는 감탄을 자아내는 글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진눈깨비의 움직임을 봅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직선으로 또는 곡선으로, 소용돌이로 다시 휘감김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흔들리다 마침에 땅에 닿는 것들입니다.>(63)

 

진눈깨비를 형상화한 글이다. 진눈깨비에 대하여 이렇듯 애정을 가지고 바라본 이가 있을까? 물론 누군가는 있겠지.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되지 못한 것 투성이입니다라며 진눈깨비를 우리 인생에 대입하여 바라본 이는 없다, 내 기억에저자는 그 진눈깨비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어느 새 진눈깨비, 다 흩어졌습니다라며 공허하면서도 애틋한 그것에 대하여 그리움을 연결시킨다.

 

진눈깨비가 간섭하는 이 세계는 온통 망설임입니다. 나는 그것이 싫지 않습니다.”

이렇게 진눈깨비를 인생의 망설임으로 또한 고통으로, 승화시켜서, ”안부를 묻기가 두렵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하는 글, 그런 글을 읽는 내 심정을 저자의 말을 빌어서 할 수 있겠다.

 

나는 창을 닫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의 공간으로 들어와 버린 무엇을, 나는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64)

 

나는 책을 덮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의 공간으로 들어와 버린 그 무엇, 가슴에 남아 있는 이 감동, 나는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저자의 글은 도처에서 나를 끌어당겼다. 아니 끌어당겨 그의 문 안으로 집어 삼켰다.

 

저자가 두드리고 열어 보이는 수많은 문들

 

그제서야 저자가 여는 글에서 말한 '문'이 생각났다.

저자가 왜 문을 말했는지, 다시 여는 글로 돌아가 음미해 보았다.

 

<이길은 이렇게 끝났지만 막다른 골목은 아니다. 이제 내 눈앞에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수백, 수천 개의 문들이 있다. 만져보고 두드려보고 열어보는 일에는 언제나 망설임과 두려움이 있지만, 그 문 뒤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무엇이 발현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그제서야 나는 저자가 말한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저자는 수많은 문을 두드려 보고 열어보며 우리에게 거기에서 발견한 것들을 글로 형상화 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차례에서 두 번째 열(칼럼)에 들어있는 글들이 그러한 '문'들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가령, ()와 령()이 만나 이루는 글자. 아니 '문'. “언제라도,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가령, 이를테면, 만약에, 마음을 굳게 먹고 누가 누군가를 찾아간다면.”(73)

그러니 령()이 가()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으니, '가령'이 된 것이다.

 

이 글, 저자의 웅숭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서는 무슨 우화처럼 보이기 쉬우나, 그게 아니라는 것. 그렇게 두 번째 칼럼에 속해 있는 글들은 모두다 한 글자가 다른 한 글자를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단어들을 선보이고 있다. 모두다 저자가 만져보고, 두드리고, 열어보아우리에게 보여주는 문- - 들이다.

 

이 책의 얼개 중 중요한 부분

 

그래서 이 책의 구조 중 특징적인 것은 두 번째와 네 번째의 글이다.

두 번째 칼럼에 속하는 글들은 한 글자가 다른 한 글자를 만나 새로운 것-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또 다른 무엇이 발현하는을 만들어 낸 단어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네 번째 칼럼에 속하는 글들은 예컨대 이어지다’, ‘지키다’, ‘기대다등등 우리가 신경쓰지 않고 무심코 사용하는 단어들을 천착한다.

 

숨다를 살펴보자.

 

<난 말이야, 무서워죽겠어. 이 우주가 끝없이 팽창하고 있잖아. 처음엔, 그러니까 말 그대로 처음, 더 이상 처음일 수 없는 그 처음엔, 이 모든 에너지와 물질이 먼지보다 작은, 원자보다 작은 무엇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잖아. 그게 펑하고 터져서 별이 되고 태양이 되고 지구가 되고 당신이 되고 내가 되었단거지.>

 

그리고 이어서 이야기는 전환을 맞이한다.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제정신일 수가 없어. 사방에서 무슨 알갱이 같은 것들이 펑, , 터져서 일 초에 한번 씩 폭발하는 기분이라고.>

 

, 여기서, 잠간 숨을 멈추고 생각해 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무슨 단어가 떠오르는가? 이 상황을 잠재울 단어는? 미리 말했지만, '숨다', 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 생각을 계속 밀어내고, 그 자리를 망각으로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거야. 무시무시한 가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우주가 나를 발견하지 못하기만을 기도하면서 숨어있을 수 밖에.>(250)

 

그런 식으로 저자, 황경신은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 아깝게 - 스쳐 지나간 단어들을 만져보고, 두드리고, 열어보아우리 앞에 보여준다.

 

그러니, 독자들은 토끼처럼 쫑긋하며 귀 기울여 듣는 수밖에

 

모처럼 깊고 시원한 물맛을 본 느낌이다. 그냥 읽어도 그만 안읽어도 그만인 글이 아니라, 마시면 마실수록 우러나오는 깊은 맛을 맛보는듯한 글. 그런 글 만나기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책에서는 하나부터 끝까지 온통 그런 맛을 품고 있으니, 이 경박한 세태 - 그저 말초적인 감각에만 호소하는 경박한 글이 넘치는 - 에 참 별일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처럼,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흡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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