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뜻을 알고나니 저 뜻이 다가온다
이 책의 개요
이 책의 소개 글에
의하면,
이
책은 “지금까지
접근하기 어려웠던 두꺼운 세계 경전들을 지혜의 근원으로써 가볍게 맛볼 수 있도록 풀어냈다.
특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이 시대에 꼭 읽어 봐야 할 7가지
경전들을 중심으로 감동적인 경구와 그곳에 함의된 의미를 맛깔스럽게 정리하고자 했다.
저자는
이를 통해 과거 현인들이 지녔던 소중한 삶의 지혜를 상기시키고 우리에게 인생의 바른 방향과 공부법을 다시금 되짚어 보게
만든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런 취지 하에 저자가
7첩
반상에 차려 올린 음식들과 골라낸 요리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도마복음
-
나그네가
되십시오
중용-
간절함으로
스스로를 이루다
숫타니파타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도덕경
-
머물지
말고 흘러라
금강경
-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바가바드 기타
-
나는
누구인가?
동경대전
-
사람이
곧 하늘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
특히
나같은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
그
중 몇 개는 전혀 거들떠도 보지 않던 경전이다.
심지어
그런 것을 경전이라는 범주로 집어넣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터이다.
그러니
읽기 시작하면서 기대반 우려반으로 생각하면서 읽었음직 하다.
내
경우가 바로 그렇다.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그런데 오강남 교수의 추천사와
저자의 프롤로그를 읽으면서 약간씩 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서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스 뮐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이 책은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경전 하면,
오로지
하나 ‘내
경전’만
있는 줄 안다.
이를테면
기독교인은 성경,
불교
신자는 금강경 식이다.
이
쪽 사람이 저것을,
저쪽
사람이 이 것을 만날 일은 거의 없다.
독선은
무관심과 편견,
무지를
낳는다.
너희
것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조차 알 수 없다.
더구나
종교권력을 쥐고 있는 기득권자들에게 의해 의도되고 탈색된 경의 껍질만 만지작거려서는 그 참뜻을 알기가 요원하다.
눈
감은 신앙으로는 경전에 숨은 속 뜻을 알아채릴 수 없으며 새로운 깨달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12쪽)
그러니 내가 가진 경전을 알기
위하여 다른 경전을 읽어야하는 당위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그 당위성은 올바른 진리의
방향으로 나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막스
뮐러의 말 -
한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
을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만났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는 이미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글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는 나는 마치 나 혼자 이 책에서 막스 뮐러의 숨결을 느낀 양,
의기양양해
하면서 읽었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일곱 가지 경전을 대하는 자세
그래서,
(막스
뮐러의 말을 가슴에 품었으므로),
이
책을 심도있게 읽을 수 있었다.
먼저 경전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경전을
대하는 기본 태도는 어느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경전을
읽는다는 것,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
경을 거울삼아 내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옷깃을 여미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 (8쪽)
그렇게 경전을 읽을 때에 얻어지는
결과를 오강남 교수는 다음과 같은 ‘가벼움’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른바
경(經)을
경(鏡)
삼아
경(輕)하게
되는 것”
경전을
거울 삼아 삶을 가볍게 한다,는
말이다.
이 뜻을 알고 나니 저 뜻을 알게 되는 사례들
그러한 사례들을 몇가지만
추려본다.
가.
도마복음과 누가복음
그 나라는 여러분 안에
있고,
또
여러분 밖에 있습니다.(도마복음,
3)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누가복음
17:20)
그 두 개의 구절이 지향하는 바가
같다.
그래서
이쪽 말을 이해하면 저쪽 말도 저절로 이해가 된다.
나.
중용과 성경 -
중용의 지침과 성경의 황금률은
같은가,
다른가?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내가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충서이며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
도리’(禮)이자
‘사랑’(仁)이다.
이런
중용의 실천 지침이 성경에서 말하는 황금률과는 사못 대조적이란 점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중용의 입장은 일견 소극적이지만 갈등의 소지가 없다.
반면
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는 성경의 입장은 굉장히 적극적이지만 자칫하면 이기심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
나에게
좋은 것이 남에게도 항상 좋은 것이 될 수는 없으며,
되돌려
받고자 행한다면 그 의도가 선하다고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68-69쪽)
다.
우파니샤드와 도덕경
힌두교 경전인
<우파니샤드>에
이런 말이 있다.
<젊은이여,
2 가지
지식을 알아야한다.
높은
지식과 낮은 지식이 그것이다.
종교의식,천문학,
언어를
통한 학습,
그리고
온갖 종류의 예술 창작행위,
이런
것들은 모두 '낮은 지식'이다.
그리고
깨어있음(自覺)을
향한 모든 노력,
이것이
'높은 지식'이다.>(124쪽)
도덕경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無爲)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123쪽)
학문의
길,
하루하루
쌓아가는 길은 ‘낮은
지식’이다.
반면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이니,
그게
바로 깨달음의 증표요 따라서 그게 ‘높은
지식’인
것이다.
더하여 '에리히 프롬'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를
읽었다.
읽었지만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어떤 것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책을 읽는다고 이해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으니,
에리히
프롬은 언제나 나에게 못다한 숙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
책,
읽다가
그 숙제 풀게 되었다.
86쪽
이하에 저자가 에리히 프롬을 풀어놓았다.
<삶의 근원적인 의미에 목마른
이들에게,
에리히
프롬은 삶을 ‘소유냐
존재냐’라는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우리의 학습,
기억,
대화
,
독서,
지식,
그리고
신앙이 어떤 형태인지를 성찰하게 한다.
가령
앎이란 미망을 깨뜨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깊이’
알고자(존재양식)
하는
대신 더 ‘많이’
알고자(소유양식)
급급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다.
내면화하고
변화를 이끄는 학습 대신 저장하고 쌓아두기 위해 학습해 온 것은 아닌지도 따진다.
>(86-87쪽)
바로
이거다.
이것
하나로 에리히 프롬은 나에게 손에 잡히는 실질적인 깨달음이 되었다.
‘소유냐
존재냐’를
다른 방향에서 살피려 할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것이 (그러니
내가 그 책을 읽으면서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한 바가 있다는 말이겠다)
내가
하고 있는 공부의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니,
그
실질적 의미가 이해가 된 것이다.
결론으로
이 책을 다 읽고난 나의 술회는
저자의 저술 의도가 적중했다는 것이다.
다양한
경전들을 한꺼번에 살펴보면서 그 내용들이 때로는 한 뜻으로 꿰이기도 하고,
결국은
이 뜻을 알고 나니 저 뜻을 알게 되었으니,
그래서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