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
역사의 자리에 대한 통찰
이 책은 책의 제목
그대로,
‘그날’을
조명해 보는 책이다.
우리
역사에서 ‘그날’이
가지는 의미를 천착해서 우리 독자로 하여금 역사의 진실과 만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사를
교과서적인 접근 방법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역사로,
우리가
만일 그 당시 ‘그날’을
살았더라면 충분히 경험했을만한 경지로 독자들을 안내해 주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그날’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두 가지 갈래로 찾아 읽었다.
하나는,
지금껏
읽어왔던 역사서에서 언급되지 않아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으며
두 번째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
역사의 행간에 숨어있는 의미를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그 의미를 깨달아 안 것들,
그렇게
두 갈래로 알게 되었다.
1.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다.
조선경국전과 기자조선
역사의 정통성은 어느
시대나,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면
조선은 그러한 정통성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고려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명나라로부터 인준을 받는 사대의 논리에서 정통성을 찾았을까?
여기 정도전이 마련한 조선경국전에
뜻밖의 기록이 보인다.
바로
그 정통성을 다른 데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로부터 찾으려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단군조선이다.
정도전은
그래서 단군 조선에서,
기자조선에서
그 정통성을 찾으려 했으니,
그런
노력이 비록 명나라의 존재 때문에 가려졌지만,
그러한
사실,
잊지말자.
<사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는
기자조선에 대한 내용이 훨씬 많이 나와요.
왜냐하면
옛날 주나라 무왕에 의해서 제후로 책봉된 기자라는 인물을 강조함으로써 '우리도
중국 못지않은 유교적 문화 도덕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거죠.
그래서
크게 본다면 조선이라는 국호에는 단군조선에서 보이는 혈통적인 독자성(하늘의
자손)에
대한 인식도 일부 반영됐고,
기자조선으로
상징되는 유교 문화와 도덕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함께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0-51쪽)
1430년,
조선 첫 국민투표 하던 날(207쪽 이하)
아.
이런
일도 있었구나.
정통
역사서에서는 찾아보지 -
나만
그랬을까?-
못한
기록이다.
세종이 백성들의 세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애쓴 기록이다.
세금
부담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직접 백성들의 의견을 물었다니,
이런
사실을 왜 몰랐을까?
기존의
역사서를 심층적으로 읽지 못한 내 탓도 있으리라.
하여튼
이런 조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려한 세종의 업적을 다시 상기시키는 기록,
읽었다.
2.
사건 이면의 의미를 알게
되다.
최영 장군에 대한
평가
<최영
장군은 참 훌륭한 분입니다.
그
집안의 가훈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였던
것이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됐을 정도거든요.
문제는
당시의 정치적인 혼란 그러니까 권력자들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고 비리가 발생하고 그런 것이 이인임과 몇몇 무장들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데
최영 장군이 바로 그 이인임 정권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뭐랄까 개인적으로는 청렴한데 자신이 맡고 있던 역할의 사회적 의미는 좀 달랐던 거죠.
개인적인 측면과 사회적
역할,
그러니까
시대정신이 다를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16쪽)
태종은 무엇 때문에 왕이 되려고
했을까?
<태종이 왕이 된 과정을
생각해 보면,
독재자가
됐을 거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민본정치라는
측면에서는 어땠나요?>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이다.
과연
태종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왕이 되려고 했을까?
무엇
때문에 그리 많은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잡으려고 했을까?
그런
질문에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답은 태종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 해답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내리고 있다.
<태종이
중앙집권,
즉
왕권을 강화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그것이 백성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99쪽)
3.
한 줄
평-
통찰력 있는
촌평
‘그날’의
출연자들이 인물평을 해놓았는데,
정곡을
찌른 사항들이 있기에 옮겨본다.
'최초의 조선인'과 '최후의 고려인'
<그후
500년을
버티는 좋은 나라로 설계된 것은 정도전의 생각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조선인'
즉
정도전은 고려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생각은 고려의 틀을 벗어나 다음 왕조에 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가장 먼저 조선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 사람,
이런
의미에서 '최초의
조선인'이란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몽주는
'최후의
고려인'인
셈이지요.>
(16쪽)
태종 이방원,
정도전이
그린 조선이라는 그림에 채색을 시작한 사람이다.(103쪽)
양녕대군,
조선
최고의 전성기 세종시대를 연출한 최고의 조연이었다.
(135쪽)
4.
설득력있는 역사의
가정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볼만 하지 않아요?
왕권이냐
신권이냐를 두고 대립했던 이방원과 정도전이 만약 힘을 합쳤더라면 어땠을까?
이방원의
정치적 감각과 정도전의 국정 수행능력이 조화를 이루었다면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102쪽)
이런 가정은 흔히들 해 보는
일이다.
그
때 만약에 누가 이랬다면?
그런
가정은 일면 무익한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유익하기도 하다.
왜냐면
그 당시의 역사를 다시 성찰해 봄으로써 앞으로의 역사 방향에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유익이 있다
할지라도,
이런
가정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점검해본다는 취지에서는 여전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에 그런 가정을 하게 되는 장면들이 많이 있죠.
예를
들어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 서로 장점을 결합했다면 우리 근대사가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마찬가지로
정도전의 참모로서의 능력과 이방원의 리더십이 결합됐다면 분명히 시너지 효과를 냈겠지만,
불행하게도
두 사람이 그렇게 만날 수 있는 정치공간은 마련될 수 없었습니다.>(102쪽)
이게
‘그날’의
출연자들이 우리 역사의 가정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불행하게도’가
결론이다,
그런
가정을 아무리 해봐도 '불행한' 역사를 되돌릴 수 없으니 불행이다.
그러나 이런 책을 읽어 앞으로
진행될 역사는 그런 가정이 필요없도록,
그래서
‘불행’이라는
단어가 우리 역사에 칩입할 수 없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