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개의 상처 이야기
이 책에는 여러 개의 이야기가
있다.
옮긴이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속에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413쪽)고
했다. 물론 그런 큰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등장
인물마다 모두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그런 작은 이야기도 중요하다. 아니 어찌 보면 그 이야기들이 더 중요할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들이 날줄과 씨줄로 엮어지며 흥미로운 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1.
절대로 서두르지 말 것!
혹시 이런 책을 읽으면서 결과에
조급해 하지는 않는지?
그런
독자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결코
서두르고 말라고.
특히
이 소설은 더더욱 그렇다.
저자의
그 신기한(?)
스토리
텔링 기법에 빠져든 나머지,
독자들은
어서 빨리 그 결과를 알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
책의 앞부분에서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오고,
어머니가
등장하는 장면,
그리고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독자들은 애가 탈 것이다.
결과를
알고 싶어서.
과연
진실은 무엇인지?
아버지의
말처럼,
어머니는
정말 미친 것일까?
그래서 혹자는 마지막 페이지를 살짝
엿보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금물이다.
이
책의 묘미는 어머니가 아들 다니엘에게 누차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차분히 순서를 기다리며 읽는 데에 있다.
어서 결론을 듣기 원하며 채근하는
아들의 눈빛을 읽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앞
뒤 잘라먹고 결론만 내면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들리지.
그래서
내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지 말라고 부탁했던 거야.
내
식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주렴.”(290쪽)
“난
결론부터 시작해서 그 사건을 요약해서 말했지.
자세한
내용도 없고,
전
후 사정도 없이 말이다.
그런
실수를 저지르면서 나도 배운 게 있다.
그래서
너에게는 좀 더 철저하게 말한 거야.”(306쪽)
그래서 결국 아들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게 된 것처럼,
독자들도
그렇게 읽어간다면,
책
읽는 재미를 열배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자
말씀하시기를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
했으니,
여기서
이 책 읽으면서 그러한 것도 배워보자.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말이다.
그렇게
하면,
설령
미친(?)
사람에게서라도 우리는
배울 게 있다.
분명히!
2.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게 인생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비단,
가정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이 말은 맞지 않을까?
<행복한
‘사람’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다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저마다의
이유?
바로
그들이 받았던 상처들로 인해서 저마다의 이유를 간직한 채, 서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게 되니,
결국은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숨은 원인이 바로 상처인 셈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제는 사람들은
그렇게 주고받은 상처로 인하여 생긴 상흔(傷痕)들을
가지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
상처를 어떻게 하면 치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3.
상처의 치유!
그러면 저자는 이 소설속에서 어떻게
그 상처들을 치료하고 있는가?
먼저는 만남이다.
어머니와 아들은
만난다.
오랫동안
헤어졌던,
그래서
각자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관심 밖에 있어 상황을 전혀 모르고 지내던 모자가 만나는 것으로 상처의 치유는 첫발을 딛게
된다.
그
무지는 아들,
다니엘이
“어떻게
부모님 형편에 대해 이토록 무지할 수 있었을까?”(49쪽)라는
탄식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무지에 대한 자각은 이런
깨달음으로 아들을 몰고 간다.
<문득
내가 부모님의 재정상황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다면,
모르는
게 또 뭐가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55쪽)
그렇게 만남으로 해서 각자의 상황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
그런
가운에 서서히 이해의 길이 열리고 이해의 폭이 넓어져 간다.
그래서 이 소설의 대미는 이렇게
끝이 난다.
“어머님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411쪽)
재차 병원에 수용되어 가족과
만나기를 거부했던 어머니가 아들을 포함한 가족을 만나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렇게 만남은 치유의 시작이며,
또한
끝맺음인 것이다.
두 번째는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자기를 믿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아들에게 당부한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열린 마음으로 듣겠다고 약속해라.>(
32쪽)
세 번째는 상처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직면(直面)하여
싸매주는 것이다.
그 직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약간의
모험이 필요하다.
그냥
앉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는 바로 아들이 스웨덴으로 날아가 어머니가 대면했던 그 현실을 되짚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들은 어머니가 겪었던 그 아픔의 현장에서 어머니의 상처를 대면(對面)하게
되고,
어머니의
상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과정이 없었더라면 결코 어머니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고 그대로 묻혀 버렸을 것이다.
4.
오해의 근원 -
투사(投射)
그러면 왜 어머니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상황을 그리 오해하며,
특히
미아에 대하여는 사건 아닌 사건을 만들게 되었을까?
바로 어머니가 어릴 때에 겪었던
상처,
곧
그런 상황을 겪었던 그 과거가 미아에게 그대로 투사(投射)된
것이다.
저런
모습을 보니,
내
과거가 떠오른다.
저
아이의 저런 모습이 내가 겪었던 그 아픔일거야,
그러니
내가 그 아이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결국은 그런 몽상 속으로 빠져 들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묘사가
된다.
“일련의
사건들을 보는 엄마의 시각에서 위험이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이다.”(407쪽)
미아에게 어떤 위험도
없었는데,
과거의
상처로 인한 아픔 때문에 어머니는 미아 역시 그런 위험에 처해 있는 줄로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잘못된 투사는 어떻게 해결이
될까?
역시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푸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이다.
이
책에서 아들은 그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다.
할아버지를
만나고,
미아를
만나고,
결국은
미아에게 투사된 것들이 허상에 근거한 것임을 파헤치게 된다.
아들 다니엘은 미아와 안데르스에게
런던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나주기를 요청한다.
이때
미아의 대답은 가슴을 울리는 명대답이다.
“틸데
아줌마(어머니)라면
저를 위해 그렇게 했겠죠.”(400쪽)
그렇게 상대방을 배려하고
안아준다면,
그
상처들은 쉽게 아물 것 같다.
미아의
그런 행동으로 결국 어머니는 오랜 고통에서 빠져 나오게 된다.
5.
끝으로 이 소설의 제목에
대하여
한글판 제목은
<얼음
속의 소녀들>이지만
원제는 <The
Farm>이다.
따져
보자면,
주인공의
부모가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농가쯤 되겠다.
거기에서,
그
곳을 기점으로 하여 벌어지는 사건들,
그
장소를 지칭하는 제목이 원제인 <The
Farm>이다.
그런데
왜 한글판 제목은 <얼음
속의 소녀들>일까?
그런 제목이 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있다 생각했었다. 그러길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사건이 벌어지는 농장 근처 호수가 얼어붙은 것을
발견하고,
혹시
그 얼음 속에 행방불명된 미아가 숨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으로 그 시점부터 더 주의 깊게 읽어 보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얼음
속의 소녀>에서
‘얼음’은
주변에서 냉대받는,
따돌림
받는 것의 은유이고,
‘소녀들’은
소녀 시절의 어머니이며,
또
한명의 소녀는 미아로 파악이 되었다.
그러니
그런 얼음(냉대,
따돌림)
속에서
살아온 어머니의 아픈 과거가 곧 제목으로 형상화 된 것이리라.
그러나, 비단 이 책의 주인공들만
그런 얼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그런 아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그런 얼음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를 자문해 볼 일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상황 여부를 떠나 이 세상 자체가 얼음으로 꽉 채워져 있지 않은가?
그
얼음 속에서 과연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
소설을 읽고나니 그런 생각이 짙게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