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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을 위한 산책 - 헤르만 헤세가 걷고 보고 사랑했던 세계의 조각들
헤르만 헤세 지음, 김원형 옮김 / 지콜론북 / 2025년 4월
평점 :
방랑을 위한 산책 - 헤르만 헤세가 걷고 보고 사랑했던 세계의 조각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헤세는 걷는다. 걷고 생각하고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쓴다. 편지도 쓰고, 글도 쓴다,
우리는 그런 헤세를 만난다.
이 책에서 헤세를 만난다, 걷는 그를, 그림 그리는 그를, 그리고 사색하는 그를 만난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조용하게 걷는 모습의 헤세가 떠오른다.
그는 앞에 놓여진 길을 차분하게 걷는다. 그런 길을 따라 걷고 싶어지는 글이다.
걷는 헤세를 따라 우리도 걷는다, 사색하면서.
이 책에서 만나는 헤세는 먼저 걷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책의 첫 구절을 음미해보자.
이 집에서 나는 작별을 고한다.
이제 오랫동안 이런 집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알프스를 넘어가는 고갯길에 가까워질수록 북부 독일의 건축양식도 끝나기 때문이다.
독일의 풍경과 독일어와 함께. (풍경과 소리가 동시에 보이고 들리는 기분이다)
경계를 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방랑자는 여러 면에서 원시적인 사람이다.
마치 유목민이 농부보다 원시적인 것처럼, (여기서는 인류 역사도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나 유목민은 정착을 극복하고 국경을 경멸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미래의 길잡이로 만든다.
만약 많은 이들이 내가 느끼는 것처럼 살아있는 존재를 억지로 가르는 국경에 대해 깊은 경멸을 품고 있다면,
전쟁과 봉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제발, 그런 날이 속히 오기를!)
국경보다 더 어리석고 증오스러운 것도 없다.
그것들은 대포나 장군과 다를 바 없다. (14-15쪽)
(이런 글은 필사를 하고 싶어진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아쉽다. 그를 따라 걷는 마음으로 필사해서 옮겨놓는다,)
걷는 헤세, 그러나 그는 단순히 걷는 게 아니다.
걷고 생각하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은 또한 멀리 국경에 닿는다.
그 국경에 닿은 그의 생각은 또한 인류에까지 이른다.
인류에 닿은 생각은 인류애가 아니면 무엇일까.
그래서 그에게 걷는다는 것은 또한 사색이고, 인류를 향한 고뇌다.
비오는 날에도 걸어보자.
나는 머무는 여관 근처의 강변을 걷는다. (43쪽)
굳이 더 인용할 필요가 없다.
독자들은 그저 헤세를 따라 차분하게 걷는다. 걸을 수 있다.
책 속으로 들어가, 헤세가 걸어간 길을 따라가면서 그가 남긴 생각들을 같이 음미하면 된다.
헤세의 다른 글 어느 하나 그러한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글은 없지만, 이 책의 글들은 더더욱 그렇다, 독자들을 무한 생각의 경지로 이끌어간다.
그러니까 헤세다.
헤세가 언급한 인물들
이 책에서 헤세가 언급한 인물들은 많다. 그런 중에서 이 사람은 특별하다.
페루치오 부조니가 떠오른다. (22쪽)
그는 부조니를 떠올린다. 부조니를 만났던 때를 말해준다.
당신은 참 시골사람처럼 보이네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 다정한 사람이 약간의 아이러니를 담아 내게 말했다. (22쪽)
부조니가 누구인가? Ferruccio Busoni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작곡가다. 그를 우리는 그의 이름을 딴 콩쿠르로 기억한다.
그의 사후 몇 년이 지난 1949년부터 그를 기리는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개최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음악가들도 많이 입상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부조니를 헤세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또한 구스타프 말러 (23쪽)도,
또한 이런 말도 하니,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음악도 들을 수 있으니, 일석 몇 조인가.
베토벤과 니체같은 위대하고 고독한 존재라 할 수 있다. (39쪽)
그림 그리는 헤세
또한 독자들은 그림을 그리는 헤세를 만난다.
몇 몇 다른 책에서 그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직접 여기서 듣게 된다.
나는 이 집을 노트에 그린다. (15쪽)
나는 우물에 기대어 목사관을 스케치 했다. (34쪽)
심지어 그는 꿈에서 본 여인을 위해서도 그린다.
그녀를 위해 작은 노트에 마을과 탑을 그린다. (25쪽)
오늘 나의 자리는 호숫가 나무 옆이다. 노트에 가축이 있는 오두막과 몇 개의 구름을 그렸다. 그리고 보내지 않을 편지를 썼다. (53쪽)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내가 젊었을 때 신학을 얼마나 경멸하고 조롱했던가! 하지만 지금 내가 알게 된 것은 신학이 우아함과 마법으로 가득 찬 학문이라는 것이다.
신학은 은혜와 구원, 천사와 성서와 같은 내밀하고 사랑스럽고 축복받은 것들을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룬다. (30-31쪽)
불행 속에서 사람은 심오해진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런 문제가 없다. 존재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으며, 생각은 놀이처럼 가벼워진다. 사람들은 그저 느끼기만 하면 된다. 세상은 아름답고, 삶은 짧다. 모든 소망이 잠들지는 않는다. 나는 더 많은 눈과 폐를 가지고 싶다. 나는 저 풀밭에 다리를 뻗은 채 내 다리가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37쪽)
그런 문제가 없다고 느낀 이곳은 어디일까?
가난한 농부들이 살고 있는 농가이다. 그곳에서 헤세는 평안함을 느꼈다. 얼마나 편안함을 느꼈는지, 풀밭에 다리를 쭉 뻗은 채 그 다리가 더 길어졌으면 하는 바람까지 비치고 있으니, 그의 편안한 심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우리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이 책은?
독자들은 이 책에서 헤세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편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독자에게 건넨다.
당신도 헤세와 함께 걷는 마음으로 이 책에 잠시 머물게 되기를 바란다. 목적지를 향해 걷기 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방랑자처럼. (9쪽)
헤세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다, 충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