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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평점 :
고독의 이야기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의 여러 가지 글들을 모아 놓은 ‘글모음집’이다.
발터 벤야민은 말 그대로 다양한 글을 썼는데 이 책에는 이런 분야의 글들이 실려있다.
크게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부: 꿈과 몽상
2부: 여행
3부: 놀이와 교육론
이렇게 읽어보자.
일단 읽기 시작한다.
일단 읽기 시작한다는 말은 이 책의 303쪽 이하에 있는 <편집자 해제>를 읽지 않고 본문의 글을 읽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한, 발터 벤야민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읽어보는 것이다.
몇 개 글꼭지를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게 뭐지? 이게 소설이야, 뭐야, 글의 내용이 영.....
그런 생각이 들어도 계속 읽어보자. 어디까지?
<1부: 꿈과 몽상> 편을 다 읽을 때까지 그저 읽어대는 것이다.
그렇게 읽은 다음에 이제 목차로 돌아가서, 1부 글의 성격을 파악해보는 것이다.
꿈과 몽상? 아, 그래서 글들이 그랬구나........
그리고 다시 2부로 넘어가자. <2부: 여행>이다.
2부에서는 조금씩 글의 갈피가 잡히기 시작한다. 글의 앞 뒤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여행에 관련된 글이구나, 하는 실체가 잡히기 시작한다.
그래도, 글이 마무리 되지 못한 듯한 부분이 많아, 그저 감만 잡을뿐, 여행의 진정한 맛을 아직 느끼지 못한다. 아직은 발터 벤야민의 글이 낯설다.
조금더 참고 읽어가자.
이제 조금씩 보인다, 글이, 안개속을 헤매던 글들이 이제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한다.
22번 글 <세이렌>이다.
세이렌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괴물들이다.
세이렌이목이니 당연히 뱃사람들이 등장하고, 뱃사람들을 유혹하는 설정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글 안에 뱃사람은 등장한다. 스페인의 세비야 항이다.
배도 등장한다. 베스터발트 호(號), 그 배의 선장은 G.
그 배에 탄 승객은 한 사람 클라우스 신징어,
G 선장과 승객 클라우스 신징어는 식당에 단 둘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식당의 위치는?
배안, 배 밖? 127쪽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배 밖 세비야의 어느 곳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갑자기 글은 끝이 난다. 신징어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중에 글이 끝이 나는 것이다. (129쪽)
그런데 정작 세이렌에 대한 언급은 81쪽에 미리 나오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어보았다.
예전에 세이렌들이 오디세우스 앞에 나타났을 때도 이렇게 바다의 파도에 올라탄 모습이었다. 그 때 그 바다는 그리스인들에게 낯선 바다였을 테고, (............) (81쪽)
왜 글이 이럴까?
그런 ‘왜’를 알아보기 위해, 별 수 없이 <편집자 해제>를 읽을 수밖에 없다.
그랬더니, ‘왜’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편집자 해제>를 읽어보자.
한 선장이 한 승객에게 썰을 풀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자기가 겪은 신기한 일을 들려주고,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자기 지인 이야기를 전하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이 전해들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308쪽)
이게 바로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 방식이다.
그렇다면 벤야민이 시도하고 있는 것이 변화된 조건들 아래에서 스토리텔링의 구술성을 재활성화하는 것이라고 해도 될까? (308쪽)
이런 종류의 글에서 벤야민은 내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형식을 놀라운 방향으로 (형식이 스스로 허물어질 수도 있을 지점까지) 밀어붙인다. (308쪽)
그런 글을 지향하고 있는 벤야민의 글, 정수를 이 책에서 맛보게 된다.
그렇게 글의 성격을 확실히 하고 읽으니,
이제야 이런 재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묵은해를 돌아보는 여행이 시작됩니다. 열두 장의 장면이 지나가고, 각 장면에 짧은 설명이 쓰여있고 (........)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들입니다.
그때 저 길로 가고 싶었는데
그때 저 편지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때 저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는데
(........)
그때 저 여자를 따라가고 싶었는데
(.......) (43-44쪽)
내가 그때 처음으로 경험한 그리움, 아예 그리움의 대상 안으로 들어가 있던 나를 엄습했던 그 그리움은,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되어 대상을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그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된 그리움이었다. (51쪽)
고대 로마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연되었던 희가극 한 편이 이렇게 베를린이라는 비밀 무대에서 공연된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법칙을 물려받았고 (사랑을 둘러싼 소동이 스물 네 시간 내에 얽히고 풀린다.) (157쪽)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일치시켜야 한다는 법칙,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보았던 것인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재미있다.
또 이런 글은 어떤가?
여행 중 독서와 기차 탑승의 관계는 기다림과 기차역의 관계 못지않게 밀접하다. (165쪽)
이런 내용이 들어있는 <서평: 범죄소설을 여행 중>(161-166쪽)은 이 책에서 빼놓지 말고 읽어야하는 글이다. 글의 장르가 서평이니, 이 정도는 되어야 서평이라 할 것인데.....
다시, 이 책은?
말이 길었다. 이 글의 요지인즉,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벤야민의 글에서 재미를 맛보려면, 먼저 이 책의 후반부에 실려있는 <편집자 해제>와 <편집자의 말>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언뜻 보면 글이 이상하다, 고 느껴지는 글들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면 벤야민의 속내 깊은 글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곳곳에 이런 유머도 숨겨 놓았다는 것을 알고, 어, 벤야민의 글, 읽을만하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이런 부분, <숨기고 있던 이야기> (109쪽~), <고독의 이야기들> (182쪽~)
해서, 서평 속의 이런 말은 자기 자신의 책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인물 묘사들은 종종 참으로 매력적이다. 이 책이 어떤 책인가와 상관없이 이 책을 읽을만한 책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 묘사다. (102쪽)
아참, 하나더, 파울 클레의 그림을 좋아하시는 독자라면 맘껏 파울 클레를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라는 것, 밝혀둔다.